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리 스프링어의 시대 저물다
오프라 윈프리와 시카고 토크쇼 이끌어
스프링어는 오프라 윈프리와 함께 시카고 토크쇼를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그의 이름을 딴 제리 스프링어 쇼는 1991년 그가 시장을 지내기도 했던 신시내티에서 시작됐다. 하지만 쇼가 시작된 직후 시카고로 옮겨와 2009년까지 시카고 스튜디오에서 만들어졌다.
제리 스프링어 쇼는 낮 시간대에 전국으로 방영되는 토크쇼였다. 당시에는 방송에서 다루기 힘든 외설적이고 폭력적인 내용이 주를 이뤘으며 쇼 도중 참석자들이 주먹다짐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 때문에 비난을 받기도 했다.
시카고 시의원으로 가장 오랫동안 재임한 에드 버크 시의원은 1999년 그의 쇼에 대해 “자신의 부인을 삭스 파크나 솔저필드에서 때리면 범죄가 되듯이 스프링어 쇼에서 부인을 때린다면 그것 역시 범죄"라고 말했다. 시민사회 운동가인 마이클 플레저 목사 역시 “개인적으로 스프링어에게 감정은 없다. 다만 그의 방송에 대해서는 불만이 많다. 스프링어는 외설과 폭력, 여성 무시를 일삼는 방송을 시작했다. 불행하게도 이제는 그런 방송이 일상이 되어 버렸다"고 평가했다.
제리 스프링어는 1970년대에서 1980년대 중반까지 역시 시카고에서 촬영하고 전국적으로 방송된 ‘필 도나휴 쇼’와 마찬가지로 시카고를 전국 방송 시장에 소개한 것으로 평가 받고 있다. 아울러 비슷한 시기에 시카고 다운타운 서쪽 스튜디오에서 진행된 오프라 윈프리 쇼와 함께 사회에 끼치는 영향력도 매우 컸다.
방송 평론가들은 그의 쇼가 수준이 낮았음에도 불구하고 방송계에 끼친 영향력에 대해서는 대체로 인정하고 있다. 특히 시카고에서 제작된 토크쇼 세대를 그가 주도했으며 이는 곧 일자리 창출을 불러왔고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제리 스프링어 쇼를 제작한 NBC유니버설은 성명서를 통해 “제리 스프링어는 토크쇼 진행자이기도 했지만 텔레비전을 다시 정의한 사람이었다. 그는 노련한 정치인이었고 대중 문화의 아이콘이었으며 방송에 소개되지 못하는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헌신적이고 충직한 친구였다"고 평가했다.
한편 시카고는 2011년 오프라 윈프리가 떠난 뒤 몇개의 프로그램만 제작되고 있을 뿐 전국적으로 방송되는 토크쇼를 제작하지 못하고 있다.
Nathan Park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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