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산책] 전업작가 부재의 한인사회
“자투리 토막글 이제 그만 쓰고, 오래 남을 굵직한 작품 좀 쓰세요!”존경하는 선배님으로부터 호된 꾸지람을 들었다. 드릴 말씀이 없고 죄송해서 고개만 푹 숙이고 한동안 벌을 섰다.
생각해보면 참 부끄러운 일이다. 내가 쓴 희곡이 극단에서 공연되면서 극작가라고 불리기 시작한 것이 1971년이니까, 올해로 글쟁이 50년인데 자신 있게 내놓을 글이 없다는 건 매우 부끄럽고 서글픈 일이다.
되돌아보니 나는 그동안 허름한 ‘문화잡화상’을 열고 ‘생계형 글쟁이’로 살아왔다. 글을 써서 지금까지 먹고 살았고, 가정을 건사하고 아이들을 키운 셈이다. 광고문안, 신문·잡지 기사, 칼럼부터 시나 소설 같은 문학작품, 공연대본, 미술책에 이르기까지 가리지 않고 그야말로 닥치는 대로 써서 여기저기에 부지런히 발표하며 살아왔다.
그렇게 세상에 내놓은 글들을 그냥 버리기 아까워서, 형편 되는 대로 책으로 발간하다 보니 이런저런 책을 25권 넘게 펴내게 되었고, 50편의 희곡을 공연하거나 연극잡지에 발표했다.
늘 원고마감에 쫓기느라 오래 남을 묵직한 작품을 쓸 뭉텅이 시간을 가질 겨를은 아예 없는 신세였다. 그러다 보니 딱히 내세워 자랑할 만한 책도 없고 대단한 화제작도 못 낸 허름한 글쟁이가 되고 말았다.
물론 이런 것이 다 구차스러운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잘 안다. 결국은 내가 큰 글을 쓸 능력이 없고, 철저한 작가정신도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과감하게 크고 웅장한 작품을 쓰는 동료문인들을 진심으로 존경한다.
멋진 작품을 쓰겠다는 꿈을 버린 것은 아니지만 이제는 좀 늦은 것 같다. 그나마 지금까지 쉬지 않고 꾸준히 글을 쓸 수 있었던 것을 감사하고 또 감사하고 행복하게 생각한다. 하늘이 주신 복이려니 여겨 허리 꺾어 절한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나만 그런 것이 아니고 우리 미주 한인사회의 거의 모든 예술가들이 이런 척박한 환경에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작품에만 전념할 수 있는 이른바 ‘전업작가’는 정말 몇 명 안 된다.
예술로는 생계를 해결할 수 없으니, 글쟁이가 햄버거를 굽고, 화가가 마켓을 지키고, 음악가가 페인트칠을 하고, 연극인이 목수를 하고, 미술평론가가 남의 집 잔디 깎으러 다니고… 그러면서 작품을 해왔고 지금도 하고 있다.
출산, 육아, 가사를 책임져야 하고, 돈벌이까지 해야 하는 여성 예술가들의 경우는 한층 더 열악하다. 결혼을 하면 ‘경력 단절’을 피할 길이 없다.
이 사람들이 먹고 사는 걱정 없이 예술에만 전념할 수 있다면 좋은 작품이 많이 나올 텐데… 라는 생각을 하면 서글퍼서 눈물이 날 지경이다. 물론 돈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는 없겠지만….
스승 김희창 선생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어느 사람 자체가 예술일 때, 그 사람의 생활 자체가 예술일 때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것은 만들어 되는 것도 아니고 공부해 되는 것도 아니고 자신에서 우러나야 하는데, 그 위에 정신과 생활(먹고 사는 데)에 여유가 있어야 하니 얼마나 어렵습니까.”
그래서 가끔 엉뚱한 생각을 해본다. 미주 한인사회에도 이건희 회장 같은 안목 높은 후원자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르네상스 시대의 후원자 같은 화끈한 존재면 더 고맙고…. 내가 알기로는 우리 미주 한인사회에도 돈을 엄청 많이 번 진짜 부자가 적지 않다는데 길게 보면 부동산 투자보다 제대로 된 사람에게 투자하는 편이 훨씬 현명할 텐데….
하도 답답해서 해본 생계형 글쟁이의 푸념이다.
장소현 / 시인·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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