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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살만한 세상

“시멘트 사이로 여기저기에  
민들레꽃이 피고 지곤 한다
불안해 하는 사람들에게  
노란꽃으로 미소 짓게 하며  
희망을 보여 주었다
조금만 더 참고 견디면  
살만한 세상이 올 거라고”
 


오늘도 재미있는 주말 드라마 한 편을 보고 나서 다른 프로를 보려다 나는 ‘누죽걸산’하며 벌떡 일어났다. 남편이 친구들에게 듣고 와서 내게 전해준 말이다. 처음엔 사자성어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줄임말 신조어였다. 누우면 죽고 걸으면 산다는 말이다. 어떤 머리 좋은 사람이 또 그렇게 재미있는 말을 만들었을까 감탄하며 게으름이 찾아오면 나는 네 글자로 된 그 줄임말을 크게 외치고 남편과 한바탕 웃고 나서 걷기 위해 밖으로 나간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가을 날씨, 가로수는 어느덧 울긋 불긋 가을 단풍을 만들었다. 낙엽이 되어 밤 사이 길가에 소복히 내려 앉았다. 너무 예뻐서 밟기도 아까워 피해가며 걸었다. 항상 길가 나무 밑에 앉아서 담배만 피우고 있던 애처롭게만 보였던 옆 아파트에 사는 노파도 오늘 따라 파란 가을 하늘에 반했던지 밀차에 몸을 의지하며 걸어온다. 우리는 ‘하이’를 하며 함빡 웃으며 지나친다. 또 저만치서 나이 든 남자 분이 걸어온다. 나와 가까워지니 예의 바르게 마스크를 쓴다. 고마운 일이다. 내가 차도로 비켜가는 수고를 덜어준다. 상대가 마스크를 안 써도 잠깐 비켜가는 것은 괜찮다고 남편은 누누이 알려 주었지만 지나치게 예민한 나는 마스크를 쓰지 않는 사람이 오면 아직도 되돌아가거나 차도로 비켜간다.  
 
아! 게이트를 나와 이 쭉 곧은 길을 걸을 수 있기를 얼마나 바랐던가. 하루에 30분은 걸어야 건강을 지키는 우리가 팬데믹으로 밖에 나갈 수가 없게 되니 우리 부부는 물론 자식들까지 걱정이 대단했다.  
 
우리는 궁여지책으로 우리 타운하우스 여덟 집이 사용하는 주차장 길을 택했다. 단지 끝이어서 8가구지만 만일 단지 중간에 살았다면 16가구나 되니 엄두도 못냈을 것이다. 나는 그 길을 발견하고 너무 기뻤다. 복권에 당첨이라도 된 것처럼 기뻐서 아이들에게 알려주었다. 마음 놓고 운동할 곳이 생겼다고. 모두 잘 되었다고 했다.  
 
다행히 단지 끝이라 콘크리트 담도 돼 있고 차가 들어오지 않을 때는 게이트가 닫혀 있으니 안심하고 걸을 수 있었다. 공원에 가서 걸어도 보았다. 집에서 거리도 멀었고 사람들도 많았고 공중 화장실 가기도 무서웠다. 우리는 매일 우리 집 주차장 문을 올려 놓고 100m도 못 되는 길을 넓고 아름다운 공원을 걷는 마음으로 어깨를 활짝 펴고 늡늡하게 30분을 걸었다. 팬데믹 이전에는 거들떠 보지도 않고 부랴부랴 주차장으로 들어와 셔터를 내려버렸던 그 길이 이렇게 요긴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어린 시절 어머니의 옆자리처럼 포근하게 느껴졌다.  
 
그 안전한 길을 우리는 감사한 마음으로 걸으며 백신이 나오기를 날마다 기도했고 코로나19 때문에 만날 수도 없는 내 자식들과 손주들 그리고 가까운 사람들이 무사하기를 얼마나 빌었던가. 그 길을 걸으며 크고 좋은 것만 찾아 다녔던 지난날의 생활도 되돌아 보았다. 정말로 고마운 길이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우리를 보고 이웃집 주민들도 그곳을 이용했다. 개와 함께 걷는 이웃도 있었다. 쿵후를 하는 이웃도 있었다. 차가 들고 날 때나 다른 사람이 이용하고 있을 때는 서로 양보했다.  
 
이렇게 우리는 서로를 배려하며 좁은 공간을 유용하게 사용하였다. 두 해 동안 날마다 편하게 걸었기에 건강을 유지할 수 있었다. 사람은 자연을 통해서도 배울 것이 많다. 주차장 길은 작고 보잘 것 없고 뒤쪽에 있어 크게 눈에 띄지 않았지만 우리 부부에게는 무서운 팬데믹을 막아주는 방공호가 되어 주었다.  
 
이제는 게이트 밖으로 나올 수 있게 되었다. 가까운 수퍼도 다니게 되었다. 마스크만 쓰면 웬만한 곳은 다 다닐 수 있다. 무엇보다도 게이트를 나가 우리 동네를 한 바퀴 빙 돌 수 있게 되었다. 1km가 더 되는 길이다. 우리는 이 길을 걷기를 얼마나 바랐는지 모른다.  
 
팬데믹이 우리에게 온 깊은 뜻은 누구에겐가 고마움을 주고 이해하며 품어주는 그런 사람이 되라는 자연의 외침이 아닌가 싶다. 팬데믹으로 온 세상이 공포에 휩싸였을 때 정말 고마운 일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나라의 수장들은 자기 자식처럼 국민을 보호하고, 신문 방송은 매일 세계 돌아가는 상황을 보도 해주고, 마켓에서는 먹을 것을 배달해주고, 지인들끼리 전화나 카톡으로 용기를 주고, 과학자들은 백신을 연구하고, 그 많은 고마움을 기억할 때 나는 이 주차장 길의 고마움도 함께 기억할 것이다. 그 길에는 언제나 민들레가 하나 둘씩 피어 있다. 청소기의 강한 바람에도 육중한 차 바퀴에도 아랑곳 없이 갈라진 시멘트 사이로 여기가 아니면 저기에 민들레꽃이 피고 지곤 한다. 그들은 불안해서 마음 졸이는 사람들에게 노오란 꽃으로 미소를 짓게 하며 희망을 보여 주었다. 조금만 더 견디면 살만한 세상이 올 거라고.

이영희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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