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인연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아이의 시간은 뛰어 넘더라도 유년의 천진한 시절을 지나면서 키가 자라고 생각의 폭도 넓어졌음에 틀림이 없다. 혈기 왕성했던 꿈 많은 청년의 삶과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시작된 시카고에서의 이방인의 삶은 그야말로 하루를 쪼개서 이틀을 살았고, 학교와 직장을 넘나드는 피곤하고 바쁜 시간을 보냈었다. 그때는 잠을 잘자고 일어나면 어제의 피로가 말끔히 사라져 버리는 느낌을 느끼곤 했었다. 눈을 뜨면 일터로 나갔고 밤이 깊어서야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일에 매달리며 중년의 시간을 보내고 성공과 실패를 경험하면서 물질이 삶의 목표가 될 수 없음을 뼈저리게 느끼곤 했었다. 성공한 삶인 듯 했지만 실패한 삶이었고 실패가 결국 성공으로 가는 길을 만들어주기도 했었다. 지나온 세월을 돌아보는 동안 인연의 얼굴들이 하나 둘 떠올랐다.
구부정한 허리로 걷고 있는 노년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이제는 백세시대인데 나이가 뭐 그리 중요하냐고 되뇌어보지만 한 사람의 생애는 수많은 인연과 관계 속에서 만들어져 감을 새삼 깨닫게 된다. ‘어리석은 사람은 인연을 만나도 몰라보고, 보통사람은 인연을 알면서도 놓치고, 현명한 사람은 옷깃만 스쳐도 인연을 살려낸다.’는 수필가 피천득 선생의 인연에 관한 글이 생각난다.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지금은 만날 수 없어도 일생 마음 언저리에 살고 있어 사람이 있다. 좋은 날에도, 좋지 않은 날에도 그와의 인연을 생각하면 입가에 환한 미소가 지어지는 사람이 있다. 그와 함께한 모든 시간이 눈부셨고 아름다워서 다시는 그런 시간을 가질 수 없지만 마음에 꽃등처럼 길을 밝혀주는 사람이 있다.
사실 인연인 사람은 어려울 때 드러나게 된다. 스쳐 지날 사람은 그때 떠나려 하고 오래 머무를 인연은 그때 어려움을 함께 헤쳐나가려 한다. 사람과의 인연으로 깊은 상처를 받기도 하고, 행복한 순간을 경험하기도 한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인연이 된 윤동주의 〈별을헤는밤〉은 아직도 내 마음속 어딘가에 자리잡고 있어 밤하늘을 쳐다볼 때나 친구들 이름이 생각날 때면 마음의 문을 열고 나온다. 이 나이에도 잊혀지기 보다 더 또렷이 기억나는 싯귀이다.
윤동주 시인의 인연은 친구 정병욱이다. 그 인연은 우리에게 윤동주가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한 후 잊혀질 뻔한 소중한 시들을 모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시집을 출간하게 되었다. 이보다 더 귀하고 소중한 인연이 또 있으랴.
우리의 삶 속에도 더 사랑하고 더 안아주고 더 깊이 삶을 나누고 싶어지는 사람이 있다. 우린 세상에서 그런 사람을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시간을 보내기를 원한다. 반가운 인연의 끈으로 남겨진 삶의 부분을 가꾸어 나가기를 원한다. 그와 함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인생의 꽃을 피우며 살고 싶다. 우리에게 부닥쳐오는 희노애락의 삶을 통해 만들어갈 소중한 인연, 함께라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는 사람을 오늘이라는 시간 속에서 만나기를 소원한다. (시인, 화가)
신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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