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향만리] 旣往不咎(기왕불구)
공자의 제자 재여(宰予)가 큰 실수를 했다. 노나라의 왕 애공이 토지신에게 제사 지낼 때 신주로 사용하는 나무에 대해 묻자, 재여는 “하후씨는 소나무를 사용했고, 은나라는 잣나무, 주나라는 밤나무를 사용했습니다”라고 답했다. 말재주가 좋은 재여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밤나무 율(栗)’이 두려움을 뜻하는 ‘전율(戰慄)’의 ‘율(慄)’과 발음이 같음에 착안하여 “주나라가 밤나무를 사용한 까닭은 토지신에 대한 전율을 조성하기 위해서입니다”라는 근거 없는 자의적 설명을 덧붙였다. 그리고선 그런 설명을 한 것을 자랑삼아 공자에게 보고했다.그러자 공자는 “이미 이루어진 일이니 더 이상 말하지 않겠고, 끝난 일이니 재삼 언급하지 않겠으며, 지난 일이니 더는 탓하지 않겠다만…”이라면서 제멋대로 근거 없는 답을 한 재여를 엄하게 꾸짖었다. 여기서 우리가 흔히 “기왕지사 탓하지 말고”라는 식으로 사용하는 ‘기왕불구(旣往不咎)’라는 말이 나왔다.
잘못을 반성하는 경우 ‘기왕불구’는 새 출발의 양약이 되지만, 반성하지 않는 자를 반성한 것으로 간주하여 ‘기왕불구’의 관용을 베풀면 더 악한 새로운 악을 낳게 된다. 진정한 사과가 없는 일본에 대해 ‘기왕불구’를 적용하지 못하고 또 안 해야 하는 이유이다.
김병기 / 서예가·전북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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