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삶의 '한 음절' 액센트
“1년 중 한 음절인 하루생일이나 결혼기념일에
액센트를 주지 않는다면
소통이 단절된다
그날에 액센트가 없으면
내 마음 아니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1975년, LA에 이민 와서 첫 아파트를 구했다. ‘가스 계좌’를 열기 위하여 ‘남가주 가스회사’를 찾아 나섰다. 전화 한 통화로 개설할 수 있는 것을 왜 직접 회사까지 찾아갔는지 기억이 없다. 아마도 서툰 영어로 통화할 자신이 없어서 그랬으리라.
바쁜 이민 생활의 톱니바퀴에 물려있는 친구의 도움을 받기 쉽지 않았다. 다행히 이민 준비 과정 중, 한국에서 미국 현지 생활 전반에 걸친 2주 기본 교육을 학원에서 받고 왔다. 그 정보를 믿고 혼자 힘으로 한 가지씩 일을 처리해 나가고 있었다.
찾고자 하는 주소는 ‘321 South Hill Street’이었다. 시내버스를 타고 다운타운에 내렸다. 건널목을 몇 개 지나도 ‘Hill Street’를 찾을 수 없었다. 바삐 지나가는 노신사 한 분을 불러 세우고 물었다.
“웨얼 이즈 힐 스트리트(Where is Hill Street)?”
“What?”
“힐 스트리트”, 한 자 한 자 띄어서 다시 말했다. “힐·스·트·리· 트”
“What?”
짧은 두 단어인데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한다. 종이쪽지를 꺼내 펜으로 적었다. ‘hill street’ 그러자 “오오! 히얼 스트리트” 하며 미소 짓는다.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뭐라고 한다. ‘go’란 말만 알아듣겠다. 조금만 그대로 더 가라는 뜻인 것 같았다.
너무도 황당했다. 간단한 단어 ‘hill’을 알아듣지 못하는 영어로 말하고 있음을 알았다. ‘L’ 발음이 어려운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보다는 ‘I’에 액센트를 주어야 함을 몰랐다. 영어에 액센트가 중요하다는 것은 중학교 때 영어 공부를 시작하면서부터 배웠다. 그러나 한 음절로 된 단어에 액센트를 붙여야 하는 줄은 몰랐다. 한 음절로 된 단어일지라도 거기에 액센트를 주어야만 영어 발음이 되고 상대방이 알아들을 수 있었다.
이제야 알겠다. 내가 말하는 영어를 저들이 왜 알아듣지 못하는지를. 영어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한글로 읽는 것이리라. 종이에 우리말로 옮겨 적을 수 있는 영어 발음은 한글이지, 영어가 아니지 않는가.
이들 언어는 한 음절 단어에도 액센트를 사용해야 한다. 그래야 소통이 가능하다. 우리의 삶을 생각해 본다. 1년이 아니라, 한 달이 아니라, 오늘 하루, 지금 이 시각, 이 순간에 액센트를 주는 삶.
이러한 삶이 우리를 풍요롭게 만들고 서로 소통하게 하지 않는가.
부부 사이에서도 그렇다. 1년 365일, 그중 한 음절인 하루. 생일이나 결혼기념일에 액센트를 주지 않는다면, 소통이 단절된다. 그날에 액센트가 없으면 내 마음 아니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TV에 밸런타인데이 세일 광고가 한창이다. 어느 젊은 목사님 옛 이야기가 떠 오른다. 어느 해 밸런타인데이, 사역으로 바삐 하루를 보내다가 허둥지둥 저녁 8시가 지나서 집에 도착했다.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던 아내가 지친 얼굴로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없이 빈손으로 문턱에 들어서는 그를 몰아세웠다. 아차 싶어 그는 그 길로 장미 한 송이라도 사러 어두운 밤길을 헤맸다. 결국 빈손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참담한 심정을 이야기했다.
특별한 날뿐만 아니라, 주변의 작은 것들도 한 음절 단어다. 아침에 눈을 떴다는 것. 양치질을 할 수 있다는 것. 창문을 열고 봄 내음을 느낀다는 것. 보도에 깨진 콘크리트를 비집고 올라오는 이름 모를 잡초를 눈여겨본다는 것. 이런 단조로운 일상에도 액센트를 준다면, 음미하고 기뻐한다면, 나의 삶은 더 좋고 즐거운 것을 끌어당겨 올 것이다. 누군가 이런 것을 ‘끌어당김의 법칙’이라고 했던가. 더 활기차고, 의미 있고, 재미있는 삶이 된다고 말이다.
나도 늦기 전에 장미 한 다발, 초콜릿 한 상자 준비해야겠다. 예쁜 카드에 ‘사랑해요’라고 액센트를 더해 볼거나.
이주혁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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