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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기고] 환자의 실어, 정치인의 실언

정신분열증 환자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네거티브 증후군(negative symptoms)’을 생각한다. 무언, 무욕, 무관심, 무감각, 무감동, 무쾌감처럼 온통 ‘없을 無’가 들어가는 증상들로 짜여진 정서 상태다.
 
그런 ‘네거티브 증후군’으로 뒤범벅이 된 환자 여럿을 앞에 놓고 그룹 세션을 진행한다. 그들은 묵묵무언. 나는 허허한 언어공간을 메꾸기 위해 입놀림이 빨라진다. 주입식 대화가 일방적으로 펼쳐지는 월요일 오후. 시간의 속도가 느려진다.
 
그들의 눈빛을 살펴보며 알아차린다. 내가 하는 말을 그들이 얼추 다 알아듣는다는 사실을. 그들은 분명히 인지하는 눈치다. 나는 확인하려고 애를 쓴다. “데이비드, 당신은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대충 되풀이해서 말할 수 있겠어요?” 그는 좀 생각 하다가 “약이요” 하고 짧게 응답한다. 답이 틀리지 않았지만 몹시 불충분하다. 그가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않거나 좀 반항적인 태도로 “모르겠는데요”라고 말할 수도 있다는 것을 나는 문득 감지한다.
 
뇌졸중 후유증으로 일어나는 언어장애가 떠오른다. 상대가 하는 말을 알아들었지만 대답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모양새가 네거티브 증후군과 대동소이하다. 반면에 다른 사람의 말도 제대로 못 알아듣고 자신이 하는 말 또한 무슨 말인지 모르면서 막무가내로 쉼 없이 말을 이어 가는 경우도 많다. 전자는 뇌의 전두엽에 이상이 와서 언어의 표현능력 장애가 생기는 경우, 후자는 측두엽 이상으로 일어나는 의사소통 장애다. 전두엽은 이마 뒤에 있고 측두엽은 관자놀이 안쪽이다. 침묵이 금이라는 금과옥조를 생각하면 측두엽 이상보다 전두엽 장애에 더 측은지심이 솟는다.  
 
정신질환자이건 뇌졸중 환자이건 상대의 의도를 감지하는 일은 대체로 쉬운 편이지만 자신의 의사표시를 제대로 하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따지고 보면 정상인들도 마찬가지다. 감각은 생존의식과 직결되지만 언어는 삶의 필수조건 변두리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감각과 의식은 늘 바깥 쪽으로 쏠려 있다. 남을 살피는 일이 자신을 관찰하는 습관보다 훨씬 더 쉽고 자연스럽다. 남들을 지적하는 심사가 자신을 성찰하는 시간을 엄청나게 능가한다. 소크라테스의 명언 ‘너 자신을 알라’를 생각해 보면 옛날이나 지금이나 인간의 속성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남들 이기기에 전념하는 우리들이 아닌가. ‘내로남불’을 원칙으로 삼는 한국의 정치판이 특히 그렇다.
 
때로는 우호적으로 때로는 심한 논쟁에 휩쓸리며 남들과 소통하는 우리들 삶의 장(場)이 영악스럽고 살벌하지 않기를 소망하는 2021년 12월 중순이다.
 
소통을 뜻하는 단어 ‘communication’을 찾아보았다. ①의사소통 ②통신 ③연락. 싱거운 번역이지만 그중 ②번 뜻이 새롭다. ‘소식, 의지, 지식 등을 남에게 전함’ 한자로 통할 通, 믿을 信. 통신이나 소통은 쌍방의 믿음이 통해야 이루어진다. 믿음은 사람 人변에 말씀 言이 합친 말. 한 사람의 말이 조석으로 변한다면 소통은 없다.
 
무언(無言)은 과묵한 성격이거나 정신분열증의 후기증상이다. 뇌졸중 후유증으로 말을 잘 못하는 경우를 실어()라 한다. 실언(失言)은 질이 좋지 않은 정치인들이 밥 먹듯 자행하는 말 실수이다. 무언이나 실어는 용서할 수 있지만 실언은 정말로 싫다.

서량 / 시인·정신과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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