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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 읽는 삶] 가을

딱! 콩꼬투리에서 튀어나간 콩알이 가슴을 스치자, 깜짝 놀란 장끼가 건너편 숲으로 날아가 껑, 껑 우는 서러운 가을이었다// 딱! 콩꼬투리에서 튀어나간 콩알이 엉덩이를 때리자, 초경이 비친 계집애처럼 화들짝 놀란 노루가 찔끔 피 한방울 흘리며 맞은편 골짜기로 정신없이 달아나는 가을이었다
 
- 송찬호 시인의 ‘가을’ 부분
 
 
 
산책길, 잘 여문 도토리들이 후드득 떨어져 내린다. 한 알이 가볍게 정수리를 친다. 상수리나무 밑에는 도토리들이 수북이 떨어져 있다. 잘 익은 것들은 확장성이 좋다. 폭발력이 있기도 하다. 순환의 때를 알기에 떠나야 할 때가 언젠지 알고 있다. 미련도 여한도 없이 춤을 추듯 떠날 줄 안다는 건 내면의 벽화가 완성된 까닭일 것이다.    
 
가을은 제 역량의 최대치에 이른 알곡의 축제다. 살아온 시간의 함축, 걸어온 날들의 자축연이다. 사과과수원이 풍기는 단내도 땅콩밭의 비릿함도 졸속이 아닌 시간과 바람과 햇빛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정직함이다. 스스로 껍질을 벗길 수 있는 것은 잘 여문 것만이 가능하다. 콩꼬투리에서 튀어나간 콩알은 비로소 자유를 얻었을 것이다.  
 
가을은 비어 있는 것조차도 그득하게 여겨진다. 뒷마당에 방치되었던 항아리 뚜껑 위로 굴러온 단풍, 볕이 모여들어 주위가 환해진다. 피로한 오후의 입가도 추켜 올라간다. 한 여름꽃을 피워내고 시들어가는 화초를 뽑아 버리려고 손을 대는데 뿌리를 지키려는 듯 단단하게 결속하는 흙의 응축이 느껴진다.  
 
미처 거두지 못한 고추밭에서 따는 끝물 고추들은 장난이 심해 벌을 받는 악동들처럼 들쭉날쭉 고르지 않지만, 매운맛은 여전히 확고하다. 끝물이라는 말은 막내라는 말처럼 한계성이 내포되어 있다. 그래서 서럽기도 하다.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아침 햇살은 너무 맑아서 울컥한다. 낙조가 만들어 내는 호수의 윤슬은 너무 아름다워 눈시울이 뜨겁다. 과하게 풍성하고 분에 넘치게 그득해서 받아 안는 품이 서럽다. 삶을 다스리는 진실은 다 슬픔과 조금씩 내통하는 것 같다.  
 
멀리 있는 친구에게서 소식이 날아오고 오래 떨어져 있던 피붙이가 안부를 물어오는 계절, 따뜻함을 그러모아 월동준비를 해야 하는 이들에게 가을볕은 신비함이다. 유리창을 통과한 순한 볕이 발등에 모여 재잘대는 일이나 검버섯 핀 노인의 얼굴을 스치는 아침볕이 수억 광년 우주를 건너온 평화의 사도란 걸 부인할 수 없지 않은가.
 
인생의 가을도 잘 영글었다면 좋으련만 대개는 그렇지 못하다. 가을이 오기도 전에 낙오되기도 하고 설익어 맛을 내지도 못한다. 제대로 익지 못한 탓에 잘 떨어져 내릴 줄도 모른다. 노욕이라는 병을 얻기도 해서 추해지기도 한다. 가을에는 자신의 누추함이 잘 드러난다. 그래서 자기비하에 시달리기도 한다.  
 
그럼에도 지루하던 일상의 소소함조차 큰 발견에 이르게 하는 가을, 핥아먹는 막대사탕처럼 아껴 써야 할 것 같다. 너무 짧은 순간은 너무 짧아서 서럽다. 삶에 배정된 인연들도 그렇다. 지나온 시간 어디쯤인가에 서성이고 있을 사람도 너무 짧았으므로 아름답게 기억되는 것 아닌가 싶다. 권태의 그늘을 걷어내는 가을의 바람, 있는 것을 있는 대로 누리는 오늘이야말로 절정이다. 콩꼬투리에서 튀어나간 콩알은 자유를 얻었지만 외로워질 것이다. 이 가을엔 누구라도 콩알의 자유와 외로움을 공손히 받아야 할 것 같다.

조성자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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