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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상업주의

스포츠 상업주의
 
 
김건흡
MDC시니어센터 회원
 
인류 역사상 사람을 열광시키는 제도로서 가장 오랜 된 것들로는 종교와 드라마를 들 수 있다. 인간은 평소 이성적인 동물이지만, 종교와 드라마 앞에선 ‘이성의 무장’을 해제하고 감정과 열정의 세계로 빠져든다. 그렇다면 오늘날 사람을 열광시킬 수 있는 건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스포츠다. 스포츠엔 종교와 드라마의 요소가 가득하다. 1986년 월드컵 대회가 열렸던 멕시코에선 엄청난 지진 피해가 있었지만, 당시 멕시코 인들은 이렇게 외쳤다.“그래도 우리는 월드컵 축구를 볼 수 있어서 행복하다!”
인류는 축구에 왜 이토록 열광할까. 2006년 독일대표팀 클린스만 감독은 “양팀이 단순하게 넣고 막으려는 싸움 속에서 공을 골대에 우겨넣어야 이기는 축구는 섹스와 비슷하다”고 말했다. 축구 예찬론을 편 프랑스 작가 자크 뤼멜하르트는 이렇게 익살을 떤다. “서방 선진 8개국(G8)에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 이사국을 합친, 힘깨나 쓴다는 나라들 가운데 세 나라가 프랑스 월드컵에 얼굴을 못내민다(캐나다·러시아·중국). 다른 두 나라는 참가하기는 해도 큰 욕심을 못낼 형편이다(미국·일본). 게다가 세계의 유일한 초강대국인 미국은 이 세계 최고의 축제에 주역이 아니다.”


 
사람들이 축구를 가장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유로 우선 이 스포츠 종목이 인간의 본능과 관련이 있다는 시각이 있다. 굴러다니는 공을 보게 되면, 축구가 뭔지 모르는 어린아이라 하더라도 본능적으로 발로 찬다고 한다. 공이 자기 몸집에 비해 너무 크다고 느낄 경우만 손으로 집어든다는 것이다. 게다가 축구는 오프사이드라는 미묘한 규칙만 제외하면, 누구든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룰을 가지고 있다. 육상이나 수영과 같은 기본 종목들을 빼고 나면 가장 단순한 형태의 스포츠라고 할 수 있다. 축구는 사람이 타고나는 신체와 지능과는 별 관련 없이, 평등한 게임이다. 축구 역사를 빛낸 선수들 가운데는 네덜란드의 요한 크루이프처럼 장신이 있는가 하면, 아르헨티나의 디에고 마라도나처럼 아주 키가 작은 선수도 있다. 80년대를 풍미했던 브라질의 소크라티스는 깡마른 체격으로, 운동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경기장 안에서 모든 선수들은 똑같은 대접을 받는다. 이런 요소들이 합쳐져, 축구는 인생의 축소판이 되었다.  
 
축구는 궁극적으로 개인이 하는 시합이면서, 팀워크가 승패를 좌우한다. 축구에는 희망과 역전의 드라마가 있다. 82년 스페인 월드컵 때 알제리는 독일을 꺾었으며, 66년 런던 월드컵 때는 북한이 이탈리아를 눌렀다. 50년 브라질 월드컵에서는 우루과이가 브라질을 누르고 우승을 차지했다. 각 팀 간에 수준차는 있지만, 정해진 승부란 없다. 누구도 예기치 못했던 일이 벌어지지 말란 법이 없다. 그런 것이 인생이다. 프로축구는 지역감정을 자극하며 월드컵은 민족주의를 이용한다. 그래서 축구에서 어느 팀을 응원한다는 것은 내가 실제로 그 팀에 속해 있고 팀의 운명과 내 운명을 동일시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자신의 목숨을 내걸고 응원하는 팀이 있고 그 팀의 운명은 희소성이 높은 골로 갈린다. 이런 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모든 감정의 극과 극을 동시에 경험한다. ‘우리’가 골을 내주면 세상을 잃은 듯한 절망감에 가슴을 친다. 반대로 ‘우리’가 골을 넣으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최고 희열을 맛본다. 흔히 올림픽과 월드컵 축구는 스포츠의 제전으로 불리지만, 여기서 제전은 결코 은유법이 아니다. 여기엔 멀쩡한 사람들을 신들린 것처럼 광란하게 만드는 놀라운 힘이 숨어있다. 더욱이 그 힘이 국가와 민족의 힘과 결부되었을 땐 한 나라의 국민 모두를 그야말로 미친 사람들로 만들 수 있다. 우리는 2002년 서울 월드컵 대회 때 온 국민의 신들린 모습을 목격했다.  
 
오늘날 자본의 논리는 만인을 지배한다. 돈이 있어야 산다.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돈은 많이 있을수록 좋다. 돈은 힘이다. 이런 논리는 스포츠를 흉물스런 돈놀이의 도구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오늘날 돈이 오가지 않는 스포츠는 얼마나 될까. 또 스포츠는 바로 그 자체로서 상품이다. 이윤을 창출해 낼 수 있는 무한한 영역을 제공하는 금광인 셈이다. 이제 자본의 논리를 신봉하는 인류는 스포츠를 가만 두지 않는다. 끊임없이 싸워라. 이겨라. Show me the money! 스포츠의 스타들에게는 몇백 억대의 연봉을 지급된다. 열심히 싸워서 승리를 안겨주고 대중의 인기를 모으는 스타의 자리를 지켜줄 것을 전제로. 스타는 바로 돈이다. 무엇하나 스포츠와 선수를 돈으로부터 자유롭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가난한 아마추어로 남든지 아니면 어떻게든 이겨서 자본의 이목을 받을 수 있는 프로가 되든지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 현대 스포츠에서 아마추어리즘은 낭만적인 개념이 된지 오래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월드컵을 관장하는 FIFA는 올림픽을 책임지는 IOC와 더불어 비리의 온상이 되고 있다. 특히 월드컵을 유치하려는 국가들은 결정 권한이 있는 FIFA 집행위원을 상대로 노골적이든 은밀하게든 뇌물공세라도 펴야 경쟁국을 이길 수 있다. 매스미디어 역시 스포츠의 상업주의를 부채질하고 있다. 스포츠와 관련된 산업의 주관자로서 매스미디어는 방송기업이 올림픽과 같은 스포츠 경기의 중계권을 독점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는 경기를 통한 상품광고 효과를 극대화하는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다. 세계 각국의 스포츠용품 및 의류업체들은 자신의 상품을 제공함으로써 상품의 선전을 통해 구매력을 증진시키는 판촉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기업의 상업적 활동과 연계된 매스미디어의 영향력은 이미지를 생산하여 선수와 임원을 상품매매를 위한 광고선전물로 전락시켜 상업시장에 팔아 개인적 이익을 얻기도 한다.  
물론 스포츠가 국민화합이나 국위선양에 기여하는 공로를 인정하는데 인색할 수는 없다. 스포츠의 프로화는 경기력 향상에 많은 도움을 주고 대중들에게 기쁨을 안겨준다. 다만 스포츠의 열기가 통치기술의 차원에서 조장됨으로써 국민적 에너지의 분출이 상업주의에 이용당하는 위험성에 주목하고자 한다. 인간이 만들어낸 스포츠의 본질은 경쟁이 아니다. 하물며 스포츠가 오락화됨으로써 대중들의 욕구불만을 무마시키는 배설구일 수는 없다.  현대 스포츠는 환상과 위안의 사슬로 인간을 노예화하고 있다. 현대 스포츠는 극단적으로 승자와 패자로 만들고 그 경쟁논리는 사회병리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학교를 비롯한 사회집단 속에서도 1등만을 강요하고 있으며, 패자에게는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용기를 주지 않는다. 2등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는 불행한 사회다.  
그러다 보니 돈놀이의 도구로 전락한 스포츠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요즘 나는 대한민국에 태어난 것 자체가 너무나 감격스러워 잠을 이룰 수가 없다. 자다가도 웃고, 웃다가도 또 웃는다. 얼마나 자랑스러운가? 이렇게 조그맣고 볼품없게 보이던 나라가 세계 속에 우뚝 서서 당당하게 싸워 세계 국가들을 보란 듯이 무릎 꿇리는 모습을, 경제력 하나만을 내세워 우쭐대던 시대와는 달라도 너무나 달라진 것이다. 한류(韓流)에, 미국에서의 프로 골프 제패에, 월드 컵 축구 4강에, 야구 세계 4강 도약까지… 세계 속의 한국이란 이미지가 세계인의 뇌리에 각인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니 나라 전체가 흥분의 도가니가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한민족의 위대성이 이제야 독수리의 힘찬 날개짓처럼 하늘을 박차고 날아 세계를 향해 요동치며 비상하고 있는 것이다.”글은 다시 계속된다.“여기서 나의 이실직고를 해야겠다. 위의 내가 웃었다는 얘기는 비아냥거리고, 나도 그래 봤으면 좋겠다는 희망사항을 말한 것이다. 사실 나는 웃음이 나오지 않는다. 아니, 웃을 수가 없다. 군중 속에 빠져들 수 없는 나는 슬프다.”
여기서 우리는 환상적 행복에 젖어들 수 없는 슬픔 아닌 슬픔을 읽고 있다. 스포츠의 사회적 기능은 크겠지만, 세상에 중요한 것들은 스포츠 말고도 많다. 골 안에 세상에서 가장 최고로 공을 잘 차 넣는다고 해서, 방망이로 공을 가장 멀리 쳐 보낸다고 해서, 남을 세상에서 최고로 잘 넘어뜨린다고 해서 전국민이 그렇게 환호작약해야만 하는지 사실 따지고 보면 좀 그렇다.  마치 올림픽이나 월드컵 축구가 나라를 구할 듯이 소란 피우는 것은 보기 흉하다. 지나치게 올림픽과 월드컵을 우려먹으며 스포츠의 상업화를 부채질하는 대중매체의 호들갑도 역겹다. 스포츠는 스포츠이어야지, 장사도 정치도 아니어야 한다. 차분하고 성숙한 스포츠 문화가 그립다. 전세계를 뜨겁게 달구었던 2022 카타르 월드컵이 아르헨티나의 우승으로 막을 내렸다. 어릴 때 성장 장애로 고통받던 메시가 온갖 어려움을 뚫고 우승컵과 함께 환호하는 모습은 아름다웠다. 땀과 헌신이 만든 극적인 해피엔딩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월드컵에서 우승했어도 아르헨티나 민생의 해피엔딩은 요원하다.  
 

김지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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