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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봄은 향기로 온다

이기희

이기희

옷장을 정리한다. 두툼한 겨울 옷을 뒤로 밀고 산뜻하고 밝은 옷을 앞쪽으로 건다. 봄맞이 준비를 한다. 그동안 너무 움츠리고 살았다. 중서부의 겨울은 길고 춥다. 폭설이 내린 며칠을 빼고는 지구 온난화로 예전보다 날씨가 훨씬 덜 추웠는데도 하루하루 살얼음 딛듯 움츠리고 산다. ‘겨울’이라는 계절의 이름에 눌려 목도리 둘둘 감고 중무장하고 에스키모 사람들처럼 지낸다. 마음이 추워서 일까. 꽁꽁 얼어붙은 북해처럼 빙하 속을 떠돌며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지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안 일어난다. 마스크 벗을 용기도 없어 친구도 안 만나고 고립무원, 고독을 씹으며 유배생활을 자처했다. 의미 없이 갇혀 산 날들. 정지된 시간은 고장 난 벽시계처럼 삶의 곳곳에 또아리 틀었다. 뭔가 나쁜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불안감, 폭설로 집이 무너지고 소통이 끊어질 것 같은 위기감. 전화벨이 울리면 누가 또 아픈가 죽었나 놀라 가슴이 두근거린다.
 
이어령 선생님 별세하셨다는 소식 듣고 인터넷에 들어가 스승님과 선배, 그리운 분들의 이름을 검색한다. 다행히 모두 살아계신다. 애들 돌잔치. 졸업식, 결혼식 초대 받아 가던 때가 어제 같은데 이제 죽음을 검색하다니.
 
다시 사랑하고 품고 껴안고 함박꽃 웃음 날리며 살 수 있을까. 죽음이 아니라 생을 찬미하고, 작별이 아닌 만남을 기다리고, 슬픔 대신 별사탕처럼 달콤한 기쁨이 밤하늘을 수놓던, 너와 나의 일상에 작은 꽃망울로 터지는, 그런 행복한 날들이 남아 있기나 하는 것일까.  
 


작가는 꿈꾸듯 흐느끼며 언어의 마술 소리를 적고, 화가는 무지개의 색깔로 꽃향기와 목마른 잎을 화폭에 담고, 바이올린의 현이 울릴 때마다 생명이 태어나는, 피아노 건반이 높낮이로 출렁일 때 생과 죽음이 하나 되는 오케스트라 연주를 들을 수 있는 날들이 내일 속에 있을까.
겨울이 떠나가기도 전에 서둘러 봄 맞을 채비를 한다. 기다림의 시간을 아름답다. 길어도 길지 않다. 사랑은 추워도 따스하다. 시간은 번개처럼 지나가지만 사랑의 향기는 가을 저녁 마지막 모닥불이 꺼질 때까지 방울소리로 남아있다.
 
봄을 마냥 기다리지 않겠다. 두 손 놓고 하늘만 쳐다보고 한숨 짓지 않을 테다. 무거운 외투 벗고 시집가는 각시처럼 꽃단장 하고 봄을 맞을 생각을 한다. 어둡고 아픈 기억 지우고 아득한 사랑, 새로운 만남을 찿아나선다. 기억의 창고에 숨겨둔 보석보다 아름다운 말들로 한땀 한땀 수놓듯 적으리라. 계절은 스쳐 지나가는 슬픈 시간이 아니라 비슬산 중턱을 쓰다듬고 피어나는 찔레꽃 향기로, 낙동강 구비구비 돌아 긴 행렬로 서있던 플라타너스 사이 모래알로 반짝일 테니.
 
무기력은 영혼을 갉아먹는다. 봄은 등 푸른 민물고기처럼 창공으로 튀어올라 생의 목줄을 풀어 주리니. 사랑은 약속이다. 돌아오지 않아도 참고 기다리는 믿음이다. 청춘이 사라진 벌판에서 기다림은 참혹하지만 작은 성냥불을 지핀다.
 
봄은 향기로 온다. 먼 발자국 소리로, 비 오는 날 창 밖에서 작은 흐느낌으로 온다. 봄이 오면 눈부시게 하얀 산딸나무와 핏빛 아젤리아를 심을 작정을 한다. 제일 먼저 핀 꽃 꺾어 머리에 꽂고 사랑을 준비하리라. 혼자라도 잘 삭은 와인을 목이 긴 잔에 붓고 가지에서 떨어지는 다람쥐 보며 까르르 웃으리라. 겨울은 멈춤의 시간이 아니다. 봄을 잉태하기 위한 인고의 날들이다. 삭풍 몰아쳐도 목숨줄 놓지 않는 겨울나무처럼, 버티며 사는 시간 속에 봄은 향기로 온다. (Q7 Fine Art 대표, 작가)
 

이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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