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니아 석 미주총연 초대회장, ‘한글 간판 달기 주도’…타운 초석 다진 여장부
자동차 번호판은 ‘KOREAN’
한인들 위한 봉사의 삶 실천
디즈니랜드에 한국인형 비치
자서전 '맨발의 소니아 석'에는 애국심을 엿볼 수 있는 일화가 있다.
석 여사가 캐딜락을 처음 산 건 1964년이었다. “나는 DMV에 신청한 ‘KOREAN’ 번호판을 캐딜락에 달고 다녔다. 항상 한국을 소개하고 싶었다. 뒷창문에는 태극기도 붙였다.”
석 여사는 16살 때 첫 운전대를 잡았던 인물이다. 고향인 평안남도에서 최초의 여성 운전사였다. 남자들을 제치고 운전대를 잡을 정도니 강단 있던 여성이다.
미국에 온 건 1948년이다. 30대 초반이었다. 집안을 살리기 위해 장사를 하느라 공부를 하지 못했던 것이 늘 아쉬웠다.
그래서 선택한 게 유학이다. 영어 한마디 못해도 끈기로 버텼다. 노스캐롤라이나 장로교 대학원(1949년), 몬터레이 시립대학(1952년), 샌프란시스코 주립대(1955년) 등에서 국제무역 등을 공부하며 미국 생활에 정착했다.
석 여사는 유학 도중 한국 전쟁을 겪었다. 자서전에서 그는 “피란민들의 울부짖는 모습이 연일 보도됐다”며 “그때부터 나는 조국과 민족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배웠고 오늘까지 계속 기도한다”고 적었다.
이는 석 여사가 고국은 물론 미주 한인사회를 위해 많은 것을 나누게 되는 계기가 됐다.
그는 1962년 부동산 업계로 뛰어 들었다. 한인 최초의 브로커 자격증과 감정 평가사 자격을 취득했다. 큰 돈을 만지기 시작했다. 24시간이 부족할 정도였다.
자서전에는 “가주한국외환은행 지점, 한인회관, 대한항공 등을 위해서는 좋은 조건으로 건물이나 땅을 사주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그렇게 번 돈을 한인 사회에 다양한 방법으로 환원했다.
LA의 한인 인구가 3000명가량 될 때다. 석 여사는 한인센터 이사로 한인 사회를 위해 첫 봉사를 시작했다.
그는 한인타운의 초석을 다진 인물이다. LA지역 올림픽 길에서 미국인이 운영하는 업소들을 돌며 한글 간판을 붙이라고 설득하고 다녔다.
미국인 업주들은 당연히 반대했다. 석 여사는 그때 일을 이렇게 적고 있다.
“미국 사람들이 호통을 쳤다. 그러나 나는 이게 너희 장사를 잘해주기 위해 하는 것이니 기다려 보라고 설득했다. (중략) 미국 간판을 우리말로 바꾸어 쓰기 시작할 무렵부터 올림픽길이 한인타운의 면모를 더해갔다.”
이후 미주총연합회 초대 회장, LA한인회장(1971년) 등에 선임됐다. 이듬해 전국체전에 참여할 미주선수단의 초대 단장을 맡아 고국 땅을 밟기도 했다. 그는 미국 정계와도 가까웠다. 닉슨 대통령 행정부 시절 공화당 가주유산위원회 부회장(1972년), LA시 커미셔너(1976년), 공화당 가주지구당 부위원장(1981년) 등을 맡아 한인 사회의 정치력을 다져갔다.
세계적인 테마파크였던 애너하임 디즈니랜드 내 ‘스몰 월드’에 최초로 한국 인형을 넣은 것도 석 여사가 한 일이다. 그가 일평생 한국과 한인 사회를 위해 한 일을 제한된 지면에 모두 담기엔 부족할 정도다. 그만큼 많은 씨앗을 뿌렸다. LA에서 한인으로서는 지난 1971년 처음으로 치과를 개업한 장기열 박사가 석 여사의 장남이다.
석 여사는 80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삶의 행적에는 ‘애국’ 한 단어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장열 기자 jang.yeol@korea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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