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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에] 옷장

오늘도 정리 정돈과 버리기를 시작한다. 눈만 뜨면 되풀이되는 일과다. 추억이 담긴 옛 사진을 하나씩 들여다보듯, 옷들을 꺼내 한 가지씩 입어본다. 몇 해 전까지 잘 맞던 블라우스의 앞 단추가 채워지지 않는다. 탐욕과 욕심으로 세월 속에 몸이 불은 탓일까. 그런가 하면 소우주의 윗부분과 아랫부분을 이으며 교량 역할을 하던 허리는, 신세대에 밀려난 구세대같이 균형을 잃었다.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불량한 살과 절제 못 한 나잇살까지 더해지며, 옷이 상체에서 하체로 내려가지를 않는다. 두꺼워진 허리는 아날로그 세상에서 디지털 세계로 옮겨가지 못하는 내 영혼을 닮았나 보다.
 
사람 모양의 마네킹에 인조 조명으로 혼을 불어넣으면 마네킹이 새 생명을 얻은 듯이 보이듯, 옷장 안에 불을 켜자 나의 지난 삶들이 다시 살아나는 것 같았다. 지난 삶이 주마등처럼 스쳐 가며, 험한 세상 속에서 나를 날게 해준 때 묻고 정든 옷들이 애틋해진다. 문득, 지나간 세월의 흔적을 지우고 버려야만 하는 생명체의 한계가 슬픈 강물처럼 가슴에서 흘러내린다.
 
서른 개 이상의 큰 도네이션 백이 채워지자, 마침내 옷장은 비워졌다. 돌아보면 장에 걸린 옷들에는 네 계절이 춤추고 있었다. 꽃 피는 봄과 푸른 여름이 있는가 하면, 낙엽 흐느끼는 가을과 눈꽃 피어나는 겨울이 숨어 있었다. 삶을 동반하며 내가 누구인지를 드러내 보여주던 나의 분신들. 어쩌면 삶은 옷과 내가 만든 찰나의 팬터마임들이 이어져 탄생한 것은 아닐까.  
 
텅 빈 옷장은 허공이 되어 침묵하고 있다. 이제 온갖 삶이 자취를 감추자 빈 벽만 남아 무한대의 우주와 연결된 빈 옷장,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어쩌면 수많은 언어를 뱉어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것은 세월이 흐르고 세상이 바뀌듯, 세간의 모든 실체는 쉬지 않고 변하는 것이라고 얘기하며, 그러기에 모든 실체는 머무름 없이 흐르는 것이고 삶은 순간의 연속일 뿐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닐까.
 
광활한 하늘과 통한 옷장에는 머지않아 구름과 달과 태양이 뜨게 되리라. 그리하여 그것은 낮의 밝음과 밤의 어두움을 품게 되리라. 밝은 희망과 선, 밤의 어두움과 악(惡)을 간직하게 될 옷장, 활짝 열린 그것은 밝음과 어두움 그리고 선과 악을 품은 작은 우주로 변하리라.  
 
어찌 보면 옷장은 나의 마음을 닮았는지도 모른다. 삶의 모든 것을 품을 수 있지만, 어느 날 비워지면 품었던 존재조차 사라지는 옷장, 그것은 온갖 삶과 삼라만상을 품을 수 있지만 비우려 들면 찰나에 비울 수 있는 내 마음과도 흡사하지 않을까. 영혼의 비움과 채움. 둘은 썰물과 밀물처럼 한 몸이기에 비워짐은 또 다른 채워짐을 의미할 것도 같다.  
 
삶이 담겼던 옷장에서 쓸모없는 것들을 비워내듯, 생에 독이 되는 사념들을 매 순간 마음에서 지워 내리라. 아집과 아만, 집착과 욕심 그리고 오만과 편견을 제거해 버리면, 마음은 출렁대는 자유와 풍성한 여유로움으로 물밀듯 채워질 것 같다. 

김영애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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