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시샘, 우리들의 어두운 본성
“도공은 도공과 원한을 맺고, 공예사는 공예사를, 거지는 거지를, 시인은 시인을 시샘한다." 헤시오도스(기원전 7세기 그리스 시인)맞는 말이다. 내가 빌 게이츠를 시샘하지 않는 이유는 그가 정신과 의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그와 경쟁의식을 느낄 아무런 이유가 없다.
조지가 생떼를 부린다. 전날 롤랜드가 극심한 난동을 피웠던 일이 부러웠다고 말한다. 주사를 놓는 병동 직원들의 관심을 자기도 받고 싶다는 것. 조지와 롤랜드는 썩 좋은 사이가 아니다. 간간이 서로 트집을 잡고 주먹다짐도 한다. 그들의 불행은 시기와 질투에서 출발한다.
신데렐라의 계모와 의붓자매는 차갑고 모질고 악질적이다. 콩쥐팥쥐의 팥쥐도 저질의 극이다. 유교의 '칠거지악(七去之惡)', 가톨릭의 '7개 대죄(Seven Deadly Sins)'에서도 질투와 시샘이 두각을 나타낸다.
아담과 이브의 아들, 카인과 아벨은 어떠했는가. 야훼께서 곡식을 예물로 바친 카인보다 양 떼 가운데서도 ‘맏배의 기름기'를 골라 바친 아벨의 예물을 더 반기셨다는 기록은 불가사의한 데가 있다. 카인은 질투에 몸을 떨며 동생 아벨을 들로 데리고 가서 돌로 때려죽인다.
시샘 당하는 일은 공격 받는 일이다. 겸손의 미덕은 시기의 표적을 피하기 위함이다.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모든 수상자가 나열하는 ‘Thank you!'의 연발은 자신의 공을 남의 은덕으로 대치하는 작업이다. 감사하는 사람과 감사 받는 사람들 사이에 기쁨과 환희가 넘쳐 흐르고 질투 어린 표정은 어디에도 없다.
로버트 그린의 저서에 ‘인간 본성의 법칙(원제: The Laws of Human Nature)'이 있다. 저자 그린은 인간의 본성 중 나르시시즘을 위시한 여러 어두운 면을 가차 없이 파헤친다. 우리가 모두 얼마나 허술하고 깨지기 쉬운 존재인지!
우리는 누구나 인정받고 남들의 관심사가 되고 싶다. SNS에 웃고 있는 프로필 사진, 다듬어진 글, 경치, 꽃, 명화, 좋은 접시에 담긴 음식 등을 보라. 당신도 나도 부지불식간 부러운 마음이 들지 않는가.
로버트 그린은 우리가 시샘으로 괴로울 때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 나보다 잘난 사람과 나를 비교하는 아픔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보다 안 잘난 사람을 생각하며 위안을 받는 디펜스가 통할 때가 많다. 남의 우수성을 본보기로 삼아 자기를 발전시키고 승화하는 아주 훌륭한 방법도 있다.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상대에게 심리적으로 더 가깝게 접근하는 기법도 유효하다. 부러운 여건과 상황은 그의 일부분일 뿐, 잘 보면 그가 나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깨달음에서 측은지심이 솟고 모종의 공감 현상이 일어나면서 시샘이 사라진다.
오래전에 ‘envy'가 ‘envision'과 말의 뿌리가 같다고 말한 적이 있지만 이제 그와 달리 ‘envy'가 ‘in'과 ‘vie, 경쟁하다'가 합쳐진 단어라는 생각이 굳어진다. ‘vie'는 16세기경 도박에서 상대방에게 도전한다는 뜻이었고 이 말은 또 ‘invite, 초대하다'와 같은 어원이라는 사실이 흥미롭다. 초대는 응당 도전의식을 겸비한다.
스포츠맨 정신은 건전한 도전과 다툼이다. 시기심은 동종 경기에서만 발생한다. 정치인은 권투 선수를 시샘하지 않고 정치가를 시기한다. 국가는 국가를, 종교는 종교를 선망하고 질투한다. 저급한 이념이 월등한 이념을 음으로 양으로 물어뜯는다.
서량 / 정신과 의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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