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파도
내가 당신을 찿아간 날 비에 젖은 머리칼은 흔들리는 노을로 내려앉는 어스른 저녁 마지막 남은 햇살이었지 너무 오래 당신을 바라보아 미안해요 이 봄 한아름 꽃향기를 안고 서 있는 당신 발목을 잡고 놓지 않으려 했어요 이게 우리 사이가 아니었나 싶었다가도 언제나 보아도 설레이는 당신이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에요 아름다운 흔적은 어느 날 스스로 만들어지지 않는 거란 걸 알지요 누군가 뿌렸고 눈물로 가꾸었고 힘써 거두어낸 시간의 자국이란 걸 알고 있지요 마음을 스치고간 희노애락의 물결이란 걸 알지요 가문비나무 작은 열매들이 익어갈 무렵 당신은 내게로 왔어요 앞문을 열면 탁 트인 마당에 푸른 물결로 안겨오는 자유 걸림돌이 될 수 없는 디딤돌의 넓은 마루로 내게 왔지요 우린 아주 오래 전 서로를 훔친 운명처럼 늦은 봄빛으로 자라났어요 당신이 내게로 고개를 돌려 지나가는 바람의 옷소매를 부여잡았을 때 펄럭이며 나에게 말한 건 푸른 잎 사이를 파고드는 마지막 햇살의 파장이었지요 미안해요 먼 길 오라 해서요 설익은 열매의 풋풋함으로 당신의 문을 노크하는 내 손은 물결처럼 떨리고 있어요 이제 달의 기울음을 조용히 기다릴께요 바람이 스치고 간 자리마다 작은 떨림으로 흔들리는 당신은하늘이 흐려 빌딩 뒤로 붉게 번져오는 일출을 볼 수 없습니다.
인사동 나인츄리 15층 객실 통유리를 통해 종로거리를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왼쪽으로 ”천년을 세우는….” 조계종의 화려한 꽃등이 보이고 가끔 느리게 차가 움직입니다. 5층 라운지에서 커피 두 잔을 내려왔습니다. 한잔은 이곳에 없는 당신에게 드리려구요. 이른 아침 커피향은 늘 정신을 가다듬게 합니다. 지난 밤 수런대던 인사동은 침묵 속에 있습니다.
시화집을 내러 시카고에서 이곳까지 왔지만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마음 같기만 해서 내려다 본 가로수의 행렬이 왠지 쓸쓸해 보이는 아침입니다. 키를 키우지 못한 생각의 매듭을 풀고 이른 아침 출근하는 한 사람의 뒷모습이 작게만 보입니다. 탐스럽게 피어난 꽃들의 대화보다 여린 어깨로 아침을 걷고 있는 발자국소리가 들리는듯해 정겹습니다. 삶을 대하는 자세가 바르고 의연해 보이는 걸음입니다.
꽃이 필 때 우리는 환호하지만 꽃이 져야 열매를 맺거늘 지는 꽃을 바라보며 당신은 마음조리지 말기를, 부디 마음 상하지 않기를. 인생이란 희극도 비극도 아닌 것을. 낮은 곳을 찾아 흐르는 물처럼 그렇게 내려 놓아야 하는 것을. 눈가에 잡힌 주름이 어색하지 않고 친숙하게 느껴질 때, 아득히 흘러간 시간도 한때 피었다 지는 한 송이 꽃인 것을, 남겨질 씨앗인 것을. 나무숲에 앉아 지저귀던 한 마리 새도 노을빛 하늘로 사라지거늘, 통속하는 세월의 한 풍경이거늘. 스치고간 자리마다 작은 떨림으로 흔들리는 당신, 부디 아프지 마시라. (시인, 화가)
신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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