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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읽기] 금은처럼 반짝이는 일상의 음악

제주의 봄 물들이는 바람과 새
어릴 적 고향 김천 풍경 떠올라

빗소리 좋아한 음악가 사카모토
‘생명의 음악’ 유심히 들어보자

봄날이 되니 문득문득 고향 김천이 눈에 선하다. 옛날에 고향에서 보고 들은 것도 함께 보인다. 꽃 핀 앵두나무, 풀이 돋은 동산, 외할머니의 나직한 음성, 들판으로 난 길, 저수지와 돌돌 흐르는 시냇물, 경운기 소리, 새와 염소의 울음소리, 막 뜯어온 산나물을 삶느라 아궁이에 불을 때는 소리, 소를 몰고 돌아오는 저녁 등이 눈에 보이고 또 들린다. 나른하고 평화로웠던 봄의 시간이 보인다.
 
이상국 시인의 시집에서 만난 시 ‘봄날 옛집에 가다’를 읽을 적에는 고향 생각에 마음이 더 애틋했다. ‘어머니는 파 속 같은 그늘에서/ 아직 빨래를 개시며/ 야야 돈 아껴 쓰거라 하셨는데/ 나는 말벌처럼 윙윙거리며/ 술이 점점 맛있다고 했지요/ 반갑다고 온몸을 흔드는/ 나무들의 손을 잡고/ 젊어서는 바빠 못 오고/ 이제는 너무 멀어서 못 온다니까/ 아무리 멀어도 자기는 봄만 되면 온다고/ 원추리꽃이 소년처럼 웃었지요.’
 
파 껍질 속 같은 엷은 그늘에서 마른 옷가지를 접어 포개시는 어머니의 모습은 더없이 평온해 보인다. 바쁘다는 핑계로, 멀다는 구실로 자주 찾아오지 못한 옛집에서 원추리꽃으로부터 한소리를 듣기도 하지만 옛집에 묵으며 보낸 봄밤은 시인에게 오래오래 기억될 것이다.
 
봄의 기운이 뚜렷하니 이 세계의 움직임도 부쩍 활발해지는 느낌이다. 내가 사는 제주시 애월읍 장전리의 아침도 보다 극적이다. 그저께는 바람이 한 점 없어 나무들의 가지와 잎들이 미동도 없이 고요한 상태로 있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며칠 전에 심은 상추와 토마토와 가지의 모종들이 그 실뿌리를 땅속으로 조금씩 조금씩 내리는 소리조차 들릴 것만 같았다.
 
반면에 꿩과 직박구리와 닭의 울음소리가 숲과 마당으로부터 크게 들려왔다. 일찍 일어난 이웃집 사람들이 주고받는 밝은 목소리도 들려왔다. 막 해는 떠오르고 있었고, 이 세계의 소리가 금은(金銀)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봄날 아침에 이렇게 많은 소리가 살고 있었다니 놀랄 정도였다. 나는 무심하게 지나쳤던 이 소리를 금은처럼 귀하게 하나하나 만져보았다.
 
우리의 일상은 많은 소리로 이뤄져 있다. 어떤 소리는 곱고 어떤 소리는 거칠다. 어떤 소리는 메아리를 만들면서 멀리 가고, 어떤 소리는 떨어진 단추처럼 툭, 아래로 곧바로 직하한다. 어떤 소리는 급하고, 어떤 소리는 느긋하다. 그러나 이 각각의 소리는 생명 세계의 현상에서 탄생한 것이다. 생명의 음악이다.
 
일상의 소리를 음악으로 끌어들인 음악가로 사카모토 류이치가 있다. 그는 얼마 전 별세했다. 나는 그의 부음을 듣고 여러 날 그의 음악을 다시 들었다. 그는 암 투병을 하면서도 창작 활동을 이어갔다고 한다. 영화 ‘남한산성’의 음악감독을 맡는 등 우리나라와도 인연이 깊었던, 세계적인 음악가였다.
 
그의 자서전 『음악으로 자유로워지다』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내가 만들어내는 음악은 인간 세계나 현재의 일과는 조금 동떨어진, 보다 먼 곳을 향하고 있다. 최대한 손을 대지 않고, 조작하거나 조립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소리를 가만가만 늘어놓고 찬찬히 바라본다. 그렇게 나의 새로운 음악이 만들어지고 있다.”
 
나는 꽤 오래전에 그의 음악 세계와 일상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한 편 본 적이 있었다. 그가 양동이를 뒤집어쓰고서 빗소리를 채집하고, 빙하가 녹아 흘러가는 물소리를 녹음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그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소리를 음악 속에 넣고자 했다. 그에게는 소음과 음악의 구분이 따로 없었다. 한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언급하기도 했다.
 
“좋아하는 소리가 많지만, 하나만 꼽으라면 역시 빗소리겠죠. 세상에는 정말이지 너무 많은 소리가 넘쳐요. 극단적으로 얘기하면, 인간이 만든 음악이 없어도 주변에 존재하는 소리만 즐기면서도 살 수 있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좋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음악을 듣는다는 것만큼이나 주변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산다는 게 매우 즐겁습니다.”
 
내 귓가에 아직도 맴도는 정겨운 소리가 여럿 있다. 동산에서 또래들과 노느라 서산으로 해 떨어지는 줄 모르고 있을 때 밥 먹을 때가 되었다고 누나가 나의 이름을 길게 부르던 소리며 어머니께서 수확한 팥을 차르륵 키질하는 소리며 하얀 눈을 뽀드득뽀드득 밟는 소리며 빈 마당에 들어서던 신발 끄는 소리며 바람에 댓잎이 서걱대는 소리 등은 내 머릿속에서 둥글게 원을 그리며 빙빙 돌고 있다.
 
사카모토 류이치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우리 주변에는 회전하는 것이 굉장히 많고, 이것이 자연스럽게 느껴져요. 자연 속에서는 직선이 존재하지 않잖아요.” 이 봄날에 생명 세계에서 일어나는, 우리의 봄날을 구성하는 소리를 유심하게 들어보아도 좋겠다. 금은 같은 생명의 소리를, 일상의 음악을 말이다.

문태준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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