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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향수

신호철

신호철

어제 늦은 귀가로 인해 숙소로 돌아 오자마자 잠자리에 들었다. 깨어 보니 2시10분이다. 잠자리에 들기 전 6시 반에 알람을 맞춰놓고 누웠지만 잠은 깊이 들지 못했다. 글을 써서 보내야 할 곳이 몇 군데 있어 창문을 마주한 책상에 앉아 인사동의 밤 풍경을 바라 보고 있다. 간간히 빌딩의 불이 켜져 있지만 대부분 가로등을 제외하고 모두 잠들어 있었다. 내가 묵고 있는 호텔 바로 앞 펼쳐진 조계종 에서 잔잔한 목탁소리가 들려온다. 한밤중 들려오는 목탁소리는 왠지 내면의 깊은 성찰과 고뇌의 소리로 묻어난다. 어둠에 잠겨 있는 세상을 깨우고 있는 듯 마음 속을 파고 들어온다.
 
 
친구들과 저녁을 먹고 차로 이동하지 않고 걷기로 했다. 명동을 걸어 나와 종로 2가를 지나 내가 묵고 있는 인사동 NineTree 호텔에 도착했다. 호텔 로비 직원이 커피 마시며 담소할 수 있는 육층 커피 라운지를 추천해줬다. 숙박 카드로 문을 열고 들어가니 생각보다 넓은 공간에 인사동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통유리 쪽으로 둥근 테이블들이 소파와 함께 어우러져 있었다. 우리는 취향대로 커피를 내려 창가에 앉아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눴다.  
 
우리의 추억은 대학 2년에 불과했지만 50년 가까이 우정을 유지하게 된 이유는 그 기간 동안 서로의 머리 속에 각인되고 또 가슴에 담겨 지울 수 없었던 희노애락의 감정 때문이었으리라. “고작 2년이었잖아.” 스스로 놀라고 있었다. 그래 그 2년 동안 쌓였던 시간과 추억들이 하나 둘 나오며 우리 이야기도 켜켜이 쌓이고 있었다.  
 
한 친구는 광화문 쪽으로, 두 친구는 다시 인사동 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헤어졌다. 우리는 미로처럼 알 수 없는 길을 걸어 이곳까지 왔다. 우리가 걸어왔던 길들은 늘 행복으로만 점철된 길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여러 고난을 통해 더 단단해지고 강해져 지금의 모습이 되었으리라. 모두들 잘 살았고, 충실히 제 갈을 걸었기에 오히려 어려움은 목표를 향한 디딤돌이 되었음에 틀림 없었다.
 
서해안 고속도로를 달려와 만난 산골 마을 서산 여미리의 새벽은 아름답다 못해 한편의 시로 다가오고, 넓은 평붓으로 그려낸 수려한 그림 같이 담겨져왔다. 산 골마다 피어나는 산 안개는 오래된 동양화 한편을 감상하듯 편안함을 느끼게 했다. 300년 된 비루나무를 보러 가는 길가로 불그레 번지는 산등성이, 그 위로 하루가 밝아 오고, 황금 빛으로 익어가는 들판은 절로 정지용의 ‘향수’를 떠오르게 했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 옛 이야기 지줄대는 /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 얼룩배기 황소가 /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 말을 달리고 /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 짚베개를 돗아 고이시는 곳 /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 흙에서 자란 내 마음 / 파란 하늘빛이 그리워 /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 풀섶 이슬에 함초롬 휘적시던 곳 /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 하늘에는 성근 별 /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 그 곳이 차마 꿈엔들 꿈엔들 잊힐리야
 
봄이 되면 노란 수선화가 산길을 덮고 가을엔 코스모스가 지천에 피어난 풍경에서 길을 잃어도 좋을듯했다. 먼 산 틈을 비집고 동이 트고 있다. 붉게 타는 산 언덕을 걸으며 늘 그려왔던 마음의 고향을 마음껏 담아내고 있다. 가을은 깊어가는데 오랜 친구들의 눈망울도 깊이 붉어지고 있다. (시인, 화가)
 
 

신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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