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비, 비 때문이야
“입금 카드를 꺼내려는데ATM 옆 움푹한 구석에
한 남자가 서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허술한 차림이
은행 손님 같지는 않고
노숙자인가 싶었다”
아침부터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다. 지난해 말부터 수시로 내리는 비다. 몇 달간 자주 쏟아진 폭우로 산사태가 나고 홍수가 나고 사람이 죽기도 했다. 8년간이나 지속된 남가주의 가뭄이 해소된다며 흡족해 하던 게 언제냐 싶게 여기저기 폭우 피해가 넘쳐나고 있다.
빗살이 좀 뜸해졌다. 아무래도 지금 은행에 가 세입자들한테 받은 체크를 입금해야 할 것 같다. 은행입금이야 언제 한들 무슨 상관이랴만 매달 내야하는 융자금 때문에 월 초순에는 통장에 돈이 좀 넉넉히 들어있어야 한다.
한번 결정하면 늘어 빼지 못해 바로 은행으로 향했다.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지갑에서 입금카드를 꺼냈다. ATM 입금은 은행 안으로 들어갈 필요가 없어 좋다. 하긴 요즘 누가 은행까지 가기니 하나. 셀폰에 깔린 앱으로 처리해 버린다. 그러나 나는 은행 입금은 앱을 쓰지 않는다. 내 비밀번호가 해킹을 당한 적이 있어서다.
다시 빗줄기가 굵어진다. 우산을 펼까하다가 금방이면 된다는 생각에 손으로 머리를 가리며 파란불이 반짝반짝하는 ATM 앞으로 재빠르게 뛰어갔다. 막 입금 카드를 꺼내려는 순간 ATM 옆 움푹한 구석에 한 남자가 서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허술한 차림이 은행 손님 같지는 않고 노숙자인가 싶었다.
나는 연신 그 남자가 마음에 걸려 수표를 꺼낼지 말지 망설였다. 그러나 이 동네에 40년 가까이 살면서 험한 일을 당해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었다. 또 우리 동네는 안전한 곳이고 더구나 대낮이었다. 나는 4장의 수표를 꺼내 뒷면에 사인을 한 뒤 입금카드를 꽂고 비밀 번호를 꼭꼭 눌렀다. 그러면 스크린에서는 돈을 찾을지 입금할지 밸런스를 확인할지 등등 몇 가지 질문을 하곤 했다. 나는 입금 외에 필요한 것이 없어 한 번도 그 질문 내용을 끝까지 읽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ATM이 ‘페이먼트를 할래? 돈을 쓸래?’ 하고 물었다.
“뭐야, 정신 나갔나? 입금이야 입금.”
나는 신경질적으로 카드를 뽑았다가 다시 꽂았다. ATM은 또 같은 질문을 했다. 비는 수돗물처럼 쏟아지고 또 홍수가 날 것 같았다. 나는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며 내 뺨을 두어 번 톡톡 때렸다.
‘비가 오니 기계도 머리가 도나 봐’ 나는 카드를 빼서 번호와 계약기간을 확인한 뒤 카드를 기계에 조심스럽게 천천히 꽂았다. ATM은 앵무새처럼 같은 질문을 되풀이했다. 몇 번 더 시도를 했지만 대답은 똑 같았다. 이런 융통성 없는 미련퉁이. 나는 기계를 주먹으로 꽝 때렸다. 내 주먹이 부서질 듯 화끈거렸다.
할 수 없이 은행 안으로 들어갔다. 창구 앞에는 긴 줄이 서 있었다. 창구는 두 곳만 열고 있었다. 손님이 이렇게 많은데 왜 두 곳만? 닫힌 창구를 보며 자꾸만 심술이 차올랐다. 다 열어도 창구는 셋뿐이다. 문득 옛날에는 창구가 다섯이었다는 기억이 떠올랐다. 이 은행에 고객이 된 지도 벌써 35년째다. 강산이 세 번이나 변하고도 넘는 세월, 그동안 은행은 나한테 뭘 해줬나. 내가 집을 살 때 융자를 해 준 것도 아니고 저축한 돈도 쥐꼬리보다 못한 이자, 아니 이자를 거의 주지 않았다. 마냥 섭섭한 마음이 뭉게구름처럼 차올랐다.
1년 전, 고객들에게 대단한 불편을 주며 개축을 하더니 오히려 창구 둘을 줄인 것이다. 그 긴 시간과 많은 투자에 비해 손님의 대한 서비스는 축소돼 버렸다. 창구를 줄였으면 직원들이 일이라도 빨리 해야지, 달팽이처럼 움직이는 창구 직원들이 못마땅했다. 한참 기다린 끝에 결국 나는 두 번째 차례가 되었다.
그때였다. 어머, 내 가방? 내 백팩과 차 키, 모두 차 안에 있다. 차문도 잠그지 않은 채. 나는 굴러 떨어지는 돌멩이처럼 은행 문을 차고 나왔다. 짙은 안개 속에 비는 우박처럼 쏟아지고 천둥이 우르르 꽝꽝 내 머리 위에다 번갯불을 지져댔다. 그때 ATM 옆에 서 있던 그 남자가 내 차를 지나 옆 골목으로 빠지고 있었다.
‘어머, 내 가방? 도둑 맞았구나.’ 나는 왼쪽 골목으로 빠지고 있는 그 남자를 죽어라 쫓아가 불러 세웠다. 그 남자가 나를 돌아보았다. 그의 손엔 아무 것도 들려있지 않았다. 아, 미안합니다. 혹시 저 남자가 내 지갑만 챙겼을 수도 있는데. 그 짧은 순간에도 나는 그에 대한 의심을 풀지 못한 채 내 차로 돌아와 얼른 차 문을 열었다. 입을 헤벌린 채 나를 쳐다보는 백팩과 그 밑에 깔린 지갑과 차 키. 내가 돌았나? 왜 이러지.
가방을 메고 다시 은행 안으로 들어갔다. 창구 앞에는 여전히 긴 줄이 서 있었다. 결국 내 차례가 되었다. 창구 직원이 뭘 도와 드릴까요 하고 상냥하게 물었다.
“밖에 ATM 작동 안 해요.” 고장난 기계가 텔러의 탓인 듯 나는 그녀 앞으로 카드를 툭 던지며 볼멘소리로 내뱉었다. 내 카드와 넉 장의 수표를 받아든 텔러. 외계인을 보듯 나를 쳐다보고 웃으며 무엇을 하시려고요? 하고 물었다.
“입금.” 나는 여전히 퉁퉁 부르튼 말투로 반말조로 대답을 했다.
“이건 크레딧 카드예요 손님, 크레딧 카드라 입금이 안 된 거예요. 입금은 데빗카드라야 해요.”
“네? 오 마이 갓!” 입금을 마치고 은행 문을 나오며 하늘을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수백 번 넘게 써온 데빗카드 색깔마저 극과 극인 파란 색의 크레딧 카드, 빨간색의 데빗 카드.
비는 억세게 내리고 있었다. 저만치 그 허술한 차림의 남자가 걸어가고 있었다. 옆으로 스쳐가는 나를 보며 그가 중얼거리는 것 같았다. 내게도 봄날이 있었지. 보이는 것이 세상의 전부는 아니야.
네, 나도 알아요. 이건 비, 비 때문이에요.
임지나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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