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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읽기] 눈보라와 무공용

 최근에 제주에도 한파가 몰아쳤다. 눈보라도 연일 쳤다. 세상이 겨울 들판 같았다. 눈보라가 칠 때에는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세찼다. 그것은 마치 바닷물이 제방을 넘어서 흐르는 월파(越波) 같았다. 눈보라 뒤에는 또 눈보라가 따라왔다. 나는 언젠가 아득하게 너른 들판을 지나가는 눈보라를 한참을 바라보았던 때가 있었다.
 
눈보라에 대한 느낌은 졸시 ‘눈보라’를 통해서도 쓴 적이 있다. “들판에서 눈보라를 만나 눈보라를 보내네/ 시외버스 가듯 가는 눈보라/ 한 편의 이야기 같은 눈보라/ 이 넓이여, 펼친 넓이여/ 누군가의 가슴속 같은 넓이여/ 헝클어진 사람이 가네/ 그보다 더 고독한 사람이 가네/ 그보다 더 기다리는 사람이 가네/ 눈사람이 가네/ 눈보라 뒤에 눈보라가 가네”라고 썼다. 정말이지 눈보라는 앞뒤 사정이 많은 한 사람의, 신산한 세상살이 같기도 하고, 우리가 가끔 갖게 되는 쓸쓸한 내면의 풍경 같기도 하다. 눈보라는 치지만 한쪽에는 핀 꽃이 또 있어서, 눈 속에서 동백은 더 붉고 한라봉 열매는 더 샛노랗다. 쌓인 눈을 밀어내고 나면 또 눈이 와 덮였다.  
 
공터에서 엄마와 아이가 눈사람을 만드는 것을 보기도 했다. 두 개의 눈덩이를 굴려 사람 모양으로 만들어서는 귤껍질을 이용해 눈과 코와 입을 만들고, 나뭇가지를 꽂아 팔을 만들어 놓고서는 엄마와 아이가 서로를 보며 흐뭇하게 웃는 모습을 보니 나도 절로 흡족하고 내 마음이 양지처럼 밝고 따뜻해졌다.  
 
지붕에 쌓인 눈들은 처마 아래로 털썩털썩 떨어져 내리고, 그때마다 눈이 좋아 마당에 나와 뛰고 있던 강아지는 깜짝깜짝 놀라워했다. 물론 강아지는 곧 잊고 다시 흰 눈 위에 앙증맞은 발자국을 찍으며 뛰어갔다 뛰어왔지만. 처마 끝에는 고드름도 달렸다. 고드름을 얼마 만에 다시 보는 거야, 라고 나는 낮게 중얼거렸다. 눈을 치우다 몸이 지치면 툇마루에 걸터앉아 눈 오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았고, 다시 기운이 나면 또 나가서 눈을 치웠다. 눈보라가 성가시다는 생각조차 잊고서. 며칠 동안 무언가를 한다는 의식 없이 눈세상 속에서 살았는데, 밤이면 아주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잠 속으로 이처럼 빨리 깨끗하게 빠져들 수도 있는 것을 왜 대개는 혼미하게 잠이 들었는지 의아할 정도였다.
 


‘무공용(無功用)’이라는 말이 있다. 무공용은 어떠한 조작이나 작위 없이, 차별이나 분별이 없이, 물 흐르듯이 자연 그대로에 맡긴다는 뜻이다. 작고한 이승훈 시인의 유고시집을 평하면서 송준영 시인도 이 말로 이승훈 시인의 시 세계를 해석했다. 이승훈 시인의 시 가운데 ‘그저 있을 뿐이다’라는 제목의 시는 다음과 같다. “산에 붙은 것도 아니고 산에서 튀어나온 것도 아니다. 오 산사 보고 절한다. 눈이 오기 때문이다. ‘저게 산이야? 산이 아니야?’ 절 앞에서 눈발 맞으며 묻는다. 그저 있을 뿐이다. 모두 그저 있을 뿐이다.”
 
시인은 산에 갔다가 산사 앞에 이르러 묻는다. 산사는 산이라고 해야 하는지 산이 아니라고 해야 하는지를. 그러다 문득 깨닫는다. 산사는 그저 있을 뿐이라는 것을. 그냥 그곳에, 그 자체로, 그 상태 그대로 줄곧 있다는 것을. 이 시에서처럼 사물과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이 무공용의 가치를 따르는 일일 테다. 신기할 것도 없이 그대로 그렇게 모든 것은 존재하고 있는 것일 테다.
 
지금 바로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도 그저 있을 뿐이라고 생각하면 옛일에 대해서도 잊지 못하고 매달리는 일이 줄어들 것이다. 아쉬움이 남더라도 아쉬운 마음에 집착하지 않고 별문제가 없어, 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괜찮아, 그래도 괜찮아, 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내게도 한 해가 다 가니 이러하고 저러한 일들이 생각나지만, 무공용의 가치에 대하여 생각해보고선 한 해를 떠나보내 보는 것이다.

문태준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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