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뜨락에서] 구식 어머니-유방 파제트 병에 대하여
가을이 시작된 지 한 달 정도 지난 시월, 오척이 안 되는 작은 키에 단정해 보이는 한국 할머니를 보게 되었습니다. 검고 짧은 단발머리에 허리가 반듯한 할머니는 진찰대에 쉽게 올라 진찰을 받았습니다. 최근 방사선 유방조직 검사 결과 좌측 유방에 조기암 진단을 받은 후 수술 치료의 의견을 상담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연세가 어떻게 되나요?” “쉰일곱.” 차트를 보니 할머니의 나이는 여든다섯이었습니다. 신체검사를 받으러 온 초등학교 학생처럼 밝고 씩씩해 보였습니다. 진찰한 결과 왼쪽 유방 유두의 모습이 벌겋게 부풀어 오른 모습이었습니다.유방 엑스레이 사진과 병리 소견 그리고 진찰 결과를 종합해 볼 때 전형적인 유방 파제트병(Paget‘s disease of the breast)의 소견이었습니다. 유두가 가렵고 피부가 벗겨지기도 하여 빨갛게 변하고 습진처럼 보이나 습진 치료나 항생제 연고로 낮지 않으며, 이런 경우 아주 드문 유방암의 일종인 파제트 병을 의심할 수 있습니다. 간단하게 의심되는 피부 부위의 조직검사 등으로 유방 상피내 암의 진단이 가능하며, 수술 전 맘모그람, 유방 초음파 혹은 유방 MRI 검사 등을 통해 동시에 있을 수 있는 유방 다른 부위의 다발성 침윤성 유방암 유무를 알아야 합니다.
환자와 같이 온 간병인에게 소견을 말해주고 멀리 있는 아들에게도 진찰 소견을 전화로 알려주었습니다. 할머니는 플러싱에서 간병인과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3주일이 지난 후 병원에서 좌측 유방 절제술을 받았습니다. 수술 후 회복실에 작은 소동이 있다는 연락을 받고 가보니, 할머니가 침대에서 내려와 환자 가운을 반쯤 걸친 채 회복실 가운데 서너 명의 간호사들에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아픈 데도 없는 데 집에 보내줘, 집에는 친구도 있어, 왜 나를 이런 곳에 누워 있으라 해?” 할머니는 아주 못마땅하여 집에 가기를 고집하였습니다. 간호사와 간병인과 합세하여 할머니를 하룻밤 병원에서 관찰할 수 있도록 설득했으나 허사였습니다. 바로 그때 아들과 통화가 되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네가 그렇게 하라면 하루 자고 가야지.”
할머니는 의젓하고 전혀 딴사람같이 침대로 돌아가 가만히 누웠습니다. 할머니는 다음 날 퇴원하였습니다. 퇴원하는 날 새벽 여섯 시 반, 멀리서 서너 시간 운전해온 아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수술 2주일 후 수술부위 상처가 열려 환자를 보게 되었습니다. 간병인에게서 할머니가 한밤중 조용히 일어나 수술부위의 거즈를 떼고 거울을 보며 수술부위의 실밥을 하나 둘 씩 떼고 다시 거즈를 붙이는 것을 목격하였다 했습니다. 한 달 후 벌어져 있던 수술 부위는 할머니가 생각한 데로 스스로 잘 낳았습니다. 수술 후 병리소견은 에스트로겐 음성인 다발성 유방 상피내암으로항암 치료, 약물치료, 방사선치료는 필요하지 않으며, 향후 15년간 재발 확률이 5% 미만임을 환자 보호자에게 설명해주었습니다. 그녀가 한국에서 약대를 졸업하고 혼자되어 미국에 온 후 약사로 병원 등에서 밤낮없이 일하여 네 명의 자녀를 훌륭하게 교육하였다는 것을 들은 것은 수술 후 약 한 달이 지난 후였습니다.
작고하신 나의 어머님을 생각합니다. 이제 거의 노인이 되어 어머님이 원하시던 자리에 와 가만히 쥐었던 주먹을 펴 봅니다. 그곳엔 잡을 수 없는 아쉬운 시간의 부피가 한 줌의 바람으로 느껴집니다.
성갑제 / 외과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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