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투시의 시대
산책하려고 집을 나서면 넓게 열린 세상을 만나기 마련이다. 주택가를 둘러싸고 이리저리 뻗은 도로들, 굵직한 시설들, 주변에 즐비한 상점들이 기다렸다는 듯 언제나 은근하다. 이곳으로 이사한 뒤 한참 동안은 건물과 길, 상가, 행인들이 겉으로만 보이더니 시간이 흐르자 내부의 구조나 장비, 사람들의 동선과 성분까지 선하다. 이래저래 직관을 넘어 투시가 되는 것이다.산책은 아무래도 한적한 둘레길이나 오솔길, 산길이 제격이다. 이름 모를 풀이나 꽃, 바위, 교목이나 관목들과 쉽게 교감하게 되며, 길과 흙 돌들 위에 떨어져 짓밟히거나 아무렇게 뒹구는 낙엽들도 유심히 보게 된다. 낙엽들은 서정적으로 애처롭게 표현되기도 하지만 수분 결핍과 변색, 움을 틔우고 청록을 펼쳤던 계절, 줄기로부터의 이별, 거름이 됐다가 생물의 일부로 환생하는 원리를 포개서 보면 전혀 다르게 보인다.
동네 뒷산 자락에 들어섰을 때 젊은 등산객 한 쌍이 도란거리며 하산하고 있었다. 외모도 세련되고, 신체의 골격과 근육의 움직임이 유연하고 자연스러워 보였다. 옆에까지 다가와 간단한 인사를 건네니 살가운 반응이 재빨리 돌아왔다. 짧은 대화를 타고 그들의 맑은 의식의 뭉치들이 전해질처럼 깜짝 전해졌다. 타인을 대하는 태도는 물론 청순한 성격이 순간적으로 느껴진 것이다.
배낭에 매달린 마스코트에서 뉴노멀 시대의 이미지도 반짝였다. 그들에게 나는 어떻게 비쳤을까? 그쪽도 외관과 말투를 단서로 나의 내면을 노크했지 싶다.
귀가 길에서 키가 작고 깡마른 노인이 둘레길로 접어드는 모습을 보자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의 산책이 불현듯 연상됐다. 칸트는 프로이센의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태어나 80평생 150km 밖으로 나가본 일이 없으면서 산책은 생애를 통틀어 두 번밖에 거르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157cm의 작달막하고 굽은 체구로 종종거리던 그 산책길에서 근대철학의 금자탑인 ‘순수이성비판’과 ‘실천이성비판’, 그리고 ‘세계 시민’을 사유했을 법하다.
그 칸트도 자못 박물관의 예스러움이 엿보이는 건 웬일인가? 날로 발전하는 과학과 소통이 인간과 사회를 근본과 골격, 살갗까지 바꾸고 있어서 옛 개념이 멀어졌다고 느껴져서 그럴까? 정보통신(IT)과 인공지능, 증강현실, 소셜미디어의 쓰나미로 혁신된 오늘날 사람들은 범람하는 지식과 정보로 사물을 깊고 정교하게 들여다본다. 내시경과 초음파는 인간의 내장을 속속들이 들여다보고, CT와 MRI로 신경과 뇌의 기능을 세세히 관측하게 되었다.
인간의 본질이야 아직도 지구촌의 기저에 여전하지만 인간의 진화는, 통찰력은 어디까지 튈지 모르겠다. 그 촉수의 끝에서 투시주의가 어른거린다. 신인류는 가속이 붙은 과학과 예술이 쏟아내는 지식과 정보, 새로운 경향을 솜처럼 빨아들이고 체화(體化)한다. 그 풍부한 상식으로 날카로운 감각과 심안(心眼)을 길러 사물과 상대를 예리하고 깊숙이 꿰뚫어 보는 현상이 놀랍다. 시력은 날로 향상될 것이며, 투시(Clairvoyance)의 포착력과 예지력이 시대를 투명하게 하리라.
송장길 /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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