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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에] 살별의 노래

운명을 믿지 않는다. 맞장 뜰 생각도 없고 피해 갈 이유도 없다. 운명은 수천만개의 천체와 별들의 운행 속에 캄캄한 밤 포물선을 그리며 사라지는 살별의 흔적이다.  혜성(彗星, 살별)은 꼬리별이다. 태양계에 속하는 행성들은 작은 점이나 원형으로 빛을 내지만 살별은 긴 꼬리를 끌고 움직인다. 초기 태양계 외곽에서 존재하던 살별은 태양의 중력으로 태양계로 진입하는데 큰 질량을 가진 혜성을 만나면 궤도를 바꾸거나 다른 행성에 부딪혀서 부서지고 태양 밖으로 사라진다. 운명은 혜성처럼 진로가 없다. 살별의 빛나는 긴 꼬리도 먼지나 티끌일 뿐이다.    
 
싱글러브 전 유엔사령부 참모장(예비역 소장)이 지난달 19일 100세로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1977년 지미 카터 당시 미국 대통령의 주한미군 철수 계획에 반대하다가 35년간의 복무를 마치고 강제로 퇴역당했다. 한국의 군사원조를 중단하고 5년 내 주한미군을 철수하려는 미국의 계획은 그 뒤 백지화된다.
 
운명의 물꼬는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터진다. 총장님 추천으로 미공보원장댁의 한국어교사 채용 인터뷰를 했는데 다른 대학에서 온 쟁쟁한 영문과 수재들을 제치고 내가 발탁된 것은 영어를 잘 못 하는 국어국문학과 학생이기 때문이다. “미국말 잘하는 사람 필요 없어요. 한국말 잘하면 됩니다.” 라우리 여사가 나를 선택한 이유다. 운명이라는 것은 고삐 풀인 말처럼 때로는 광야를 달린다. 미국공보원(USIS)은 미국문화원(American Cultural Center)으로 이름이 바뀐다.  
 
앞이 보이지 않는 대학생활은 캄캄하고 지루했다. 친구들과 잔디밭에 뒹굴며 육영수여사께 ‘개교기념일 날 놀러오세요’라고 편지를 보냈는데 청와대에서 답신이 왔다. 일사천리로 진행돼서 ‘영부인 초청 대학생과의 대담’에서 사회를 맡았다.  
 
운명이 달력에 동그라미를 친다면 그 날이다. 7월4일 미국독립 200주년 기념 파티에 양국정부의 귀빈들만 참석하는 잔치에 초대받는다. 라우리씨가 칠레 대사로 영전돼 ‘작별 인사를 한국말로 하고 싶다’고 해서 선생 자격으로 참석했다. 살별의 꼬리는 어디쯤에서 궤도를 바꾸게 될지도 모른다. 그 파티에서 제임스를 만난다. 그 해 8월15일 육영수 여사가 저격당하고 마지막 가까이 수행한 여대생이라서 정보부 보호(감시)로 애도방송에 출연, 대규모 집회에 연사로 등장한다,  
 
싱글러브 장군을 처음 만난 것은 유신헌법 반대 운동 데모로 서슬이 시퍼렇던 때다. 학교는 등교하는 날보다 닫는 날이 더 많았고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항시 따라다녔다. 한국 사정은 미국이 더 잘 간파하고 있었다. 제임스가 긴급시 미8군 부대에 급히 숨을 수 있도록 출입증을 발급해 주었다. 바늘에 실도 꿰어보지 못한 내 ID카드의 직책은 재봉사, 언제든지 피신이 가능했다.
 
싱글러브 장군에게 한국요리를 대접한 것은 그해 가을이다. 눈이 어질고 깊었다. 제임스가 한국 여성상 빛내느라 내가 요리를 잘한다고 큰소리친 덕분에 전기밥솥 스위치도 안 눌러 본 솜씨로 관사에서 ‘장군을 환영하는 저녁 만찬’을 준비했다. 솜씨 좋으신 어머니가 만드신 요리를 접시에 담기만 했다. 장군은 김을 좋아했다.  
 
몇 년 후 미국에 오고 방송에서 주한미군 철수를 반대하는 장군의 목소리를 들었다. 영웅은 죽지 않는다. 잠시 태양 밖으로 사라졌을 뿐이다. 초롱초롱하게 빛나는 눈빛에 빳빳하게 잘 다려진 군복의 어깨에서 별이 반짝거렸다. 그의 별은 대한민국을 지키는 영원한 별이 되어 태양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서 빛나고 있을 것이다. 

이기희 / Q7 Fine Art 대표·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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