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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하염없이 꽃잎이 떨어지다

이기희

이기희

자르면 죽는다. 일찍 죽는다. 새 집에 이사 온 기념으로 지난 늦가을 빨간색 튤립 구근 두 봉지를 사다 심었다. 혹독한 겨울을 견딘 수선화 하야신스 애기똥풀이 목을 내밀자 빨간 튤립이 줄 서서 정원을 붉게 물들인다. 튤립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꽃. 두 송이 꺾어 목이 긴 포도주 잔에 담았는데 금방 시들어 꽃잎이 떨어진다. 앞뜰에 군악대 병정처럼 가지런히 줄 서서 머리 꼿꼿이 들고 있는 튤립 군상은 한 달이 넘었는데도 여태 싱싱한 자태를 뽐낸다.
 
생명 있는 것들은 자르면 목숨줄이 끊어진다. 흙에 뿌리 박고 있어야 오래 살 수 있다. 땅에 발 붙이고 납작 엎드려 살면 오래 견딜 수 있다. 허공에 두발 딛고 살면 언젠가 떨어져 낙화가 된다. 흙으로 돌아가면 영생의 꽃 한송이 피울 수 있을까.  
 
튤립은 이른 봄 여왕처럼 땅을 비집고 솟아난다. 서리가 내리기 전, 11월 초나 중순쯤 구근의 3배 깊이로 땅을 파고 묻으면 흙 속에서 싹을 틔운다. 뿌리를 먼저 내리고 자리를 잡은 구근은 겨울 한파를 견디며 봄을 기다린다. 뿌리가 얼지 않을 정도면 싹을 틔우는데 겨울 동안 땅 위로 싹이 올라 오지 않을 정도로 날씨가 추워야 봄꽃을 피운다.
 
튤립은 자태가 외롭고 고고하다. 한 두개 심으면 처량해 보여 열병식 하듯 여러겹으로 심어야 무리지어 아름답다. 튤립은 서 있는 것이 힘겨워도 드러눕지 않는다. 키 큰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가지가 부러져도 튤립은 작은 키와 큰 뿌리로 땅을 손잡고 버틴다. 땅을 향해 머리 수그리면 생명을 지키기 쉽다  
 


대지의 여신 가이아는 세상의 시작인 카오스에서 태어난 최초의 여신이다. 태초의 혼돈과 무질서인 카오스는 텅 빈 공간이고 정해지거나 구분되지 않는 청정 구역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담는다. 우주의 시작이며 만물의 근원이다.  
 
가이아는 수많은 자식을 생산하는데 생명체의 폭발적인 증가로 생존과 번식의 세상이 열린다. 대지의 여신은 소멸되지 않는 생명을 품는다. 대지는 찬란한 생명의 빛을 창조하고 하염없이 떨어지는 꽃잎의 슬픔을 품 속에 묻는다.  
 
장미가 화려한 외출이라면 튤립은 고고한 사랑이다. 어우러져 피지 않고 혼자라도 외롭지 않다. 불타는 왕관을 머리에 이고 흔들리지 않고 품위를 지킨다.  
 
튤립 원줄기는 오직 한송이 꽃만 피운다. 여려 보이지만 곧게 서서 갈라지지 않고 비바람을 견딘다. 땅 속 깊이 뿌리 내리고 한송이 거룩한 생명을 꽃 피운다. 화사한 화관을 머리에 이고 단장을 막 끝낸 새색시처럼 수줍게 미소 짓는다.  
 
네덜란드의 상징인 튤립은 원산지가 터키다. 16세기 후반 유럽 전역으로 퍼졌는데 이색적인 모양으로 귀족이나 대상인들 사이에 유행했다. 귀족의 상징이 된 튤립은 신분 상승의 욕구를 지닌 사람들에게 인기가 높았는데 유행 따라 가격이 치솟아 황소 천 마리를 팔아서 살 수 있는 튤립 구근이 겨우 40개 정도였다고 한다. 50불로 튤립구근 100개를 구입해 벼락부자가 될뻔한 중세말기의 환상에서 깨어나 따스한 모닝커피 한잔을 마신다.  
 
사는 게 편안하다. 행복해지려고 노력할 필요 없다. 행복은 깨질 수도 있는 유리상자다. 편안함은 행복을 구걸하지 않는다. 미련과 기대를 접고 정직하게 땅에 발 붙이고 살며 생명의 꽃나무를 심는다. 꽃이 필 때 사랑을 하고 하염없이 꽃잎이 떨어질 때 그대를 떠나 보낸다. (Q7 Editions 대표, 작가)
 
 

이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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