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나의 정체성
대답하기에 난감할 때가 더러 있다. ‘당신은 누구인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뭣 때문에 사는가’처럼 종교나 철학적인 의미를 함축하는 질문을 뜬금없이 받을 때면 더욱 그렇다. 자연의 섭리 안에서, 아버지, 어머니의 아들로 태어나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며 열심히 살고 있는 한 자연인의 입장에서 정체성(正體性)에 대하여 생각하게 된다.정체성을 태어난 본래의 모습을 일컫는 통념적 의미로 해석할 때 어차피 나는 한국인이라는 범주를 벗어날 수 없는 숙명을 타고났다고 하겠다. 뿌리를 밝히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것이 내가 타고난 자연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나는 일제 강점기 평양에서 태어나 해방 직후 자유를 찾아 남하하는 가족을 따라 서울로 이주해 살다 6·25에 참전한 전쟁세대이다. 그 후 세계의 곳곳을 다녀 보기도 하고 8년간의 호주생활을 거쳐 지금은 LA 근교에 정착하여 47년째 미국 시민으로 살고 있다. 태어난 곳은 북한이지만, 뼈를 묻을 곳은 타향 땅이 될 것이 뻔하다.타향(남한 포함)살이 햇수가 어느덧 고향에서 보낸 세월(약14년)의 5배가 훨씬 넘는 현실에 나 자신 놀라게 된다. 어찌 됐든 한국인이라는 라벨(Label)은 생명이 다할 때까지 변할 수 없는 나의 정체성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주지하다시피 현존 인류의 직계 조상인 호모 사피엔스가 약 20만 년 전에 아프리카 대륙에 출현한 후 점차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였다는 아프리카 기원설은 과학계의 통설이다. 유네스코 선언문에 의하면 모든 인간은 공동 조상에서 유래되었고 같은 종에 속한다고 한다. 과학적인 근거에 바탕을 둔 넓은 견지에서 볼 때, 정체성을 특정 집단에 예속된 배타적인 것으로 여기고 외부세계와의 연관성을 배제하는 태도는 근시안적이고 비과학적인 입장이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고 하겠다.
진정한 나의 참모습에 보다 객관적으로 접근하기 위해서는 숲 전체를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평양이 고향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매우 중요한 나의 정체성의 일부이다. 내가 평양에서 태어난 것도 사실이지만 지구라는 행성에서 태어난 것 또한 사실이다.
평양이라는 도시의 존재는 지구라는 행성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평양이 내가 태어난 고향이라면 서울과 시드니, 그리고 LA는 제2, 제3, 제4의 고향이고 지구는 큰 고향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한국의 얼을 간직한 한국인인 동시에 세계시민(Global Citizen)이기도 하다.
공자, 부처, 예수의 가르침은 유교 문화권이나 불교 문화권 또는 기독교 문화권의 울타리 안에서만 통하는 것이 아니다. 톨스토이의 인류애적인 사상은 러시아의 전유물이 아니다. 모든 인간은 공동의 조상에서 갈라져 나온 인류라는 동일 ‘종(種)’에 속한다. 특정 집단 특유의 획일성만을 강조하는 입장을 고집하다 보면, 나무 하나의 특성만 보는 데 그치고 숲 전체의 다양성을 보지 못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DNA에는 유원인 이래 수백만 년에 걸쳐 진화해온 인류 공동의 자산이 되는 요소들이 융합되어 녹아 있다는 사실이다. 모든 인간은 특수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 특수성의 공통점은 세계로 통한다는 것이다. 즉 인간적 보편성을 지닌다는 뜻이다.
근착 타임지에 실린 유발 하라리의 기고문(The Dangerous Quest for Identity, Feb. 6, 2023)을 읽고, 넓은 의미에서, 그의 세계인적인 입장에 공감하면서 나의 정체성을 정리해 보았다.
라만섭 / 전 회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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