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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김치별곡

“김치가 맛을 내려면  
숙성의 시간이 필요하듯  

팬데믹의 세월, 버티며  

성찰하며 반성하며  

성숙하게 살아내며  

다시 새로운 삶으로  

태어나야 할 것 같다”



 
오미크론의 기세가 등등하게 확산하고 있다. 숨죽이며 살아낸 2년 넘는 그 힘들고 지루한 시절도 모자랐는지 ‘외출 자제’ 명령이 내려졌다. 하여 어제 마켓에 가 조금 넉넉한 장을 보며 김칫거리와 배추를 사왔다.
 
장보기를 거들던 남편은 힘들게 김치는 왜 담그냐 그냥 사 먹지 하며 미안한 잔소리를 했다.  
 
한 귀로 듣고 흘려 보내며 마음 속으로 나 스스로에게 다짐한다. 여보세요 김치 담그기는 내 가족을 살리는 살림살이요 내 삶의 한 조각이랍니다. 나에게 주신 귀하고 아름다운 사명이지요.
 
아침 일찍 일어나 어제 밤에 절여 놓은 배추를 씻었다. 배추는 낭창낭창 잘 절여져 씻어 주기를 기다린 듯 흐르는 물에 날개를 펴고 춤을 추었다. 그 뻣뻣한 몸통을 칼로 두 쪽 내어 일단 소금물에 잠수시켜 숨을 죽인 후 다시 켜켜이 천일염을 솔솔 뿌려준 뒤 몇 시간 잠을 재웠다. 적당히 잘 절여진 김치의 주인공 배추는 이제 정갈하게 씻고 소쿠리에 다소곳이 담겨져 나를 바라보고 있다
 
사람도 기가 세어 너무 빳빳하면 섞여 살기가 힘들 듯이 잘 절여지지 않은 배춧잎은 떼어 따로 놓았다. 나 홀로 공주 노릇 실컷 하렴, 나중에 기 센 것들만 모아서 겉절이 만들면 너희끼리 서로 기 죽이며 버무려지며 풋것들의 아삭아삭한 맛으로 변신하겠지.
 
김치 양념을 준비한다. 부드럽고 하얀 찹쌀풀, 다져놓은 마늘과 생강, 짭짤하고 감칠맛 나는 젓국, 색깔 고운 매운 고춧가루, 달달하고 시원한 배, 알싸한 갓과 싱싱한 쪽파, 썰어 놓은 무채, 각각의 고유한 맛을 지닌 그것들을 살근살근 버무린다. 김치 양념 특유의 냄새가 맛있게 났다. 각각의 재료들이 잘 어우러져 나는 맛의 향기다.  
 
어릴 적 김장하는 날 학교에서 돌아오면 집안에서 났던 고소하고 매콤한 김치 냄새가 생각난다. 하얀 광목 앞치마를 입은 엄마가 양념 묻은 배추 한 잎 돌돌 말아 입에 넣어 주신 그 맛을 잊을 수가 없다. 김치는 바로 그리운 고향의 향기요 정겨운 고향의 맛이다. 그래서 40년 넘는 타향살이에 고향을 가슴에 담고 이렇게 김치의 근성으로 버티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하루 세 끼 중 아침 한 끼만 빵과 커피이지 두 끼는 한식이기에 김치와 깍두기는 식탁의 단골 메뉴다. 어머니의 김치 맛이 우리 자매들에게 전해졌는지 뉴욕에 사는 아들도 할머니, 엄마, 이모의 김치 맛이 똑 같다고 감탄하며 나에게 전화를 했다. 이렇게 조상들의 음식 문화가 맛으로 전수되고 있나 보다.
 
소금이 배추의 속살에 스며들어 짠맛을 나누며 부드러워지고 잘 혼합된 양념을 받아 들여 긴 숙성의 시간을 기다려 김치가 만들어진다. 마치 나 혼자가 아니라 우리가 함께 어울어져 공들인 그 무엇이 세워지듯 그렇게 깊은 맛 나는 김치가 정성과 기다림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김치는 된장, 고추장, 젓갈과 함께 우리 조상들이 남겨 주신 먹거리 유산, 기다림의 미학이다. 김치가 맛을 내려면 숙성의 시간이 필요하듯 이 팬데믹의 세월, 버티며 성찰하며 반성하며 성숙하게 살아내며 다시 새로운 삶으로 태어나야 할 것 같다.
 
배춧잎 켜켜에 양념으로 채우고 마지막 큰 잎사귀로 배추의 몸통을 돌아 싸주며 김치통에 차곡차곡 담는다. 마치 강보에 싸인 아기처럼 어미의 손길로 배춧잎에 싸여 오롯이 줄 지어 누워있는 김치의 모습이 평화롭기도 하다.
 
이제 푹 깊은 잠을 자거라. 맛난 냄새가 나면 너를 깨우리라. 선잠을 자면 풋내가 나니 제발 깨지 말아다오. 숨 죽이며 숨을 쉬며 살아내거라 맛이 완성되는 그날까지. 오늘 담근 김치는 성공할 것 같다. 배추에게 내 마음을 들켜버려서. 오미크론의 부담도 털어 버리자. 김치에게서 한 수 배웠으니까.
 
김치가 담긴 커다란 김치통을 바라보니 창고에 양식을 가득 채운 부자가 된 듯 신명이 난다. 살으리 살으리랏다 라성에 살으리랏다. 김치랑 깍두기 먹고 라성에 살으리랏다. 얄리얄리 얄라성 얄라리 얄라.

라진숙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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