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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 노예해방보다 더 큰 링컨의 업적

250년 46대에 이르는 미국 대통령 중 존경받는 대통령 셋을 꼽으면 국부 격인 조지 워싱턴, 2차대전 승리를 이끈 프랭클린 루스벨트, 에이브러햄 링컨을 꼽는데 그중에 제일은 링컨 대통령이라 할 수 있다. 그가 남북전쟁이라는 험한 대가를 통해 흑인들을 노예에서 해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더 큰 그의 업적은 지금의 통일된 미합중국(USA)이라는 국가형태의 완성과 연방 구성원으로서 각 주(state)의 위치와 사명을 힘과 제도로 명확하게 확립한 대통령이어서다.
 
사실 초대 조지 워싱턴 대통령부터 16대 링컨까지의 미국은 The United States are America 즉 복수형 시대로 ‘주’는 이해관계에 따라 언제든지 해체 또는 연방탈퇴가 가능한 느슨한 연합체 국가였다면 링컨 이후 오늘날 미국은 The united States is America. 단수형으로 ‘주’는 미국이라는 국가를 이루는 운명공동체이자 연방을 지탱하는 기둥이자 주체가 됨을 명확히 자리매김한 대통령이 링컨이다.  
 
그런 링컨에 대한 이야기는 풍성하고 이력 또한 화려하지만 전체 삶에서 아픔과 실패가 많았다. 두 번의 사업 실패로 빚을 갚는 데만 17년이 소요된 것은 차치하고라도 개인사적으로 그는 9살에 어머니를 잃었는가 하면 19살에는 시골 외딴 통나무집에서 외롭게 살며 엄마처럼 의지하며 친구처럼 지냈던 누이를, 26살에는 약혼녀를, 41살에는 차남 에드워드를, 53살에는 삼남 윌리엄을 먼저 하늘나라로 보내는 안타까움이 있었다.
 
정치 여정도 불운했다. 20세가 되던 1832년 도전한 일리노이주 의원 선거에서 13명 중 8위로 낙선한 뒤 2년 뒤 주의원에 당선, 정계 입문이 무난하나 했으나 1840년 대통령 선거인단 선거에 낙선한다. 그리고 1844년 연방하원에 도전하였으나 공천 관문에서 좌절을 맛보았고 1846년 37살에 간신히 연방하원에 당선, 워싱턴 중앙 정치 무대에 무난히 등단하나 했다. 그러나 1855년 상원의원 낙선, 1856년 부통령 후보 경선에서 낙선, 1858년 상원선거에 낙선하는 등 10번의 선거에서 무려 7번이나 실패하므로 ‘낙선의 아이콘’으로 회자하기도했다.
 


그러나 1860년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미국을 반석 위에 세우라는 창조주 하나님의 엄명을 받는다. 실패의 아픔과 설움을 통해 정금 같이 다듬어지고 주옥같이 빛나는 진가를 유권자들이 알아봤던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한국 정치인 중 당선이 불확실한 곳을 찾아 도전하므로 ‘바보’ 소리를 듣곤 했던 고 노무현 대통령은 링컨을 가장 존경하는 롤모델로 삼았고 그의 저서를 손에서 놓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정치란 ‘자신과 다른 사람의 부조화와 부정적인 요소를 바로잡아 극복하는 행위다’라고 적혀있기도 하다. 성경에서 아모서라는 이스라엘을 향해 ‘오직 정의를 물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같이 흐르게 할지어다’라고 훈계하였다. 종합하면 좋은 정치는 조화하며 순리 지향적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1860년대 미국은 정치 부재의 시대다. 남에서 시작된 물은 파도처럼 역류했고 북에서 흐르는 물은 정의를 빙자한 탁수로 오염되고 치열했다. 이 마른 대지 같은 미국에 링컨이 어떻게 물을 대고 평온한 지류를 형성케 했는지는 다음 회에 나열해보고자 한다.

김도수 /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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