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 기고] 오(조)봉완 사도 세자의 죽음
조선(1392-1910) 역사 중, 명성 황후(1851-1895) 시해 사건 외 제일 애절하게 생각하는 일이 사도세자의 죽음이다. 정조대왕(명, 산; 1752-1800; 통치, 1776-1800)은 11살 때 아버지(사도세자; 장조; 명, 선; 1735-1762)가 잔인한 죽음을 당하는 모습을 목격한다. 존경하며 애총 받던 할아버지 영조대왕(1694-1776)의 어명에 의해서 아버지가 죽게 되었으니, 어린 아이가 어떻게 이해했으며 그의 마음은 얼마나 아팠을까 가끔 생각한다. 그 아이는 모든 것을 다 기억하나 원인은 모를 수 있겠다고도 짐작한다.
그는 부친이 타계한 직후 11살짜리의 친필로 부친에게 효도할 것을 맹세한다. 성인이 되어 즉위한 후, 어렸을 때의 맹세를 수행한다. 조선조 역사상 드문 대공사로 수원에 거대한 화성을 짖고 한강에 80척의 배를 이어 임시 다리를 놓고, 아버지의 유골을 이장한다. 이것은 유명한 능행도로 역력히 보여 주고 있다. 세손인 이산은 “죄인의 아들”이라고 모욕을 당하며, 그의 정통성에 협박 당하고, 즉위 가능성에도 도전 당한다. 하나, 젊은 세손은 아버지를 옹호하며, 자기가 “사도세자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서슴치 않고 공개한다.
사도세자는 영조 대왕이 오랫동안 기다렸던 둘째 아들로 영조가 42세인 1735년에 창경궁에서 부왕이 친히 출산 장면을 지켜보던 중 태어났다. 영조의 장자인 효장세자가 일찍 사망하였으므로 영조는 둘째 아들을 많이 기다렸었다. 선이라 이름 짓고, 생후 1년 만에 원자로 책봉했으며 그의 영특함을 기뻐하고 총애했다. 영조 25년(1749)에는 15살인 선을 대리청정까지 시켰으나, 영조의 아들에 대한 호감은 지속되지 못했다.
전통적 세자 교육이 깊어 가면서, 선의 재능은 전통적 유교 정전과 조선조 경전 외에 있었다. 그는 어쩌면, 시대에 앞선 사람인지 모른다. 그의 생각은 경화된 기존 사상 밖에 치중했다. 경전 공부보다는, 불법인 서민 작의 언문으로 쓰인 책을 모아 서고를 마련하고 일반인에게 빌려주는 일을 스스로 했고, 그림 그리는 것에 몰두해, 부친 영조의 분노와 책망이 끝이지 않았다. 당시 득세 했던 노론 정치인들은 왕세자를 비판하고 폐위시키려는 노력에 몰두했다. 성숙 과정에 있던 세자는 자기의 분노를 억누르다 견디지 못하면 폭발하고 살인을 포함한 폭행을 자주 범한다. 이로 인하여 세자가 광증에 걸렸다는 소문이 난다. 그의 부인이며, 정조의 모친인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도 이것을 인정한다.
영조의 의심을 심각하게 한 것은 왕세자 선은 무기 향상에 관심이 있었다. 무예도보통지라는 책을 엮었다. 후에 그의 아들 정조대왕에게 도움이 됐다는 책인데 문과에 치중한 부친 영조의 호감을 사는 데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선의 무기에 대한 관심은 노론 정치인의 왜곡으로 왕에게 보고돼 의심을 사고, 역모로 간주된다. 부자 관계는 악화되어 영조의 아들에 대한 학대는 심해지고, 아들의 부친에 대한 공포는 늘어 나 두 사람은 대면을 안 한다.
결국, 왕세자 이선은 극도의 광증, 부자 관계의 악화, 당쟁의 격화 등 여러 가지 상황의 종합으로 1762에 27세라는 젊은 나이로 부친의 명으로 뒤주에 갇히게 된다. 영조는 왕족의 피를 흘리게 하면 안 된다는 전통을 지키려고 질식하여 죽이는 방법을 강구한 것이다. 그는 8일 후, 7월 12일 삼복 여름에 뒤주 안에서 죽는다. 11살의 그의 아들, 세손 산은 몇 번이나, 아버지에게 몰래 물을 가지고 가나, 들키고 금지 당한다. 그 아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하염없이 울며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사학 박사, 조지타운대학 명예교수(은퇴)]
오(조)봉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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