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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나는 누구였나

꿈자리가 뒤숭숭하다는 표현을 어릴 적 할머니와 살 때 자주 들었다. 짧지 않은 내 삶에서 꿈에 의해 감정이 이리저리 흔들린 기억, 1도 없다.  
 
세상 떠난 가족이 꿈에 나타나면 어쩌니저쩌니 하는 점쟁이의 말을 깡그리 무시하며 살아왔다.  
 
부정적으로 좋지 않다는 해석을 믿지 않고 내가 긍정적으로 좋게 해석을 한다. 어쩌다 한 번 보이는 모습들이니 소중하게 받아들이는 거다.
 
행여 엄마라도 날 찾아온다면 그날은 로또 당첨되는 날. 보고 싶은 얼굴 보았으니 신나서 좋은 하루 꾸밀 수 있다. 묻고 싶은 얘기를 깜빡 잊고 또 그냥 엄마와 헤어진 것이 아쉽다.  
 
다음엔 꼭 알아봐야지. 그렇게 수시로 한 사람씩 내 꿈에 출현했던 친정 식구들이 돌아가는 새벽이면 그날 하루를 행복하게 허락받은 기대감으로 부풀곤 한다.
 
삼복더위에 세상 구경 시작한 지 몇몇 해. 올해 생일엔 예년과 다르게 뼈가 시리다. 여섯 살 터울로 서먹하게 지내던 작은 오빠와 이별한 지, 두 해하고도 7개월이 지났는데 이제야 움츠린 내 모습이 서럽다. 오도카니 혼자 남은 걸 왜 보는가. 몇 날 며칠을 밤마다 이어지던 엄마, 아빠, 큰오빠, 작은오빠. 그리운 사람들과의 만남으로 내가 깨달아야 함은 무엇이었나.  
 
아하, 내가 혼자구나. 든든한 내 친정 밀양 박씨 집안의 마지막을 가늘게 붙들고 있는 내 아버지의 막내, 내가 있음을 깨우치려는 식구들의 아우성이었다. 기제야, 왜 넌 노기제라 하니? 박씨 집안의 딸인데 박기제여야지. 기제야, 아빠가 네게 준 성은 박씨임을 기억해라. 어서 박기제로 돌아오거라. 내 소중한 딸임을 망각하지 말거라.
 
스물여섯 해를 키워준 한국을 뒤로하고 남편 따라 이민 길에 올랐던 1973년 7월, 그땐 인지하지 못했던 상황이 떠오른다.  
 
미국 첫 관문인 하와이에서 서툰 영어로 입국 절차를 받으며 발생한 오류였다. 왜 박씨인 나를 노씨로 바꾸었나? 누가? 내게 한마디 묻지도 않고?  성을 바꾼다는 상태를 어찌 이리도 쉽게 당했단 말인가.  
 
단순히 미국 땅에서 살기를 선택했으니 미국법을 따른 것이라고 변명도 없었다. 바보처럼 헤벌쭉 남편 성을 받아 불평 없이 살아온 것이다. 한국으로 보내던 편지마다 겉봉에 쓰인 노기제란 이름을 보시던 아빠의 허탈함이 느껴진다. 하나뿐인 딸을 시집보내며 절대 내 딸은 출가외인이란 생각을 안 하신 내 아버지. 박기제여라. 노기제가 웬 말인가.  
 
이제라도 깨달았으니 본연의 박씨집 막내딸로 돌아가자. 헐거운 듯도, 빌려 입은 듯도 했던 남의 옷은 이제 벗어버리자. 친정아버님 생존해 계실 때, 이렇듯 크게 불효를 저질러 놓고도 아무런 자책 없이 무심히 살아온 날들을 돌리고 싶다. 나는 박기제다.  
 
50여 년 결혼생활에 성씨까지 바꾸면서 최선을 다해 살아온 노기제에겐 아빠의 풍부한 사랑도, 끝 간 데 없는 오만가지 칭찬도, 믿고 지켜봐 주시는 기다림도 아낌 없이 보내 주시던 응원과 지지. 어느 것 하나 비슷한 대우가 없었다. 노씨 집안에서만 있었을 법한 바람직하지 못한 대우만이 내 삶을 얼룩지게 했고, 피폐하게 한, 이상한 나라의 생활 양상뿐이었다.
 
그런 인생 진즉에 접지 못한 내 탓이니 이제라도 내 친정으로 돌아가리라. 나는 분명 사랑으로 키워졌고, 귀하지 않은 대우 받으며 인생을 굴곡지게 살지 말았어야 했다.  
 
박기제로, 남은 날들 살면서 하늘의 은혜 듬뿍 받아 환하게 그리고 예쁘게 피워보자. 다시는 내 친정 식구들 마음에 대못 박는 짓은 하지 말아야겠다.

박기제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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