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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에] 판사에게 보낸 편지

점심 때가 지나 좀 한가한 시간, 엔리케가 아내와 함께 식당으로 들어섰다. 그들은 손님이라기보다는 8촌쯤 되는 친척 같다. 웃으며 그들을 반겼다.
 
식당을 개업한 얼마 후 엔리케를 종업원으로 채용했다. 15년 전쯤의 일이다. 남미계 이민자이지만 적당한 체구에 안경을 쓴 작은 눈과 갈색 피부는 내 먼 조카라 해도 믿을 정도의 외모였다. 그는 성실한 일꾼이었으나 출근이 5분쯤 늦기 일쑤였다. 그 버릇이 내 신경을 거슬리곤 했다.
 
그의 둘째 딸이 유아 세례를 받는 날이었다. 나도 초대를 받아 성당에 갔다. 손님은 모두 자리에 앉아 미사 시작을 기다리고 있는데 아이와 부모가 나타나지 않았다. 조마조마했다. 아니나 다를까, 신부님은 아이를 한참이나 기다려야만 했다. 몸에 밴 습관은 고치기 힘든 모양이다.  
 
같이 일하며 몇 해가 지났다. 속마음을 좀처럼 얼굴에 드러내지 않는 그가 한동안 지치고 슬퍼 보였다. 그러던 중 할 이야기가 있다고 했다. 그의 이름 ‘엔리케’는 세상을 뜬 조부 이름이고 그는 할아버지 이름과 소셜번호를 도용해 왔다고 고백했다. 중학생 때 멕시코를 떠나 텍사스에서 살고 있던 할아버지와 함께 살았단다. 손자의 신분 정리를 하지 않은 채 세상을 떠난 조부를 원망하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사실을 알면서 함께 일할 수는 없었다. 신분이 정리되면 다시 일하자고 했다.  
 


그렇게 그는 떠났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대여섯 해를 같이 일했던 그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했다. 적어도 추방은 면하기를 기원했다. 어느 날 그의 아내 애나가 가게에 나타났다. 다급해 보였다.  
 
엔리케가 음주운전으로 유치장에 있는데 신분문제까지 겹친 추방 당할 위기에 처해 있다고 눈물을 글썽였다. 애나는 온 힘을 다해 남편을 구할 수 있는 길을 찾고 있다며 나에게 엔리케에 대해 편지를 써달라고 부탁했다. 판사에게 제출할 것이란다. 수줍게 미소 지으며 남편 뒤에 서 있던 새댁 모습이 아니었다. 남편을 위해 무엇이든 하겠다는 결연한 태도였다.  
 
집으로 돌아와 편지를 썼다. 늘 지각하던 녀석의 모습이 잠깐 떠올랐지만 엔리케가 얼마나 성실하고 유능한지, 그리고 가슴 따뜻한 사람인지를 성심껏 써나갔다. 친절하고 책임감이 강해 우리 비즈니스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며 미국 사회의 좋은 일원이 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고 했다. 엔리케를 칭찬했던 단골손님 매직 존슨 말까지 인용하면서 정성껏 쓴 편지를 다음날 애나에게 전했다.  
 
수일이 지났다. 애나와 엔리케가 함박웃음을 웃으며 나란히 식당에 나타났다. 판사가 편지를 다 읽고 나서 ‘네 주인이 너를 많이 사랑하는 것 같다’며 그를 풀어주었다고 한다. 편지 한 장이 판사의 결정에 도움이 되다니, 내 일처럼 기뻤다. 누군가를 돕는다는 것이 거창한 일이 아님을 알았다.  
 
정답게 소곤거리는 애나 부부 모습을 바라본다. 고맙고 예쁘다. 곧 둘째 딸 멜리의 열 번째 생일이란다. 색연필과 스케치북을 선물로 준비해야겠다.

이정숙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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