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 순간서 발견한 '행운', 스펙트럼 오브 호프…세실리아 장 대표
2003년 봄 제 아들은 건강하게 가족들의 축복 속에서 태어났습니다. 발육상태도 좋았습니다. 3개월 때 옹아리와 뒤집기, 걷기를 거쳐 1살이 되어 걸었습니다.딱 한가지 걸렸던 것은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가리키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9개월 때 소아과 의사에게 갔을 때 “아이가 포인팅(pointing)을 하느냐?”고 물었는데 대답을 할 수 없었습니다. 소아과 의사는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것이 말하기의 기초이니 주의 깊게 보라”고 하셨습니다.
저나 남편이나 첫 아이인데다가 주위에서 ‘남자아이라서 말이 늦다’고 해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육아경험이 많은 저의 친정 어머니가 우유를 먹일 때 이상하게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고 하셨지만 이것 역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 아이가 이상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돌이 지나면서 걱정은 조금씩 현실화 됐습니다.
옹아리 단계에서 더 이상 진전을 보이지 않았고 ‘어엄~마’ 하고 말해도 따라 할 생각이 없이 말 그대로 무엇엔가 아이가 혼자 갇혀있다는 느낌이 조금씩 들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사회적인 웃음(social smile)’ 즉 상대방에 대한 반응으로 아이들에게 나타나는 까르르 하는 것도 없었던 것인데 아빠가 아이를 안고 공중에 띄어주면 해맑게 웃었기 때문에 그쪽으로 생각조차 못했던 것이지요.
조금씩 자라면서 아이의 관심사가 자동차 바퀴에 집중되는 것을 알게 됐는데 그 도가 지나쳤고 무엇보다 2살 때 여동생이 생겨 더 이상 지체하면 안되겠다는 위기감이 그 때야 들었던 것입니다.
리저널 센터에 연락해서 아이를 데리고 갔습니다. 그 날은 아마 저에게 평생 잊지 못할 가장 슬픈 날이자 조기 발견을 했기 때문에 가장 행운의 날일 지 모릅니다. ‘언어가 좀 늦은 장애’ 정도의 진단이 나올 줄 알았는데 자폐진단이 떨어진 것입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고 한 달 동안 쓰러져 울기만 했습니다.
그러나 “내 아이가 일생 자폐증을 안고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부모로서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정신이 번쩍 들면서 그 때부터 열심히 정보를 알아보려고 뛰어 다녔고 이 분야를 다룬 특수교육법에 관심을 갖고 그 쪽의 변호사가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이가 25개월 때 조기발견을 할 수 있었고 운좋게 좋은 프로그램(ABA 치료)를 받게 된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진단 받고 5년이 지난 후 우리 아이는 현재 초등학교 2학년으로 일반 공립학교에서 잘 다니고 있습니다. 뒤돌아 보면 절대로 쉬운 길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제가 느낀 것은 학교나 리저널 센터 같은 곳에서 진단만 내려주었지 구체적인 치료 방법에 대한 필요한 정보는 안 준다는 것이었습니다. 부모가 얼마나 적극적으로 대처하느냐에 따라서 아이가 자폐에서 벗어나 정상인으로 살 수도 있고 반대로 평생을 자폐증 장애인이 될 수도 있다는 중요한 현실이었습니다.
‘부모의 몫’이란 뜻입니다. 그래서 제가 얻은 정보를 공유하고 싶다는 생각에서 2007년 지금과 같은 비영리 단체로 자폐아 부모들을 돕는 ‘스펙트럼 오브 호우프’를 만들게 된 것입니다.
▶문의: (626)771-0034, [email protected]
with the Korea JoongAng Daily
To write comments, please log in to one of the accounts.
Standards Board Policy (0/250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