[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어느 하늘,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리
피 한방울 섞이지 않아도 이 세상에서 단 한 분, ‘삼촌’이라 따르던 오형원박사님. 소천하셨다는 비보가 왔습니다. 닷새 전 통화했을 때 힘이 없으신 것 같아 염려했지만 이토록 빨리 떠나실 거란 생각은 못했습니다. 남은 사람들에게 마음의 준비할 시간도 주시지 않고 왜 이렇게 황망하게 서둘러 가셨습니까.
청년보다 활기차고 적극적인 삶을 보며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했지요. 아흔에 가까운 연세에도 카랑카랑하고 박력 넘치는 목소리로 소신을 굽히지 않는 뼈 있는 농담, 엣지 있는 매너와 재치로 청중을 장악하는 그 위력의 출발점은 어디인가요. 제 전화 안 받으시면 “노인이 왜 그리 바쁘세요?”라고 투정을 부리는데 “내가 이래도 오라 카는 데가 너무 많다. 우짜노, 아직 할 일이 많은데”라고 하셨지요. 새해 한참 지나 문안인사 드리면 “해가 바뀌어도 코빼기는 커녕 문자 인사조차 까먹는 조카 소식 기다리는 한심한 삼촌도 샘샘(same same)이다”고 너그럽게 웃으셨지요.
서울대에서 의학박사학위 받고 월남전에 야전이동외과 의사로 참전, 무공훈장을 받은 뒤 1973년 도미해서 수많은 단체에서 총회장을 맡은 이력이나 수상경력으로 삶을 정리하기에는 그 분의 인생은 굴곡이 넓고 깊고 광활합니다. 솔직하고 직설적이며 예리한 판단과 서늘한 통찰력으로 후진들의 앞날을 밝히며 갈 길을 예지합니다. “끊임없이 배우는 것이 늙지 않는 비결”이라며 배움의 끈을 놓지 않고 늦깎이에 서예에 입문, 한국서예공모전에 오체상(五體賞)을 수상하셨지요. 내가 ‘나의 삼촌’에게 매료된 것은 인간적인 따스함 속에 끓어오르는 예술적 성취에 대한 갈구 때문이 아닐런지요.
처음 뵌 그 날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오래 전 경북해외자문위원 초년병으로 콜로라도 주 록키마운틴 독수리 집(Eagle Nest)에서 열린 모임에 참석했습니다. 독수리집은 ‘불굴의 태권도인’으로 국민훈장석류장을 수상한 정우진대사범이 산 꼭대기에 지은 수련장의 이름입니다. 캠핑 가듯 바리바리 먹을 것 싸 들고 갔는데 폭풍으로 커넥션 비행기가 이틀 동안 뜨지 못해 늦게 도착, 허기에 먹은 갈비에 체하고 고산병에 걸려 밤새 토하고 난리가 났지요. 오랫만에 만난 위원들은 제 목숨(?)에는 관심 끄고 희희낙락 잘 지내는데 오박사님은 약을 챙겨주시고 머리에 손을 얹어 열을 쟀습니다. 그 손은 아버지 손처럼 따뜻했습니다. 아버지는 제가 두 살 되던 해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는 땅문서를 삼촌에게 맡겼는데 삼촌은 아버지가 남긴 재산을 모두 가져갔지요.
이제 왜 오박사님을 삼촌이라 부르는지 답을 드릴 시간입니다. ‘삼촌’이란 단어는 제 유년의 고통과 상처로 얼룩진 슬픔입니다. 저는 증오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마지막 약 두 알을 꺼내 주실 때 “제가 삼촌이라고 불러도 되나요?”라고 물었지요. 제 아픈 얼굴을 빤히 보시다가 “삼촌이라 부르고 싶으면 그렇게 해”라고 하셨습니다. 살아있는 동안 누군가를 미워하고 고통을 되삭이는 것은 바보짓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박식하고 멋진 나의 새로운 ‘삼촌’을 만나 유년의 슬픈 기억을 지웁니다. 사람의 인연은 시공을 초월합니다. 어쩌면 죽음이란 것도 살아있는 자들이 그리움의 강에 떠나보내는 가을 낙엽이 아닐런지요. 만나고 헤어지는 수많은 작별 속에 죽음은 좀 더 긴 이별이고, 새벽 물안개처럼 헤어날 수 없는 아득한 그리움으로 남습니다. (Q7 Editions 대표, 작가)
이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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