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석의 100년 산책] 종교의 위기, 현대인은 어떤 신앙을 원하는가
세계 4대문명 모두 종교서 출발
신앙 자체가 목적이 되어선 안돼
기독교가 발전시켜온 휴머니즘
교회 숫자보다 진리를 추구해야
사회학자들은 인도가 미국만한 선진국가가 되는 데는 180년의 세월이 걸릴 것이라고 했다. 인도인도 첫째 목표는 파키스탄보다 잘사는 것이고, 다음 희망은 중국을 능가하는 데 있다고 했다. 그 당시에는 한국도 개발도상국 중간단계였으니까.
무엇이 원인이었을까. 3000년 가까운 세월을 종교적 세계관의 울타리 안에서 안주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세계 4대문화권 모두 원시종교를 비롯한 종교문화에서 출발했다. 인도 유럽 중동지역이 그랬다. 중국의 문화도 상고시대에는 마찬가지였다. 그 기간은 길었다. 힌두교와 불교, 유대교와 이슬람교, 기독교 등이 중세기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나 기독교는 인문학적 세계관시대를 거쳤다. 철학과 역사 문학사상의 과정을 밟았다. 그에 뒤따르는 사회과학과 자연과학 그리고 기계공학의 시대까지 창출해 냈다.
반세기 전 두 차례 인도 방문
그런데 인도는 그 어느 과정도 밟지 못했다. 인도사상을 산출시킨 우파니샤드 철학은 종교사상으로 흡수되었고 철학, 역사, 문학적인 정신계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영국학자들이 인도에는 역사의식이 없었고 과학은 배척받아 왔다고 평했을 정도다. 그 대신 많은 종교를 배출했다. 종교적 세계관과 인생관이 사상·정신계의 주류를 형성해 왔다.
인도에서 가장 문화수준이 높은 뭄바이에 갔을 때였다. 관광안내를 받아 배화교 장례절차가 벌어지는 곳으로 갔다. 우거진 숲속에 설치된 장례시설이 있고, 사람이 죽으면 물과 땅을 더럽히면 안 된다고 해 시신을 시설 대에 안치한다. 독수리 까마귀들이 그 시신을 뜯어 먹고 유골은 밑으로 떨어지게 되어 있었다. 그래야 영혼이 구원을 받는다는 신앙이다.
뭄바이에는 마하트마 간디가 18년 동안 거주한 2층 건물이 보존되어 있다. 지극히 검소한 공간이다. 2층에는 간디가 직접 천을 짰던 물레가 있었다. 옛날 우리 선조들이 사용하던 모습과 큰 차이가 없다. 대학 경제학과 출신의 안내원이 간디는 기계문명을 기피했기 때문에 손수 만든 천을 사용했다고 설명했다. 우리가 영국의 경제적 진출을 막기 위한 목적이 아니었느냐고 물으니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라고 대답했다. 그러면서 수도 뉴델리에 가면 간디의 석조무덤이 있는데 그 돌들 모두 기계를 쓰지 않고 손으로 갈아 만들었다는 설명을 추가하였다. 수많은 종교시설이 있고 어디에 가든지 종교적 의식과 모습을 보게 된다. 소떼가 도시 거리를 다녀도 제재하지 않았다. 신앙의 대상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지금은 달라졌지만.
내가 인도를 다녀온 얼마 후에 종교폭동이 일어났다. 이슬람 성전 안에 안치되어 있던 마호메트의 머리카락이 없어졌는데 힌두교도의 소행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 사건이 확대되면서 두 종교인 간의 싸움이 전쟁 상태로 확대되었다. 사상자 600여 명이 생겼다는 보도였다. 상식적으로 판단해도 거기에 마호메트의 머리카락이 보존되었을 리도 없고 그것 때문에 폭동이 발생했다면 그런 종교는 없는 편만 못하다. 중동지역을 다녀보았을 때는 더 심각한 문제를 발견했다. 종교의 영향이 사회문제를 넘어 국가와 국제적 문제까지 좌우하고 있었다. 종교국가들이기 때문이다. 남존여비 전통과 일부다처제는 코란경을 믿는 동안에는 지속될 것이다.
사상가들은 공산주의는 100년으로 끝났으나 유대교와 이슬람교의 분규는 200~300년 계속될 것으로 본다. 이런 현실을 보면서 현대인도 같은 종교적 신앙을 수용할 수 있는가를 묻게 된다. 우리가 믿으며 공존하고 있는 불교와 기독교는 우리의 희망이 될 수 있는가.
기독교의 예를 살펴보기로 하자. 종교를 잘못 받아들이게 되면 그 신앙이 인간의 가치 있는 삶을 위한 과정과 수단이 아니고, 인생의 목적인 듯이 잘못 생각하게 된다. 기독교 정신이 모든 철학이나 사상보다 인류에 희망이 되며 역사의 긍정적 가치관이 되어야 한다. 왜 현대인이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는가. 기독교의 정신이 휴머니즘을 탄생시켰고 인도주의 정신을 이끌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성적 사유와 가치는 물론 양심과 윤리적 가치를 수용하고도 더 높은 방향으로 발전시켜 왔기 때문이다. 이성적 판단이나 양심적 기준에 미달되는 종교라면 현대인들은 거부해야 하고 인생의 긍정적 의미를 종교 이외의 영역에서 찾아야 한다.
인간의 한계 넘는 구원의 약속
과학정신도 그렇다. 자연과학의 원리와 과제는 종교적 영역과 차원이 다르다. 그것은 이미 법칙이 정해져 있다. 그러나 사회과학의 기반과 목표는 정신적 질서와 가치를 배제할 수 없으므로 종교적 진리와 무관할 수 없다. 개인의 삶과 사회적 삶의 가치에는 공통성이 있기 때문이다.
정신과학은 삶의 가치를 위한 것이다. 그런 사회과학적 원리와 이념도 종교가 수용하면서 새로운 가치창조의 길로 이끌어 갈 수 있어야 한다. 기독교는 그런 책임을 역사적으로 감당해 왔고 앞으로도 해결해 줄 수 있기 때문에 받아들인다. 기독교회가 기독교의 전부이고, 교회가 만든 교리가 인류역사의 진리와 일치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런 정신과 사상적 사명을 포기하거나 무관한 신앙이 된다면 기독교는 존재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교회의 수가 많고 적은 것은 문제 밖이다. 기독교가 인류의 희망이며 역사의 생명력이 될 수 있는가 함이 문제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교리보다 진리이다. 인간이 인간 스스로를 구원하며 인류가 만들어 놓은 비참과 역사적 절망을 스스로 해결할 수 없다면 우리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 존재하며 주어지는 구원의 약속을 바라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참된 신앙의 생명력이다.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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