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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인생 이모작 미수범

“만일 내가 퇴직할 때 앞으로 30년을 더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난 정말 그렇게 살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는 젊었을 때 정말 열심히 살았다. 그 결과 실력을 인정받고 존경을 받았다. 그 덕에 내 60년의 생애는 자랑스러웠고 떳떳했지만 이후 30년의 삶은 부끄럽고 후회되고 비통한 삶이었다.”  
 
어느 90세 노인이 퇴직 후  30년을 헛되이 살았다고 후회하는 글을 읽었다. 수명이 길어지면서 장수의 기준도 바뀌고 있다. 반세기 전만 해도 환갑이 장수의 상징이어서 일가친척 모두 모여 큰 잔치를 했다. 30년은 지금의 나이로 보면 인생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긴 시간이다. 하지만 우리 세대에는 대부분 정년퇴직 후 '남은 인생은 덤'이라는 생각으로 살았다.
 
100세 시대, 누구나 2막 인생을 준비해야 하는 시대가 펼쳐지고 있다. '긴 여생을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살지?' 그 비결을 찾는 것이 큰 숙제이다. 그러나 퇴직 후 제2의 일을 찾고 새로 시작하는 것은 무모하다. 퇴직 전에 노후를 계획하고 준비해야 한다. 그래야 공백 없이 제2의 인생을 시작할 수 있다.  
 
내가 LA에서 만나는 친구 중 하나는 신문사에 다니면서 두 가지 계획을 세워 철저히 은퇴를 준비했다. 꽃을 좋아해 원예를 공부했고, 본인 체력도 단련할 겸 라인 댄스도 배웠다. 퇴직 후 화원에 취직해 일했으나 노동에 준하는 체력이 필요한 탓에 그만두고 자기가 일하던 신문사에 매주 '웰빙가든' 이라는 칼럼을 게재해 화초에 대한 지식을 독자들과 공유했다. 또한 실비치 시니어 커뮤니티에서 라인댄스를 가르치며 무척 보람을 느끼고 있다.
 
남자의 경우 많은 분이 퇴직 후 귀농을 꿈꾼다. 직장에서 사람들과 부대끼며 상처받은 영혼을 치료받고 싶어서 이리라. 그러나 그게 어디 만만한 일일까! 그 어려운 일에 도전하여 성공한 분이 있어 소개하고 싶다.  
 
내가 그를 안 것은, 알았다기보다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코로나 때문이었다. 3년 전 한국 방문 시 방구석에 갇혀 꼼짝달싹 못 하고 있을 때였다. 책장에서 두툼한 책 한권을 꺼내 들었다.  '대몽골 시간여행'이라는 책이었다. 그가 쓴 몽골 제국과 유라시아 대륙의 역사를 읽으며 경외심을 갖게 됐다. 그는 1980년대 언론사 통폐합 당시 남편의 직장에 합류한 남편의 직장 후배였고 나중에 YTN 사장까지 역임했다.  
 
그 책에 대해 3년 전 뉴욕에 있는 여고 친구와 전화로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지난 2월 그 친구가 징기즈칸을 주제로 줌으로 발표할 계획이 있다며 내게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뉴욕의 여고 동창들은 학구열이 대단해 여든살이 다된 지금도 이런 식으로 동창모임을 하고 있다.  나는 책 내용도 다 잊어버리고 말주변도 없다며 단호하게 거절했다. 하지만 미안한 마음에 남편에게 부탁해 그분이 '징기즈칸의 열린 리더십' 이라는 제목으로 뉴욕 동창들을 위해 줌 강연을 했다. 그 소문이 동창들 사이에 퍼지다 보니 LA는 물론 이태리, 스페인 등지의 친구들도 참여하는 미니 총동창회가 됐다.    
 
그분은 은퇴 후 귀농해 지금 양평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 이제는 8년 차 농사꾼으로 산기슭에 예쁘게 집을 짓고 새가 오는 집이라는 뜻의 '조래헌(鳥來軒)' 문패를 달았다. 그는 농사꾼 이전에 음악 전도사다.  클래식에서 트로트까지 음악에 대한 깊이와 폭이 대단하다.  은퇴 후 8년째 매일 '아침을 여는 음악' 이라는 제목으로 지인들에게 장르를 초월한 음악과 해설을 보낸다. 또 계절에 따라 꽃 사진과 관련 이야기도 알려준다. 그의 해박한 지식과 수려한 글솜씨에 매료된 팬이 많이 인기가 스타 못지않다. 외국어대 러시아어과를 졸업한 그는 언론사 사장 출신이지만 농사에 도전하며 음악으로 자기만의 새로운 장르도 만들었다. 본인의 노력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발전할 수 있다는 가능성의 지평을 실제로 보여주고 있다. 그를 보면서 '노력을 이기는 재능은 없고 노력을 외면하는 결과도 없다'는 명언이 떠오른다.
 
강연에 대한 고마움도 전할 겸 꼭 한 번 양평으로 찾아가 만나보고 싶었다.  남편을 졸라 지난달 양평을 방문했다. 햇볕에 까맣게 그을린 그와 그의 부인이 반갑게 맞아 주었다. 부인에게 힘들지 않으냐고 물으니 이왕 농사를 지을 거면 은퇴 후보다는 50대에 시작하는 것이 더 나았을 것 같다고 했다. 돌아올 때 표고버섯, 두릅나물, 엄나물에 처형이 농사를 지었다며 귀한 아스파라거스까지 한보따리 챙겨 왔다.  LA의 친구와 그분을 보면서 나는 인생 이모작 미수범이 된 기분이었다.  
 
얼마 전 '살림의 여왕'으로 유명한 마사 스튜어트가 81세에 수영복 차림으로 유명 스포츠 잡지 표지 모델로 등장해 화제가 됐다. 노년을 멋지고 보람 있게 보내는 사람들을 보면 무척 부럽다. 앞으로 10년, 20년 후에도 후회하지 않을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미켈란젤로가 89세로 영면하며 남긴 유언이 "Ancora Imparo(나는 아직도 배우고 있다)"라고 한다. 중요한 것은 포기하지 않는 마음인 것 같다. 이미 나이 80이니 이제 다 살았다며 주저앉을 게 아니라 의미 있는 삶을 위해 끝까지 배워야겠다.

배광자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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