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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 진정한 용기의 여인, 로자 파크스

1955년 12월 1일 오후 6시,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의 한 백화점에서 재봉사로 일하는 42세의 흑인 로자 파크스가 퇴근후 버스에 올라 백인석을 지나 공용석인 11번째 좌석에 앉았다.
 
운행중 백인석이 손님으로 가득하자 운전수 제임스 블레이크가 파크스가 앉은 좌석에 다가와 백인들에게 자리를 양보하라고 한다. 다른 흑인 여성 셋은 일어섰지만 파크스는 ‘일어서야 할 이유’가 없다며 거부한다. ‘그렇다면 경찰에 신고해 잡아가게 하는 수 밖에 없다’며 블레이크가 경찰을 불렀고 그녀는 체포되어 끌려 나갔다.
 
이에 흑인교회 및 WPC(Women‘s Political Council WPC) 등은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흑인여성이 경찰에 체포되어 감옥에 가게 생겼다’며 ‘재판이 열리는 월요일, 모든 시민은 항의의 뜻으로 버스 보이콧을 하자’는 전단지를 살포하며 주민을 독려한다.
 
12월 5일 재판에서 로자 파크스는 벌금 10달러 , 비용 4달러를 합한 14달러의 폭탄선고를 받고 항소하는 한편 흑인사회는 ‘몽고메리 진보연합’을 결성한 뒤 무명의 마틴 루터 킹 목사를 회장으로 선임, 무려 382일동안 무저항 버스 보이콧 운동을 이어간다.
 


이에 FBI 후버국장은 킹 목사에 대해 ’흠집을 낼만한 정보를 찾으라‘는 내사지시를 내렸고 지방정부나 수사당국은 흑인에게 택시를 제공하는 운전수는 해고, 택시회사에는 보험금 지불을 거부케 보험회사를 압박하는 등 이제는 전국적인 흑백 인권투쟁으로 번져나갔다.
 
1년 뒤인 1956년 12월 2일, 연방지법과 대법원이 ‘인종차별 및 분리행위’가 위헌이라 판결하며 백인에게 백기를 안겼지만 들불같이 번진 검은 열풍을 잠재우기는 역부족이었다.
 
역사는 로자 파크스를 1950년대 반공열풍 ‘매카시즘’의 조지프 매카시와 함께 미국을 변화시킨 주역에 이어 20세기 주요 인물 100인 중 하나로, 92세 사망 때는 연방의사당 로툰다홀에 관이 이틀씩이나 안치되는 미 역사상 최초의 민간인으로 기록하였다.
 
링컨의 게티스버그 연설을 통해 미국은 모든 권력이 국민에게, 국민이 나라의 주인됨을 만천하에 천명한 뒤 1865년에는 수정헌법 13조를 통해 노예제도를 폐지하므로 명실상부 세상에서 가장 자유 평등한 민주주의 국가로 우뚝섰다. 그러나 내실은 백인독재국이었다.
 
로자 파크스가 살았던 당시, 남부는 기차, 학교, 병원, 음식점, 호텔, 미장원, 극장, 수돗가, 교회, 신문부고란, 장례식장에서까지 흑·백인이 분리되었고 야간에는 KKK가 행진을 하며 인종차별을 반대하는 교회나 목사들에게 폭탄을 투하, 킹목사가 시무하던 교회도 3명의 성가대원이 사망하였는가 하면 목사관을 향한 폭탄테러도 자행되었다. 더욱이 1896년 연방대법원이 “공공시설에서 흑인과 백인의 자리를 분리시켜도 좋다는 분리 평등 (Separate but Equal)”을 통해 평등은 있으나 끼리끼리라는 악한 판결로 인해 더욱 노골화했다. 이는 인간은 하나님 안에서 자유하다는 창조 질서를 거슬리는 궤변이자 자유와 평등, 신앙을 찾아 이땅에 건너온 청교도의 건국정신조차 부인한 이율배반으로 지금도 만연한 흑백분란의 단초 중 하나로 비난받아 마땅하다 하겠다.

김도수 /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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