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할머니는 아무나 되나
딸이 보낸 다섯 살짜리 손녀 사진을 멍때리며 바라본다. 너무 귀엽고 예쁘다. 사지를 이리 비꼬고 저리 틀며 폼재는 모습이 여간한 모델 뺨친다. 이번에 손녀는 유치원, 손자는 유아원에 입학하는데 온 집안이 경사 난 듯 난리법석이다. 할머니 체면에 가만 있을 수 없어 등교하는 날 입을 손자 손녀 옷값을 보냈다. 손녀딸이 제 옷을 여러 벌 골라서 내가 보낸 돈이 바닥나 손자 옷은 못 샀다고 딸이 울상이다. 이럴 때는 눈 꼭 감고 “네 자식은 네가 알아서 하세요”라고 해야 하는데 어쩔 수 없이 손자 옷값을 더 보낸다.요즘 어린아이들은 애가 아니다. 어른 뺨치는 애 어른이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 먹고 싶은 것, 입고 싶은 옷을 스스로 고른다. 자기 맘에 안 들면 ‘NO!’ 고집이 철통이다. 좋게 말하면 스스로 선택하는 권리를 고양하는 것이지만 세상살이 제 마음대로 골라 살 수 없는 때가 그 애들의 인생에도 닥친다는 것.
어릴 적에 새 옷은 추석 명절이나 설날에 입었다. 스무 가구가 조금 넘는 마을에서 새 옷 입는 아이는 술 만들어 파는 면장집 아들과 우리 남매 뿐이었다. 대구에 사는 외숙모가 보내준 알록달록한 실로 짠 예쁜 스웨터를 입었다. 해진 옷은 깁고 때 묻은 옷을 개천에 빨아 놋쇠다리미로 다린 빳빳한 저고리를 입고 등교하는 날은 너무 신나서 개구리처럼 폴짝폴짝 뛰면서 개울 건너 학교에 갔다. 가슴에 달린 하얀 손수건이 실바람에 나비처럼 나부꼈다. ‘손주는 올 때 반갑고 갈 때도 좋다’는 말은 정말 사실이다. 이리 뛰고 저리 설치며 혼을 빼고 별의별 온갖 것들을 다 물어대는 데는 척척박사라도 당해낼 재간이 없다. 온 지도 얼마 안 되는데 가는 날 동그라미 친 달력을 딸 몰래 훔쳐본다.
우리 애들은 ‘할머니’라는 소리만 들어도 눈물이 고인다. 어머님이 세 아이를 기르셨다. 둘째 딸 산후조리 도와주러 미국에 오셨다가 학교 다니며 사업하는 딸이 불쌍해 눌러앉으셔서 타국 땅에 묻히셨다. ‘할머니’라는 단어는 우리 아이들에겐 무엇이든 척척 만들어내는 ‘원더우먼’이고 언제든지 뛰어가 품에 안기고 기댈 수 있는 ‘늘푸른 느티나무’다.
‘아흔 셋, 나의 사랑하는 할머니가 극단적 선택을 시도했다. 취업준비 하며 보내던 어느 날, 나의 가족이자 오랜 친구인 할머니가 먼 곳으로 떠나려 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다큐멘터리 ‘할머니의 먼 집’ 중에서
무서우면 할머니를 가장 먼저 찾던 아이, 할머니가 해주는 옛날이야기를 가장 좋아하던 아이, 이소현 감독은 할머니를 그냥 보낼 수 없어 “내가 영화 열심히 찍을 테니까 다 보고 돌아가셔, 그 전에 돌아가시면 안 돼”라며 곁을 지킨다.
웃음이 많고 넘어져도 피가 난 채로 주무시던 할머니. 더 이상 먹이고 키울 손주도 없어 화초를 키우지만 발치 가까이 온 고독을 견디지 못해 할머니는 죽음의 강을 스스로 건너기로 작정한다. 전 재산 30만원을 화장대에 두고 수면제를 모아 생을 마감하려 했던 할머니는 ‘사는 게 성가셔’ 라고 말씀하신다.
나이 먹는다고, 손주가 여럿 생긴다고 아무나 할머니가 되는 것이 아니다.
‘할머니’라는 단어에는 인내와 희생, 고귀한 연륜이 목화꽃송이처럼 실타래로 묶여있다. 어머니의 사랑이 피와 살을 깎는 정성이라면 할머니 사랑은 오래 된 정원에서 피어나는 향기로 생의 곳곳에서 사랑의 밧줄을 감아올린다.
이기희 / Q7 Fine Art 대표·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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