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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광장] 설날 전야

명절이 오면 종갓집 6간 대청마루에는 돗자리가 깔리고 60촉 알 전구에 불이 켜집니다. 앞집, 옆집 새댁들과 어머니의 사촌, 육촌, 팔촌 동서들이 내일의 차례 준비를 위해 일찌감치 아이들을 재촉해 이른 저녁을 마무리하고 하나 둘씩 큰집으로 모여듭니다. 대청마루에는 석유난로가 피워지고 구석구석의 소쿠리와 나무 동이 속에는 온갖 나물거리가 풍성합니다. 시루떡에 쪄낼 팥고물과 인절미에 묻힐 콩고물 등 각종 음식재료들이 즐비하고, 한 구석에는 감, 밤, 은행, 대추 등 실과들이 그득하게 쌓여 있습니다.
 
일가붙이 아주머니와 형님과 아우, 새댁들은 약속이나 한듯 일제히 소매 깃을 걷어올리고 내일의 설날 차례에 쓸 음식들을 한 소쿠리씩 날라 와서는 빚고 다듬습니다. 밤이 새도록 정담을 나누다보니 온 대청이 날아갈 듯 청아한 웃음소리 또한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런가 하면 대청과 마주한 장지문 안쪽 방에서는 이제 봄이 오면 읍내로 시집갈 막내 고모가 아랫목에 다소곳이 앉아 수틀에 천을 끼어 수를 놓고 있습니다. 고모의 수틀 속에는 나비가 날고 새들이 지저귀고 있었습니다. 시어머니 될 분에게 드릴 베개포를 만든다고 했습니다. 문득 기왓골 처마를 이고 아스라하게 떠있는 앞산 머리 산모퉁이에서 기적 소리가 꿈결처럼 들려옵니다. 그럴라치면 고모는 왠지 마음이 허전하다고 잠깐 일손을 놓고는 공연히 눈시울을 붉히곤 했습니다.  
 
그때 어린 나는 내일 차례에 쓸 술을 거를 때 엄마 옆에서 몇 움큼 집어먹은 술지게미 덕분에 얼굴이 벌게진 채 고모 곁에 드러누워 해사한 그녀의 얼굴을 올려다보고 있었습니다. 어쩐지 마음이 허전하다는 그녀의 한숨에 나 역시 괜스레 그녀가 가엾어져서 가슴이 아리곤 하였습니다.
 
설날이 내일입니다. 우리 민족의 대 명절이지요. 본국에서는 벌써부터 온 나라가 들떠 고향 가는 길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요즘의 정치판이 아무리 짜증난다 하더라도 그날은 얼굴을 찌푸리기 보다는, 단지 정겨운 명절이라는 연유로 모두가 웃고 덕담으로 맞이하고 또 보낼 것입니다.  
 
하지만 고국을 떠나 만리 이국에서 맞는 설날은 마음이 그리 넉넉한 그런 명절은 아닌 듯합니다. 메마른 이국에서 혼자 사시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외롭고 쓸쓸한 사연들을 듣노라면 가슴속이 저릿해지곤 합니다. 차 한 잔을 놓고  베란다 의자에 앉아 가만히 생각을 모아봅니다.  
 
지금의 그분들은 어찌 보면 마치 내 어린 시절의 고모나 삼촌 같기도 하고 또는 모두가 그때의 섣달 그믐날 밤 큰집에 모여 앉았던 앞집, 옆집 새댁들이나 아주머니, 아저씨 같은 분들일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렇듯 명절을 맞으면 그분들 가슴 속에도 역시 그때 그 시절의 추억이 떠오르지 않을까 싶어 손끝이 저려지고, 그래서 더욱 연민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제는 그 분들 뿐만 아니라 또 우리들에게도 다시는 그 시절의 정겨운 기회가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고 있기에, 창 밖에서 바라보는 하늘의 색깔이 결코 밝아 보이지가 않습니다. 찻잔을 놓고 가슴으로 바람을 맞으며 중얼거립니다.
 
“하느님, 우리들 가슴 속에 그 시절 그 모습이 혹 그대로 머물러 있을 수만 있다면, 제발 우리가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 이 메마른 영혼들에게 다시 한 번 촉촉한 안식을 갖게 해주실 수는 없으신지요.”

손용상 / 소설가·한솔문학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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