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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나의 사랑, 나의 몽당

신호철

신호철

나의 사랑, 나의 몽당  
 
 
깎아지고, 부러지고, 닳아지고
몽땅 사라지고 남은 몽당
 
 
모양이 왜 그래
그래 내 모양이 좀 그래
인생이 그래
 
 
누군가 흔들어야 깨어날
짧아진 몽당
 
 
손에 잡히지 않는  
나무와 나무 사이로
밤은 내리고 아침이 핀다
겨울과 봄 사이
수천의 생명이 꿈틀거리고
사라진 길이만큼 패이고 깎인
구불한 흔적을 벗는다
 
 
간이역에서 기차를 탄다
차창 따라오는 풍경에  
시선을 빼앗긴 사라진 시간
낯선 간이역에 기차는 서고
몇은 내리고 몇은 탄다
여행 같은 삶, 삶 같은 여행
나타남과 사라짐 사이로
벌써 끝자락, 몽당
 
 
빛 바랜 활동사진처럼
인생이 왜 그래
인생이 그래, 그런 거야
 
 
엄지와 인지를 모아 세운다
깃털같이 가벼워져
이젠 날아갈 날도 되었지  
버려진 것은 하나도 없지
세상 어느 구석
삶의 어느 순간 스며
석양을 몰고 간 밤 하늘처럼
푸르고 푸른 색 가득 반짝이다
사라진 삶의 메타포처럼
몽땅 사라지고 남은 몽당
온 몸을 하늘로 불 사른  
나의 사랑, 나의 몽당이여
 
 
 
 
서랍을 정리하다 몽당연필 한 자루를 발견했다. 까만색 4B Tombow 미술 연필이다. 거의 집을 수 없는 작은 연필 끝에 볼펜 자루를 끼워 그 기능을 겨우 유지할 수 있는 그야말로 작은 몽당연필이다. 한 뼘이나 될 길이가 깎이고 닳아져 엄지와 검지로 간신히 집을 만큼이나 작아졌다. 수 없이 많은 밑그림을 그렸고 숨겨진 모양과 명암을 그리며 소중히 사용했던 손 때 묻은 연필이다. 그림의 시작은 밑그림부터 시작되기에 이 연필은 그림의 시작이었고, 아이디어의 사유였고, 그림의 구성이었다. 깎이고, 부러지고, 닳아버린 모든 길이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어딘가에 그림의 뼈대로, 요소로 남아 있음을 믿고 싶다. 지금은 작고 쓸 모 없는 몽당연필 이지만 닳아 없어진 길이만큼 감당한 그의 존재는 귀하지 아니할 수 없다.
 
연로하신 어르신들을 만나러 가끔 양로원을 방문한다. 지금은 기력도 몸도 쇠하셔서 휠체어에 의지하시는 몸이 되었지만 그분들을 뵐 때마다 존경과 감사의 마음이 절로 나옴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자식들을 키우고 살림을 꾸리며 밤낮으로 수고하셨을 노고에 머리가 숙여진다. 주름진 얼굴이며 굽은 허리에 연약해진 모습이지만 지난 시간 남겨 놓은 아름다운 씨앗들은 세상의 곳곳에서 다시 꽃 피울 것이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우리는 기차를 기다리고, 어딘가에서 다가오는 기차의 울음에 귀를 기울인다. 기적이 울리며 서서히 간이역을 향해 다가오는 기차를 향해 우리는 짐을 꾸린다. 우리는 서로의 거리에서 다가 가기도 하지만 멀어지기도 한다. 다정해지기도 하지만 미워하기도 한다. 철로의 뻗은 방향으로 가고 있지만 결코 한 길로 만날 수는 없다. 차창에 부딪혀 오는 풍경을 바라보다가 나무와 나무 사이를 건너고 겨울과 봄을 맞이 하기도 한다. 어느 낯선 간이역에 기차가 선다. 몇몇은 굽은 허리로 내리고 몇몇은 짐을 들고 기차에 오른다. 그렇게 밤이 지나고 새벽이 온다. 여행같이 흐르는 삶은 노을을 밤하늘로 사라지게 한 삶의 메타포 아닌가. 몽땅 닳아서 사라진 시간이 지난 후 마주하는 추억이며, 그림이며, 사랑이 된 몽당이 아니겠는가. (시인, 화가)
 
 

신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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