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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에] 용이 할머니

이리나 수필가

이리나 수필가

같은 학년이었던 용이는 문간방에서 할머니와 엄마, 동생과 살았다. 할머니의 아들인 용이 아빠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살아있으면 어디서 누구와 무엇을 하고 사는지 아무도 몰랐고 묻지도 않았다. 용이 아빠 얘기는 하나의 터부였다.
 
용이 엄마는 식당에서 일했고, 용이 할머니는 동네 궂은일을 도맡아 했다. 동네 세탁소는 큰 이불 빨래를 용이 할머니에게 맡기곤 했다. 할머니는 김 사장네 이불도 빨았고 미군 군복도 세탁했다. 두껍고 커다란 군복을 빨 때면 할머니는 방귀를 붕붕 뀌었다. 물을 잔뜩 먹어 뻣뻣해진 군복은 생각보다 무거웠다.  
 
어느 날, 구청 직원이 집으로 찾아왔다. 구청에 가서 주민 등록증을 갱신해야 하는데 할머니가 하지 않으신 것이다. 할머니는 하루도 일을 쉰 적이 없었다.  
 
할머니의 인적 사항을 묻고 지문을 채취하려고 인주를 할머니 오른손 엄지에 묻혔지만, 지문은 나오지 않았다. 다른 손가락도 마찬가지였다. 일을 많이 해서 지문이 지워졌기 때문이다. 딱한 표정의 직원은 할머니에게 당분간 손으로 하는 일을 자제하라며 사흘 후에 오겠다고 했다.  
 
하지만 손을 쉬며 놀 수가 없었던 할머니는 궁리 끝에 면장갑과 고무장갑을 끼고 최 사장네 이불을 빨기 시작했다. 하필 이때 온 직원이 할머니의 지문을 채취하려 했으나 지문이 나올 리 만무했다. 화가 난 직원이, “할머니 지문 꼭 채취해야 해요”라고 큰 소리로 말했다. 할머니도 지지 않고, “그러면 나더러 일도 하지 말고 먹지도 말라는 소리여. 뭐여.” 하면서 대들었다. 이 소리에, 집 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나왔다.
 
어이없어하는 직원이 할머니에게 지문을 채취하지 않으면 벌금도 내고 유치장에 가야 할지도 모른다고 엄포를 놓았다. 곧 서슬 시퍼렇던 할머니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용이가 이 말을 듣고 뒤로 돌아서며 소매로 눈물을 훔쳤다. 그 장면을 봤지만, 나는 모른척했다.  
 
할머니는 구청 직원이 주고 간 인주로 매일 엄지손가락에 지문이 생겼나 확인했다. 하지만, 닷새가 지나고 열흘이 넘도록 지문은 나오지 않았다.  
 
두 주가 지났다. 방에서 숙제하고 있는데 할머니가 방에서 소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나왔다.” 드디어 새살이 돋은 것이었다. 그길로 구청으로 달려간 할머니는 저녁 식사 후에 돌아왔다. 얼굴에 희색이 만연한 채로. 진한 지문이 아니어서 인주가 잔뜩 묻으면 잘 보이지 않아 직원이 이리저리 시도한 끝에 겨우 열 손가락의 지문을 채취하는 데 성공했다고 나중에 들었다.
 
그다음 날, 학교 가는 길에 용이가 말했다. “난 우리 엄마 고생시키지 않고 잘할 거야.” 그가 잘했으리라 믿는다.

이리나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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