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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에] 삶은 세월에 담가야 제맛이 난다

 세상은 그렇게 혼란스러운데 세월은 천연덕스럽게 흐른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조금 수그러드는 것 같더니 델타니 오미크론이니 하는 변이 바이러스들이 우리를 위협한다. 그런데도 아침 해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능청스레 떠오르며 또 하루가 시작되고 있음을 알린다. 사람들이 아우성치는 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한 장 한 장 너무도 쉬이 넘어가던 달력은 마지막 한 장을 덩그러니 남긴 채 우리들을 향해 그동안 뭐 했냐고 비아냥댄다.  
 
코로나에 질려 사람 만나는 일도 멀리하고, 외출도 삼가고 외식도 제대로 못 하면서 시작한 한 해였다. 그나마 백신이 서둘러 개발되고, 1~2차 접종에 부스터샷까지 맞으면서 용기를 내어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 나서는 이들이 생겼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는 음식이 빠질 수 없다. 추수감사절을 맞아 칠면조 고기를 먹으면서 400년 전 청교도들이 미 대륙으로 건너와 맞이했던 첫 가을걷이의 감격을 기억하기도 했다. 연말이라고 밥 먹을 자리가 늘면서 외식을 자주 하게 된다. 미국에 산 햇수가 늘면 입맛도 적응해야 할 텐데 여전히 식탁에는 밑반찬이라도 올라와야 마음이 놓인다. 칠면조 고기를 먹을 때도, 스테이크를 썰 때도 김치 깍두기는 있어야 빡빡함을 덜 수 있다.  
 
요즘이야 덜 하지만 예전에는 이맘때가 되면 집마다 김장을 했다. 수십 포기는 기본이고 큰 살림을 하는 집에서는 수백 포기의 배추를 절이고, 무를 다듬고, 양념을 버무려서 겨우내 먹을 김치를 담갔다. 겨울이 머리를 내밀 때면 온 세상은 담그는 계절로 바뀐다. 집마다 김치를 담그고, 깍두기, 오이소박이, 동치미를 담그는 손길로 세상은 분주하게 돌아갔다.  
 
김치나 깍두기뿐 아니라 우리가 먹는 음식에는 담가 먹는 것들이 꽤 있다. 간장, 된장, 고추장을 비롯한 각종 장 종류와 젓갈, 식혜나 수정과, 과일주도 담가 먹는 음식이다. 다른 일에는 ‘빨리빨리’를 외치는 우리 민족이 음식만큼은 담가서 한참을 기다렸다 먹는다는 것도 신기할 따름이다. 담가 먹는 음식은 바로 먹을 수 없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야 제맛을 내기 때문이다. 이처럼 김치나 장, 술, 젓갈 따위를 만드는 재료를 버무리거나 물을 부어서 익거나 삭도록 그릇에 넣어 두는 조리 과정을 담근다고 한다.
 
재료를 양념이나 물에 담그는 것처럼 우리의 인생을 담그는 곳이 있다. 바로 세월이다. 담가 먹는 음식은 시간이 지나면 부드러워지고 맛도 깊어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세월에 담긴 사람의 마음은 부드러워지기는커녕 더 단단해지기만 한다. 이민생활이라는 현실에 담긴 인생은 깊은 맛은커녕 씁쓸한 맛만 더해질 때도 있다.
 
그래도 돌아보면 세월에 마냥 담겼던 것은 아닐 것이다. 올 한해 코로나19 팬데믹이라는 세월에 담겼던 인생이기에 이젠 웬만한 어려움에는 끄떡도 하지 않는 담대함을 얻었을 것이다. 가뭄이 든 해에 담근 포도주가 좋은 포도주가 된다고 한다. 가뭄으로 포도알의 굵기는 작아졌을지 모르지만, 향과 당도는 훨씬 좋아졌기 때문이다.  
 
삶은 세월에 담가야 제맛이 난다! 이제 올 한 해도 얼마 남지 않았다. 2021년이라는 쉽지 않은 세월에 담갔던 삶이기에 더욱더 깊은 맛과 아름다운 향기를 내는 인생이 되기를 기대한다.

이창민 / 목사·LA연합감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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