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읽기] 여름 초입의 시간을 살며
해변에도 산간 밭에도 초여름
자연의 왕성한 변화 놀라울 뿐
생명과 함께하는 건 좋은 거래
산책하고 근처 식당에 들러 밥을 먹었다. 노부부가 주인인 식당이었는데 가끔 들르는 곳이기도 했다. 식당 마당에 내놓은 들마루 한쪽에 작은 글씨로 뭔가 적혀 있었다. ‘뒷집 사는 두부예요. 심심해서 마실 나왔어요’라고 씌어 있었다. 여쭤보니 두부는 뒷집에 사는 강아지라고 했다. 뒷집 사람이 낮 동안 집을 비우게 되면 두부가 이곳에 와서 있다가 간다고 했다. 두부는 아직 와 있지 않았지만 오늘 낮에, 또 앞으로 맞이할 여름날의 무료한 낮에 두부는 이곳으로 놀러 올 것이다. ‘심심해서’라는 글씨를 보았을 때 여름날의 낮의 뜨거운 일광(日光)과 바람 한 점 없는 대기의 정체와 그로 인한 나른함이 절로 느껴졌다. 식당 마당에는 채마밭이 딸려 있었는데 푸릇푸릇한 기운이 넘실거렸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밭쪽을 보았더니 이 밭 저 밭에서 벌써 옥수수가 익고 있었다. 옥수수의 끝에 엉켜있는 옥수수수염이 붉은 갈색으로 바뀌고 있었다. 어떤 밭에서는 수박 넝쿨이 땅바닥을 기어가며 뻗고 있었다. 작년에 이 밭에서 갓 딴 수박을 산 적이 있었다. 하지가 내일모레이니 태양 아래 옥수수도 수박도 영글어 갈 것이다.
집에 와서는 장화를 신고 수건을 목에 두르고 모자를 머리에 얹어 텃밭에서 풀을 뽑았다. 토마토와 오이에 댔던 지지대를 더 큰 것으로 바꾸고, 가지에 북을 주었더니 온몸이 금세 땀으로 젖었다. 텃밭에 들어가 있으면 정말이지 흙에서 일어나는 일이 얼마나 다양하고 드라마틱한지를 잘 느끼게 된다.
올해 들어 처음으로 방울토마토를 땄고, 상추와 치커리와 방풍잎 등속을 거둬 찬물에 씻어 그릇에 담고 나니 해가 벌써 중천에 떴다. 작은 화단에는 올해에도 수국과 노란 낮달맞이꽃이 피었다. 시골에 사는 게 여전히 서툴지만 작년보다 기르는 가짓수가 늘었다. 여름을 위한 씨앗도 미리 준비할 줄을 알게도 되었다.
자연의 주체를 보다 가까이 접촉하는 일은 색다른 경험이다. 팔레스타인 출신의 시인인 자카리아 무함마드는 우리나라를 여러 차례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의 시 가운데 ‘거래’라는 시가 있다. 시는 이러하다. ‘우리 정원의 죽은 살구나무/ 서 있도록 받쳐주고/ 둥치를 감고 오를 담쟁이덩굴을 심었더니/ 곧 나무는 이파리로 뒤덮였네.// 이제/ 우리 살구나무는 푸르러./ 심지어 12월에도.// 이것이 거래:/ 죽음이 뿌리와 열매를 갖고/ 우리는 위조된 푸른 잎을 가졌지.’
정원에 살구나무가 고사한 채 서 있는 것을 보고선 담쟁이덩굴을 심어 그 덩굴이 죽은 살구나무의 둥치와 줄기를 타고 자라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살구나무는 죽음 대신 뿌리와 열매를 갖게 되었고, 시인은 마치 그것이 살구나무의 것인 듯 푸른 잎을 바라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조금은 엉뚱해 보이는 이 거래를 시인은 제법 훌륭하다고 여긴다. 왜 그럴까. 가만히 생각해보면 아마도 이 거래는 죽음의 불모지를 푸른 생명의 빛으로 덮어 생명의 활발한 에너지를 우리의 살림 공간에 불어넣는 행위이기 때문일 테다.
자연의 오묘한 변화를 감각하는 일은 우리의 생활에 신선한 자극이 될 수 있다. 그러나 특별한 자극을 얻으려면 우리도 자연을 이루는 주체들의 변화를 자세히 보아야 한다. 류선열 시인은 동시집을 내면서 이런 문장을 쓴 적이 있다. ‘수백 가지 새나 들꽃의 이름을 지어낸 조상들을 위해 글을 쓰자. 냉이꽃이건 산수유건 노란꽃이라 하고 피라미건 배가사리건 그냥 물고기라고만 부르는 아이들을 위해 글을 쓰자.’ 냉이꽃은 냉이꽃으로, 산수유는 산수유로, 피라미는 피라미로, 배가사리는 배가사리로, 그렇게 각각 이름으로 호명해야 하고 또 개별적인 움직임을 관심 있게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산비둘기가 울고, 뻐꾸기가 이어서 울고, 옥수수가 익어가고, 수박 넝쿨이 땅을 기어가고, 해바라기의 키가 커가고, 대낮의 시간이 길어지고, 목에 두른 수건이 흠뻑 젖어 있으니, 이즈음을 여름의 얼굴이 설핏설핏 보이는 때라고 해야겠다.
문태준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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