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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목의 향기] 마리아의 발현 (5)

전달수 안토니오/성 마리아성당 주임신부

개신교의 창시자 마르틴 루터 신부는 교회의 전례력에 따라 성모 마리아 축일에 설교했는데 1520년에는 성모무염시태 축일(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 축일 12월 8일)에 1523년에는 성모승천대축일(8월15일)에 1540년에는 주님 탄생예고 축일(3월 25일)에 1540년에는 성모님 엘리사벳 방문 축일(7월 2일)에 그가 귀천하던 해 1546년에는 주님 봉헌 축일(2월 2일)에 설교했다.

1525년 성화상 파괴자들에 대해서는 십자가나 성모상을 수중에서 떼어낼 수 없다고 하였고 1529년판 작은 기도서에 삽입된 축일에는 성모 마리아의 이름이 성 아네스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 성 암브로시오 성 제오르지오 성 우르바노 교황 성 에지디오 등과 함께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그가 주해한 '마그니피깟'(Magnificat)은 중세 신비가 만이 할 수 있는 것으로서 마리아를 온유하신 어머니로 찬미하였다. 그러나 마리아에 대한 그의 사상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는 1523년 부터는 마리아에 대한 신심은 전부 폐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 폐지는 본래 신앙의 본질에서 벗어난 것 만(solum propter abusum)이라는 부언을 달았다. 사실 아비뇽 유배 이후 일부 신심에는 혼란이 있었다. 일부 광신자들이나 무지한 이들이 마리아를 마치 하느님 위에 있는 여신처럼 표현한 것이나 주일미사는 참여하지 않아도 성모상 앞에 가서 기도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신심 등은 분명히 빗나간 것이었다. 그리스도 중심에서 빗나간 신심은 마르틴 루터

만이 아니라 중세기 이후 여러 사람들이 비판하고 바로 잡으려 했으므로 그도 그 맥락을 따랐다고 볼 수 있다.



그는 마리아에 대한 그 당시 여러 비판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교 신앙의 모범자로서 마리아를 공경한 것만은 확실하다. 마리아가 신앙인의 위로(Trost)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따라 십자가를 지고 가신 당신 아드님의 뒤를 성실히 따라 가신 신앙의 모범(Vorbild)으로서 마리아를 평가한 그의 태도는 높게 평가되고 있다.

그리스도교 일명 기독교의 역사 안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이들은 수도자들이다. 그들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근본적으로 살기 때문에 세인의 존경을 받는다. 그들은 말이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하늘나라를 위한' 순수한 동기로(마태 1916-30) 청빈 정결 순종의 생활을 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들처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추종(sequela Christi)의 삶을 충실히 사는 사람들이 있을까?

이들은 교회 초창기부터 있어 왔다. 기록에 의하면 사막의 안또니오 (251-356)성인이 그 시조로 되어 있지만 그가 사막에 들어가서 선배 수도자들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는 기록을 볼 때 이미 수행자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단지 그의 덕이 뛰어나 많은 사람들이 그를 추종하였으므로 서서히 제도적인 수도원이 성립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뒤로 빠꼬미오 (290-347) 성인을 이어 본격적으로 서방의 수도원이 현 상태의 모습을 갖춘 것은 베네딕도(480-546) 성인의 덕분이다. 그 분은 수도원의 규칙을 썼으며 그에 따라 신앙인들을 수도자로 양성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충실히 따라 가면서도 마리아의 높은 덕행들을 본받는 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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