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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망경] 사이

영국의 정신분석가 도널드위니컷(Donald Winnicott: 1896~1971)의 ‘과도기 공간, transitional space’에 대한 논문을 다시 읽는다. 그는 사람 자체보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평생 연구한 사람이다. 이른바 ‘대상관계론, Object Relations Theory’를 펼치는데 한 몫을 단단히 한 정신분석가다.
 
‘사이’는 공간을 뜻한다. 환자를 인터뷰할 때 잘 쓰는 말로 ‘What was it like between you and your mother when you were a child? -어릴 적에 어머니와 사이가 어땠어요?’ 할 때의 ‘between’. 사이!
 
석학 이어령이 2022년 2월 26일에 타계하셨다. 2002년 4월 어느 날 그의 뉴욕 맨해튼 강연회에서 위니컷의 ‘과도기 현상’에 대하여 질문을 한 적이 있다. 그는 약의 혈중농도 정도에만 치중하는 시중 정신과 의사들보다 훨씬 탁월한 식견을 피력했다.
 
생후 4개월쯤 ‘first-not-me, 처음으로 내가 아닌’ 객체의 실제를 알려주는 장난감 곰, ‘security blanket’ 같은 것들이 우리의 환상과 현실 사이에 완충지대를 이룬다. 내적 상황과 외부 세계 사이!
 
장난감에서 출발한 과도기 현상은 시간이 흐른 후 취미생활, 직업의식, 동호회, 사랑, 정치당원, 종교활동, 예술영역 등등으로 변천하여 ‘제3의 공간’이 되어 우리의 피폐한 삶을 풍요롭게 한다. 곰 인형 대신 핸드폰을 애지중지 만지작거리고 이웃집 아이와 공놀이를 하는 대신 페북에 멋진 사진을 올리며 우리는 전 지구촌을 장악하는 제3의 공간에 합세한다.
 
위니컷은 그의 논문, ‘The Capacity of Being Alone, 혼자 있을 능력 (1958)’에서 이렇게 말한다. - “그것은 만족스러운 성교 후에 각자가 서로 떨어져 혼자 흐뭇해 하는 것이라 해도 무방하다. 상대와 함께 있으면서 혼자일 수 있는 것을 즐기는 일은 그 자체로서 정신건강에 좋은 것이다. 본능적 긴장감의 부재가 불안을 조성할 수 있지만, 시간의 도움으로 마음에 균형이 잡히고, 다시 그 본능적 긴장감이 자연스럽게 되돌아오기를 기다리면서 고독을 공유한다. 말하자면, 고독이 ‘현실도피’의 속성에서 대부분 해방되는 것이다.”
 
아이러니컬하다. 상대 옆에서 흐뭇하게 고독을 즐길 수 있는 능력이. 상대의 유재(有在) 상태에서 그와 떨어져 있는 안위(安慰)가. 이때 상대는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무의식적으로 생존하는 어머니와의 기억이다.
 
고대영어에서 ‘alone’은 13세기에 ‘all one, 모두 하나, 완전히 하나’라는 중립적인 뜻이었다. ‘lonely, 고독한’이라는 감성적 뉘앙스는 16세기에 생겨났다. 독립심이 강한 옛날 서구인들은 크게 외로워하지 않으면서 살았는지도 몰라.
 
‘웃통을 벗어 던지고’라는 제목으로 오래전 쓴 산문시 일부를 소개한다. ‘사이’라는 말이 6번이나 나온다./ 겨울과 봄 사이에 증세가 악화됐어… 커다란 달 덩어리가 나뭇가지 사이에 걸려있구나… 시간과 시간 사이에 찡겨서 빼도 박도 못하면서…// 꿈의 안과 밖 사이를 과도기 현상이라 부른대 오늘과 내일 사이를 파고드는 환상… 생각과 생각 사이를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다/
 
이어령 석학과 20년 전에 만나서 위니컷 이야기를 나눴고 11년 전에 겨울과 봄 ‘사이’를 운운한 그때부터 지금 사이에 나는 무엇을 했는가 하는 질문 반, 상념 반에 잠긴다. 다시 봄이다.

서량 / 시인·정신과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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