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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마당] 내가 체험한 6·25

1950년 6월25일 새벽 4시. 소련제 탱크를 앞세운 북한군은 옹진반도, 춘천, 홍천, 강릉에서 동시 다발로 38선을 침범하고 물밀듯 쳐들어왔다. 단 3일 만에 서울이 점령당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여기엔 6·25의 미스터리가 있었다. 1950넌 5월, 북한군의 남침 동향이 곳곳에서 감지되었다. 이로 인해 5월11일부터 국군에는 비상 경계령이 내려졌다.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 전쟁 발발 이틀전인 6월23일 24시를 기해 경계령은 해제되었다. 많은 장교와 군인들이 외박과 휴가를 떠났고 육군장교클럽은 낙성식 축하 파티를 6월25일 새벽까지 열었다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전쟁 발발 직전 전후방 부대의 대대적인 교체가 진행되어 전력 공백이 있던 상태였다고 한다.
 
이렇게 시작된 전쟁은 3년 동안 계속됐다. 그 참혹한 전쟁은 수많은 인명 피해를 불러왔고 귀중한 문화유산들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국군 13만7899명, 미국 3만6940명, 유엔군 3730명이 전사했고  민간인 사망자도 수없이 많았다. 그리고 남한에서만 5만여 명의 전쟁고아가 생겼다.  
 
난 그때 초등학교 5학년이었다. 잠시만, 아니 2,3일만 피해 있으면 바로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는 말을 믿고 나와 내 동생은 책가방만 짊어졌고, 아버지는  방을 얻지 못할 경우에 대비해 이불보따리를, 어머니는 반찬으로 굴비 한 드럼, 고추장 한 그릇, 그리고 당장 갈아입을 여름옷 몇 벌 챙긴 것이 전부였다.  
 
서울 수복 후 돌아온 집은 완전한 잿더미로 변해있었다. 내가 다니던 대전 원동초등학교도 뼈대만 앙상한 시멘트 건물 한동만 남아있었다. 그해 겨울은 왜 그리 추웠던지…. 학생 수는 반 이상 줄었다.  
 
얼마 전 종전 70주년이 지났다.  그런데 이 전쟁이 우리 의식 속에서 점점 잊혀가고 있는 것 같다. 6·25세대는 점점 늙어가는데….

노영자·풋힐랜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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