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민들레 꽃 한 송이 올립니다
오래돼 보이는 밥상에 소찬으로 차려진 식탁은 열 사람 조금 넘게 앉을 수 있어 보였는데 몇 사람 곁들어도 조금씩 비껴 앉으면 넉넉했습니다. 선생님의 밥상은 언제나 사람들이 붐볐습니다. 명망 있는 분들이나 제자들, 유명인사였던 것 같습니다.
각자 자기 소개 하는데 제 차례가 되면 선생님께서 “멀리 미국에서 온 아주 훌륭한 여성이야. 배울 게 많아요”라고 제 체면을 챙겨주셔습니다. 사업 하며 아이 셋 키우는 엄마 외에는 제가 내놓을 카드는 없었지요. ‘훌륭하다’는 것이 무엇인지 저는 잘 모릅니다. ‘바르게 열심히 살아라’는 뜻으로 새깁니다.
두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손에 자랐습니다. 아버지란 말을 해 보지 못해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없습니다. 추억이 없으면 그리움도 없습니다. 선생님을 뵐 때마다 제 아버지도 저런 분이였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에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저는 이름난 작가도 정치인도 아니고 선생님의 제자도 아닙니다. 민들레 홀씨 같이 후 불면 날아가 버릴 스쳐가는 인연인데 선생님의 세계 속으로 저를 품어 주셨습니다. 미국 강연 오신 선생님을 컬럼버스 공항에서 제 차로 모셨고 강연 후 저희 집에서 리셉션을 했습니다. 숱하게 많은 인사들이 다녀갔지만 ‘빌 붙는 것’은 제 체질이 아니라서 인연을 맺지 않았지요. ‘한국 오면 대접하겠다’는 빈 말에 넘어갈 만큼 세상물정에 어둡지 않았습니다.
“친정도 없는데 갈 때가 어디 있느냐. 꼭 날 만나러 오너라.” 명령 같은 선생님 말씀에 애들 손잡고 댁을 찿아갔습니다. 나비 넥타이 맨 꼬마 아들은 ‘나비 넥타이 할아버지’ 식탁 메뉴에 없었던, 특별히 장만한 소시지를 즐겁게 먹었습니다.
대구에서 장편소설 찔레꽃 출간 및 어머님 칠순잔치 때는 축사를 해주셨습니다. 행사 다음날 아침 강연이 있으셔서 당일날 내려 오셔 밤차로 서울로 가시게 됐습니다. 행사 때 유명한 분 모시면 일정 준비와 경비를 부담하는 게 상식입니다. “비서가 알아서 할 테니 아무 염려 말고. 여긴 자네가 누릴 땅이지. 오래 떠나가 살아서 서툴 테니까 준비는 내가 하는 게 더 쉽지”라고 하신 말씀은 뜨거운 눈물로 흘려내려 제 삶을 관통하는 영혼의 화살로 남았습니다.
자유민주주의 가치를 담은 직언과 사회에 경종을 울리는 비판 글로 테러 위험이 있다는 소식 듣고 걱정돼서 편지를 올렸습니다. “내 나이에 이불 깔고 누워 앓다가 죽는 것보다 옳은 일 위해 장수처럼 말 타고 달리다가 화살 맞아 죽는 것이 나라를 위해 더 좋은 일이 아니겠느냐”는 글을 보내 주셨습니다.
민들레는 납작 엎드려 겨울 보내고 흙 한줌만 있으면 아스팔트 사이에서도 뿌리 내립니다. 짓밟혀도 끈질긴 생명력으로 살아납니다. 민들레 홀씨 꽃말은 이별 입니다. 이름 없는 촌부에서 가장 높은 사람까지, 흩어져 살아도 수 없는 씨앗으로 뿌리 내릴 자식들에게 꽃 향기 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평안히 가시옵소서. (Q7 Fine Art 대표, 작가)
이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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