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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살된 정의에 투쟁, 외침 더 커졌다

분노의 상흔, 디트로이트 (3)

빈센트 친 사건이 남긴 유산들
"한인들도 나서 시위에 동참"
아시안 사건 민권법 최초 기소
피해자 가족 진술 허용 개혁도

펀데일 지역의 빈센트 친 추모 동판. 아시안 민권 운동의 시발점이 된 곳이다. 장열 기자

펀데일 지역의 빈센트 친 추모 동판. 아시안 민권 운동의 시발점이 된 곳이다. 장열 기자

1983년 5월 9일의 모습이다. 디트로이트 다운타운 케네디 광장에서 아시안들이 친의 재판 결과에 반발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빈센트&릴리친 재단 제공]

1983년 5월 9일의 모습이다. 디트로이트 다운타운 케네디 광장에서 아시안들이 친의 재판 결과에 반발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빈센트&릴리친 재단 제공]

꽃은 시간을 안고 핀다. 1982년 빈센트 친의 억울했던 죽음이 그랬다. 오늘날 꽃핀 유산은 디트로이트 재건의 근간이다.

 
20일 오후 1시, 펀데일 지역 9가와 우드워드 애비뉴에 있는 빈센트 친의 추모 동판 앞이다. 디트로이트 다운타운에서 북쪽으로 10여 마일 떨어진 이곳은 아시안 민권 운동의 씨앗이 심긴 곳이다.
 
펀데일시 레일리 콜먼 언론 담당은 “지난 2010년 펀데일 시의회와 미시간주 변호사협회가 함께 세운 동판”이라며 “친 사건으로 인해 이곳에서 아시안-아메리칸의 민권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됐고 사법 개혁의 발단이 된 것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친의 죽음은 시발점이 됐다. 미국정의시민협회(ACJ)가 태동한 곳이 바로 펀데일이다.  


 
미시간대학 로랜드 황 교수는 “법원이 가해자들에게 벌금형을 내리자 우리(아시안)는 격분했다”며 “판결 직후 너나 할 것 없이 펀데일로 모였다”고 말했다.
 
그때 아시안들은 추모 동판 인근 골든스타 레스토랑에 집결했다. 친이 주말에 웨이터로 일했던 식당이었다. 당시 변호사였던 황 교수를 비롯한 제임스 시모우라(변호사), 헬렌 지아(기자)가 앞장서서 ACJ를 조직했다.
 
헬렌 지아는 현재 사회운동가로 활동 중이다. 그는 “그때만 해도 아시안은 주류사회에서 보이지 않는 존재였다. 뉴스에서도 제대로 언급되지 않았다”며 “당시 전미변호사협회, 미국시민자유연맹(ACLU)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그들조차 미온적으로 일관했을 정도”라고 전했다.
 
그럴수록 결집했다. 결속이 연대로 이어지며 확산 조짐을 보이자 주류 언론도 달리 보기 시작했다. 황 교수는 “그때 미시간주의 여러 한인 교회들도 친 시위에 동참했었다”고 회상했다.  
 
친이 쓰러진 우드워드 애비뉴로 향했다. 펀데일에서 남쪽으로 약 5마일 떨어진 곳이다. 친은 당시 맥도널드 앞에서 머리를 가격당해 쓰러졌다. 빈 건물로 방치된 그곳은 황폐함만 남아있다.
 
황 교수는 “사건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지만, 그의 죽음은 많은 것을 남겼다”며 “그중 하나가 미국 사법 역사상 처음으로 아시아계 미국인 피해 사건을 연방 민권법을 통해 기소한 것이 바로 친의 연방 재판이었다”고 말했다.
 
연방수사국(FBI)이 수사에 나섰고, 가해자인 로널드 에벤스는 민권법에 의해 결국 연방 법원에서 25년형을 선고받았다.
 
환호는 잠시였다. 에벤스의 변호인은 “인종은 살인의 동기가 아니었다”며 즉시 항소했다. 재판은 신시내티 법원으로 이관됐고 결국 가해자는 무죄로 풀려났다.
 
법은 정의를 묵살했지만, 투쟁까지 멈추게 할 순 없었다.
 
헬렌 지아는 “정의가 실현될 수 없다면 우리는 최소한 친의 유산이 사라지지 않도록 행동해야 했다”고 말했다.
 
중국인커뮤니티센터로 발걸음을 옮겼다. 디트로이트에서 북쪽으로 15마일 떨어진 매디슨 하이츠 지역은 신흥 차이나타운이다.
 
그곳엔 빈센트 친의 그림이 있다. 중국계 2세 화가인 앤서니 리가 지난해 추모 40주년을 맞아 그린 작품이다.
 
중국인커뮤니티센터 엠마 인 코디네이터는 “지난해 한인 배우 대니얼 대 김도 이 그림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며 “친의 죽음이 남긴 의미는 이곳 아시안 2~3세에까지 전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친의 죽음은 사법 개혁으로도 이어졌다. 그때는 판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이유로 피해자 가족은 법정에서 증언할 수가 없었다. 법원은 친의 어머니 릴리에게 에벤스의 선고일조차 알려주지 않았다.  
 
황 교수는 “친의 재판을 계기로 공판 중 피해자 가족이 범죄 피해로 인해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진술하는 것이 허용됐다”며 “얼마 전 미국 체조 대표팀이 주치의에게 당한 성폭행을 진술했을 때 그들이 행사했던 법적 권리가 바로 친의 사건으로 제정됐던 피해자 진술권이었다”고 말했다.  
 
ACJ는 지난해 ‘빈센트 친의 유산 가이드’도 제작했다. 총 65페이지다. 의미를 나누고 토론까지 할 수 있도록 섹션마다 교육용 질문도 담겨있다. 이 책자는 현재 디트로이트 지역 공립학교 교사들도 사용 중이다.
 
증오의 벽은 쉽게 허물어지지 않는다. 기억하고 외칠 때 무너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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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열 기자ㆍjang.yeol@korea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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