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뜨락에서] 잘 익은 열매
농경사회에서 가을은 풍성함이다. 더도 덜도 말고 저 보름달 뜨는 절기만 같아라 하며 넉넉지 못했던 삶의 소원을 그려보게 하는 때이다.온갖 열매가 익어서 곡간을 채워주는 시절이다. 모두가 농민이었던 시기를 지나 몇 안 되는 농사꾼만 남아 농사를 이어가고 모두가 도시에서의 삶을 만들어가는 지금은 가을의 추수 풍경과 그 풍성함의 그림이 계절을 잊어버렸다. 제철 과일이라는 의미가 이제는 낯설어지고 덜 익은 열매를 거두어 보내어 길 위에서 혹은 창고에서 억지로 비슷한 맛이 되어 사람들 손에 들려지는 제맛을 잃은 열매가 진열장에 가득하다.
항상 추수철같이 열매 상품 가득한 시장의 좌판에는 잘 익은 열매처럼 보이는 것들이 가득하여 논밭과 과수원의 빛나는 시간을 잊어버리게 한다. 과수원에서 제철에 제맛을 담은 과일을 먹어보았던 달콤한 기억이 점점 멀어지고 있다. 사계절 흔하게 만나는 제철 아닌 열매의 편리한 먹거리 시대를 좋아해야 할지 섭섭해해야 할지 알 수 없다. 그저 맛이 제대로 들어있는 열매가 그리울 뿐이다.
과수원을 만나면 우리는 마음이 푸근해진다. 열매가 익어가는 장소가 주는 넉넉함이다. 처음 사과밭에 들어섰을 때 그 대단했던 감동이 지금도 가슴을 채운다. 사람 키 높이 몇 배가 넘는 거대한 사과나무에 가지마다 빽빽이 달려있던 검붉은 사과의 위세가 정말 놀라웠다. 지금 제철을 잊은 것만큼이나 관리의 효율화를 위해 사람 키 높이로 낮아진 사과나무가 시야를 가득 채우던 위용을 잊은 지 오래다.
사과나무뿐만 아니라 모든 과수원의 과목들이 관리 편리성에 맞추어 예전의 모양을 떠나 기계적으로 보일 만큼 크기도 작아지고 질서정연한 자세로 관리 기계 옆에 자리 잡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수원은 여전히 잘 익고 있는 열매로 인하여 우리를 기쁘게 하고 있다. 농부는 땀 흘린 지난 시간을 기억해내고 탐스러운 열매에 감사와 보람으로 바라본다. 어쩌다 들린 도시인들은 주렁주렁 먹음직한 열매에 그저 경탄의 시선을 보낸다. 달콤한 과육이 우리의 혀를 감동하게 할 때 잘 익은 열매의 놀라운 언어가 우리의 마음도 휘어잡는다.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서른 시에서 길을 만나다’,‘노마드 랜드’,‘정원의 쓸모’,‘그냥 하지 말라’,‘인생에서 늦은 때란 없습니다’ 최근 만나 본 책의 제목들이다. 잘 익어가는 열매를 떠올리게 하는 언어들이라는 생각이 조용히 들어선다. 속절없이 늙어가는 사람들에게 당신은 익어가고 있습니까 하며 묻고 있는 질문을 떠올리게 한다.
이제는 수명이 길어져서 사오십년 직장 퇴직 후 또 그만큼의 세월을 살아내야 하는 사람들에게 그저 시간을 죽이며 소일거리 찾아 헤매는 발걸음이 되지 말고 그만큼의 세월을 아껴가며 속살에 제맛을 높혀가는 열매가 되는 것이 좋을 겁니다 권고하는 책들이 줄 서 있다.
책을 넘어서는 많은 수단들이 있어 앉아 있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잡아끌고 있다. 유튜브, 트위터, 블로그, 인스타그램 등 소셜 네트워크 세계가 수많은 정보를 교류시키며 익어가는 사람들에게 길을 보여주고 있다.
달콤함이 떨어지는 포도는 좋은 포도주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시거나 떫은 열매는 버리어지고 발에 밟혀버리고 만다. 잘 익은 열매는 농부를 기쁘게 한다. 잘 익은 사람은 삶의 발걸음을 즐겁게 한다. 가을의 풍성함을 바라보며 제철을 맞아 잘 익은 열매를 거두는 마음이 되어 본다.
안성남 / 수필가
with the Korea JoongAng Daily
To write comments, please log in to one of the accounts.
Standards Board Policy (0/250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