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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에] 어머니의 빈방

 담쟁이 잎들이 수런거리고 있다. 줄기를 잡고 있던 아이 손바닥 만한 잎들에 부황이 들었다. 아픈 기색이 역력한 잎은 손아귀의 힘마저 겨워 보인다. 색 바랜 잎은 시차를 두고 캄캄한 땅으로 내려앉겠지만 되돌아볼 수는 없다. 너도 가고 나도 가야 하는 것,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며칠 바람이 사납게 불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점령군처럼 안개가 꾸역꾸역 몰려들었고  어떤 날은 뿌연 는개가 아침의 대지를 적셔 놓았다. 전깃줄에는 비둘기들이 목을 깊숙이 집어넣고 동동동 줄지어 앉아 체온을 나누고 있다.  
 
이민 오던 해부터 동생네 집에 30년을 같이 살았던 어머니 침실이 휑하니 비었다. 줄지어 앉아있던 비둘기 한 마리가 쏙 빠져나간 자리처럼.
 
오늘은 동생과 함께 어머니에게 가는 날이다. 달포 전에 어머니는 동생 집에서 양로병원으로 옮기셨다.  
 
어머니는 어느 날부터 현실과 과거를 구분하지 못했다. 큰아들인 나는 당신의 아버지가 되었다가 남편이 되기도 했고, 작은아들은 당신의 오빠가 되었다.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다. 평균 연령이 높아져 생긴 노인 문제를 어머니도 피해가진 못했다.  
 
어머니는 매일 밤 보따리를 쌌다. 병원 직원이 옷장에 옷을 걸어두면 아침에는 어김없이 보따리 두 개가 침대 위에서 나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일하고 있는 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가 보따리를 싸놓고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고. 에취, 컥 컥. 얘가 웬 재채기를. 동생이 울음을 참느라 기괴한 소리를 내는 것을 나는 미처 알지 못했다.
 
히야, 히야. 엄마 다시 데려오자. 어떻게든 우리가 모시면 안 될까? 그래, 생각 좀 해보자. 나는 목이 멘 동생을 달랬다.  
 
이러한 상황이 올 줄 모르고 어머니의 입원을 결정한 것은 아니었다. 한국의 동생들에게 소식을 전했을 때도 형제들의 생각은 각각 달랐다. 두 여동생은 오빠들을 원망했다.  
 
어머니가 입원한 후로 나는 같은 병원에서 어머니와 친구할 만한 환자를 찾아냈고, 병원 측에 간청해서 어머니를 그분 병실 옆으로 옮기게 했다.  
 
두 노인은 잘 어울렸다. 그분은 어머니를 부축하여 병실 밖 복도를 걸으며 친언니 대하듯 했다. 그분을 만난 것은 어머니나 우리에겐 다행이었다.  
 
시간 맞춰 식사와 약 먹이고, 빨래해 주고 샤워까지 시켜주며 24시간 환자를 모니터링하는 양로병원은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대신해 주었다. 고마운 일이다.  
 
히야, 엄마가 적응이 좀 된 것 같지? 돌아가는 길에 동생이 말했다. 동생의 말소리와 표정이 모처럼 밝았다.
 
어머니는 처음 입원할 때와는 달리 집 얘기를 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집을 그리워할 때 무너지던 억장보다, 집을 잊어가는 모습이 우리를 못 견디게 했다. 담쟁이 마른 잎 같은 환자들만 있는 양로병원에서 어머니도 그 풍경 속의 한 잎이 되어 우리를 점점 잊어가시는가.  
 
이불을 덮어도 잠이 덮이지 않는 가을밤이다.
 
 

조성환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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