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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삼투압 현상

[사진=신호철]

[사진=신호철]

행위의 주체가 없는 상태를 무아지경이라 말한다. 카노피를 두드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앉아있다. 빗소리 밖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눈에 들어오던 풍경도 아른해지고 이내 빗소리에 빠져 든다.  
 
톨스토이는 안나 카레니나의 실질적 주인공 레닌의 풀베기를 예로 들어 가장 행복한 순간을 이렇게 묘사했다. “낫은 저절로 움직였고 일의 어려움은 온 데 간 데 없었다. 30분이나 지났을까 생각했지만 벌써 한나절이 지나 오후가 되고 있었다. 조금 더 잘 해야지라고 의식을 차리는 순간 일은 어려워졌고 능률은 오히려 오르지 않았다.” 타자와의 교감이나 세상과의 진정한 교통은 자아로부터의 완전한 자유일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뒷마당 정원을 가꾸다 보면 간혹 소나무 싹이 눈에 띤다. 꼭 코스모스 싹 같이 여리고 하늘하늘하다. 소나무와 코스모스의 성장과 모습을 상상해보라. 별반 다르지 않은 모양의 싹이었지만 성장한 후의 모습은 비교할 수 없다. 물론 코스모스는 일년생이기에 매년 씨로부터 자라나 싹을 내고 한들한들 가을 한 철을 풍미하면서, 코스모스 꽃길을 걷는 우리는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기도 하고 마냥 행복해지기도 한다. 소나무는 한 해 두 해를 지나며 추운 겨울에도 하늘을 향해 푸르고 곧게 뻗어 자란다. 백년을 넘게 자라는 소나무를 올려다 보면서 우리도 저렇게 곧고 바른 인생을 살아가기를 원하고 갈망한다.
 
생명은 느낌으로 인지되기도 하지만 생명은 현실로 내 안으로 강한 힘으로 밀고 들어온다. 너무 빠르게 오기도 해서 당황스러운 때도 있지만 때론 인식하기 어려울 만큼 느리게도 온다. 그러나 그 생명이 내게 다가온 순간부터 내 안의 모든 의식은 자연스레 그쪽으로 흐르기 시작하다 급기야 내 속의 모든 것을 빼앗기게 된다. 죽은 것에서는 향기가 없고, 소리도 없고, 일절 움직임도 없다. 그러나 생명이 있는 곳에서는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예측하기 힘든 상황들이 표출되기도 한다. 그 변화는 타자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힘이 있다.
 
 
목놓아 부르던 이름
오늘도 불러본다
내가 너에게 명명한
언젠가 네가 불러주었던
서로의 이름을 가슴에 묻고
함량미달인 날 사랑한 너는
가까워져도 나는 네 안에
벌어져도 너는 내 속에 살고 있다  
경계는 무너지려는데  
서로 닮아지려 마음으로 운다
힘든 걸음 옮기며  
먼발치로 힐끗거리며
눈치 없이 재갈을 걷고 있다
 
 
비를 맞아본 사람은 안다. 처음에는 비에 조금씩 젖는다는 생각이 들지만 흠뻑 젖은 후에는 비에 젖는다는 생각이 사라진다. 가랑비에 옷 젖듯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온몸이 흠뻑 적셔진다.  
 
서로 다른 농도를 가진 두 용액을 배치 시키면 농도가 낮은 용액이 농도가 높은 용액 쪽으로 이동 하는 현상을 삼투현상이라 한다. 이때 생기는 압력을 삼투압이라 한다. 김장을 할 때 보면 항상 배추를 소금물에 잠기게 한다. 배추 속의 수분은 소금물의 농도보다 낮기 때문에 배추 속 수분이 소금물 쪽으로 이동하게 된다. 수분이 빠진 배추는 풀이 죽고 간도 적당히 들어 양념을 잘 버무릴 수 있는 상태로 자연스레 바뀌게 된다.  
 
엉뚱한 생각인지 모르지만 이 삼투압 현상은 인간에게도 적용되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나의 몸 속에 흐르는 아름다움에 대한 가치가 내가 대하는 대상이 지니고 있는 더 높은 절대적 가치 속으로 자연스럽게 이동되지 않을까. 그 현상 속에서 우리는 상대에게 마음을 주고, 마음을 빼앗기고 결국 무아지경에 이르게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꽃을 바라보다가 꽃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빗소리를 듣다 빗소리에 넋을 놓아버리고, 음악을 듣다 그 음율 속으로 빠져드는 것도 일종의 삼투압 현상이 아닐런지. 행위의 주체가 더 높은 가치의 주체로 이동되면서 생겨나는 무아지경의 상태가 빈번히 우리의 일상속에서도 자연스레 일어나는 현상이 아닐런지. 어제도 오늘도 또 내일도 쳇바퀴 도는 일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행동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삶을 대하는 태도, 상대를 대하는 나의 태도를 바꾸는 것이 아닐런지. (시인, 화가)

신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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