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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목의 향기] 마리아의 발현 (5)

개신교의 창시자 마르틴 루터 신부는 교회의 전례력에 따라 성모 마리아 축일에 설교했는데 1520년에는 성모무염시태 축일(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 축일 12월 8일)에 1523년에는 성모승천대축일(8월15일)에 1540년에는 주님 탄생예고 축일(3월 25일)에 1540년에는 성모님 엘리사벳 방문 축일(7월 2일)에 그가 귀천하던 해 1546년에는 주님 봉헌 축일(2월 2일)에 설교했다. 1525년 성화상 파괴자들에 대해서는 십자가나 성모상을 수중에서 떼어낼 수 없다고 하였고 1529년판 작은 기도서에 삽입된 축일에는 성모 마리아의 이름이 성 아네스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 성 암브로시오 성 제오르지오 성 우르바노 교황 성 에지디오 등과 함께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그가 주해한 '마그니피깟'(Magnificat)은 중세 신비가 만이 할 수 있는 것으로서 마리아를 온유하신 어머니로 찬미하였다. 그러나 마리아에 대한 그의 사상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는 1523년 부터는 마리아에 대한 신심은 전부 폐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 폐지는 본래 신앙의 본질에서 벗어난 것 만(solum propter abusum)이라는 부언을 달았다. 사실 아비뇽 유배 이후 일부 신심에는 혼란이 있었다. 일부 광신자들이나 무지한 이들이 마리아를 마치 하느님 위에 있는 여신처럼 표현한 것이나 주일미사는 참여하지 않아도 성모상 앞에 가서 기도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신심 등은 분명히 빗나간 것이었다. 그리스도 중심에서 빗나간 신심은 마르틴 루터 만이 아니라 중세기 이후 여러 사람들이 비판하고 바로 잡으려 했으므로 그도 그 맥락을 따랐다고 볼 수 있다. 그는 마리아에 대한 그 당시 여러 비판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교 신앙의 모범자로서 마리아를 공경한 것만은 확실하다. 마리아가 신앙인의 위로(Trost)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따라 십자가를 지고 가신 당신 아드님의 뒤를 성실히 따라 가신 신앙의 모범(Vorbild)으로서 마리아를 평가한 그의 태도는 높게 평가되고 있다. 그리스도교 일명 기독교의 역사 안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이들은 수도자들이다. 그들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근본적으로 살기 때문에 세인의 존경을 받는다. 그들은 말이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하늘나라를 위한' 순수한 동기로(마태 1916-30) 청빈 정결 순종의 생활을 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들처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추종(sequela Christi)의 삶을 충실히 사는 사람들이 있을까? 이들은 교회 초창기부터 있어 왔다. 기록에 의하면 사막의 안또니오 (251-356)성인이 그 시조로 되어 있지만 그가 사막에 들어가서 선배 수도자들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는 기록을 볼 때 이미 수행자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단지 그의 덕이 뛰어나 많은 사람들이 그를 추종하였으므로 서서히 제도적인 수도원이 성립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뒤로 빠꼬미오 (290-347) 성인을 이어 본격적으로 서방의 수도원이 현 상태의 모습을 갖춘 것은 베네딕도(480-546) 성인의 덕분이다. 그 분은 수도원의 규칙을 썼으며 그에 따라 신앙인들을 수도자로 양성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충실히 따라 가면서도 마리아의 높은 덕행들을 본받는 이들이다.

2011-03-08

[사목의 향기] 마리아의 발현 (4)

지난 주에 소개한 오래된 그 기도문(Sub tuum) 안에는 놀라운 교리가 발견된다. 동정녀와 천주의 모친(theotokos)교리와 마리아를 통한 전구의 기도이다. 이 교리는 325년 니케아 공의회와 431년 에페소 공의회에서 천명되고 451년 칼체돈 공의회에서 재확인된 것이지만 신앙 공동체에서는 이보다 훨씬 이전에 그 교리의 내용을 믿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마리아와 같은 성인들을 통하여 하느님께 전구의 기도를 청하는 기도문이 처음으로 교회 안에 등장하게 된 것도 알 수 있다. 마리아 공경은 중세기를 거치면서 절정에 이른 감을 받는다. 분명히 피조물이며 인간인 마리아를 구세주 예수님의 모친이라고 하여 떠받들었을까? 그리스도교는 분명히 하느님을 믿는 종교이다. 그 하느님은 성부 성자 성령삼위일체로 존재하시는 하느님이 아니신가? 그리고 하느님이 누구신지 인간에게 알려주신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종교가 아닌가? 그런데도 교회의 역사를 보면 신앙의 중심인 예수님 옆에서 마리아가 함께 하신다는 인상을 많이 받는다. 여기에는 언제나 의문과 신비가 공존한다. 무엇보다도 필자가 마리아 신심에 항복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마리아의 발현이다. 왜 마리아인가? 하느님의 심부름꾼으로서 마리아가 그 역을 꼭 해야 하는가가 나의 질문이었다. 발현이 필요했다면 예수님이 직접 발현하실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러나 만사는 하느님이 주관하시니 승복할 수 밖에 없다. 가톨릭교회는 기적이 일어났다고 할 때 함부로 인정하지 않는다. 적어도 수십년간 기적의 신빙성에 대하여 조사한다. 가급적 기적으로 돌리지 않으려고 한다. 교회의 이런 분위기를 전제하면서도 마리아의 발현들은 도저히 그 사실을 부정할 수 없게 한다. 역사 이래 마리아의 발현이 2000 번 이상 있었다는 보고서가 있다. 교회는 그것을 모두 인정하지 않는다. 확실해질 때까지 기다린다. 현재 보스니아와 헤르체고 비나에 있는 메주고리의 사건이 바로 이 범주에 속한다. 그러나 소수의 몇 개(24)는 도저히 인정하지 않을 수 없어 공인하였으니 그 중의 하나가 파티마의 발현이다. 이 외에도 공인된 발현들 중에는 프랑스의 루르드 벨지움의 바너 아일랜드의 노크 멕시코의 과달루페 등이 있다. 한편 가톨릭교회에서 갈라져 나간 대부분의 개신교는 성모 마리아 공경을 반대한다. "오직 성경만으로"(sola scriptura)는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라는 뜻이다. 유일한 중재자이신 그리스도 만이 신앙의 유일한 대상이시다. 조금도 틀린 데가 없다. 신학적으로 완벽하다. 하지만 개신교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마르틴 루터 신부(1483~1546)는 죽기 전까지 마리아에 대해 설교했을 뿐 아니라 마리아를 공경했다는 점을 상기시키고 싶다.

2011-03-01

[사목의 향기] 마리아의 발현 (3)

성모 마리아는 전체 그리스도교 안에 하나의 쟁점 주제이다.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로서 성령의 특별한 능력으로 동정녀로서 예수님을 잉태하고 낳으셨다는 것까지는 모든 교파가 인정한다. 예수님 탄생 이후에도 평생 동정녀로 사셨다는 로마 가톨릭과 그리스 정교의 일치된 견해와 신조와는 달리 많은 개신교 교파들은 평생 동정녀임을 거부한다. 성모 마리아는 너무나 유명하여 이슬람교도들도 공경한다. 그러므로 에페소의 성지는 이슬람의 성지이기도 하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일부 그리스도교 교파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개신교 교파들은 마리아를 공경하지 않는데 개신교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마르틴 루터 신부는 죽기 전까지 성모 마리아에 대해 설교하였고 마리아를 공경했다는 사실이다. 필자가 신학을 공부할 때는 60년대 제2차 바띠깐 공의회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그 때 교회 일각에서 강하게 불어오던 바람은 성모 마리아를 뒤로 물러 앉히자는 운동이었다. 내용인 즉 갈라져 나간 형제들(개신교)과 일치를 해야 하는데 마리아가 일치 운동에 방해가 된다는 주장이었다. 그래서 유럽에서 새로운 신학 동향을 배워온 신진 교수들은 마리아 신심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로사리오 기도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주장을 펴는 듯이 보였다. 필자에게는 큰 혼란이 일어났다. 교수들이 교회의 공적인 아름다운 기도이며 필자가 어릴 때부터 배운 그 기도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가르침을 펴고 있었으니 내 머리에 혼란이 일어난 것이다. 학교생활 시간표에는 기도하는 규칙이 있어 그대로 따라 했지만 사제가 된 다음에도 이 생각은 늘 나를 괴롭혔다. 그 이후 로마에 가서 공부를 마친 다음 교수생활을 하면서 내 나름대로 오랫동안 교회의 역사를 뿌리부터 연구하여 하나의 결론을 내렸다. "마리아 신심은 신앙 공동체에서 저절로 일어났고 교회가 후에 공인했을 뿐이다." 신자들이 모인 공동체 안에서 기도를 바치고 찬미의 노래를 바치니 교회의 권위가 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2세기 말부터 오늘까지 신앙 공동체 안에서 생겨난 수없이 많은 성모님께 관한 기도문들과 시 그림 조각 등은 살아있는 증거품들이다. 그 중의 하나는 이것이다. 1917년 이집트에서 대형공사를 할 때 지하에서 여러 가지 유물들이 발굴되었는데 그 중에서 파피루스도 발견되었다. 그 중에 'Sub Tuum'이라는 기도문이 나왔는데 화학 처리를 해보니 2세기 말~3세기 초의 것으로 판명되었다. 이 때는 교회 초창기이며 로마의 박해시대였다. 여기에 대한 필자의 견해는 두 가지이다. 1)교회의 수도원은 이집트와 시리아에서 시작되었으니 이집트의 수도자들이 사막에서 그 기도를 바쳤거나 아니면 2)로마의 참혹한 박해를 피해 지중해를 건너 박해가 다소 잠잠하던 이집트로 피신하여 신앙생활을 하던 신자들이 바치던 기도가 아니었을까? 하여튼 박해 시대의 어려운 공동체들이 마리아의 전구를 비는 기도를 바치고 있었다면 이는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라틴어로 된 'Sub Tuum' 기도문의 전문(번역)은 이러하다. "천주의 성모여 당신의 보호에 우리를 맡기오니 어려울 때에 저희의 간절한 기도를 외면하지 마옵시고 모든 위험에서 항상 저희를 구하소서. 영화롭고 복되신 동정녀시여!"

2011-02-22

[변화] 무바라크한 사랑 (?)

지금 이집트에서는 '무바라크하다'는 말이 유행중이다. '아주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힌트를 얻지 못하다'는 의미로 쓰인다. 예를 들면 "저녁 식사에 친구를 초대했는데 하품을 하면서 신호를 보냈지만 밤늦도록 집에 가지 않았다. 그는 정말 무바라크했다"는 식이다. 국민들이 극구 거부하는데도 모르는 척 귀를 닫고 있는 이집트 독재자 무바라크의 행태를 비판한 표현이다. 독재자들은 대체로 '내가 아니면 안된다'는 사고방식에서 기인한 엉뚱한 애국심이 있다. 국민들이 저토록 아우성을 쳐도 내방식대로 나라와 국민을 사랑하는 독재자들은 정말로 '무바라크한 사람'들이다. 1000년 전 일본에는 '요바이'라는 풍습이 있었다. 전쟁에 많은 청년들이 죽었기 때문에 씨를 보존하기 위해 밤에 아무나 맘에 드는 여자하고 잠자리를 같이하는 풍습이다. 그 풍습은 머지않아 그들만의 사랑의 방식으로 자리 잡았다. 그야말로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는 용납될 수 없는 그들만의 변태적인 사랑의 방법이다. 지금 지구에는 60억이 넘는 인구가 살고 있다. 60억 개 이상의 사랑의 방식이 존재한다는 얘기다. 누군가가 나를 극진히 사랑한다 했지만 정작 나는 모멸감을 느껴 본적은 없는가? 우리 1세들은 '밥 많이 먹어!' '뭐 사줄까?' '내가 너 때문에 이민왔어'라며 지극정성으로 자식을 사랑했는데 정작 자식들은 '내가 엄마 아빠가 필요했을 땐 그 자리에 없었어!'라며 사랑의 결핍을 호소한다. 어느 날 성경을 보다가 하나님도 인간으로부터 사랑받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은 한량없이 베풀어주시는 분인 줄만 알았는데 하나님도 사랑받기를 원하시는 분이었다. 주목할 점은 하나님 역시 인간의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식으로 사랑을 받기를 원하신 다는 것이다. 인간끼리도 내 방식으로 사랑했기에 문제가 일어났듯 하나님도 인간의 '무바라크한 사랑' 때문에 극심한 모멸감과 굴욕감을 느끼실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늘 "뜨거운 감정만 있으면 하나님을 열렬히 사랑하는것"이라고 우겨왔지만 하나님은 "내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요".(요14:21)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랑의 방식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할 때가 되었다.

2011-02-15

[생활 속에서] "있을 때 잘해"

유행어는 시간의 한계를 전제로 한 언어들이지만 나중에도 그 내용을 되씹어 보면 일리가 있는 말들이라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됩니다. 예전에 "있을 때 잘해!"라는 유행어가 있었습니다. 아마도 한국의 어떤 인기 드라마에서 비롯된 말인 것 같은데 사람들 모두가 마치 '마법'에 걸린 사람들처럼 그 말을 따라 했습니다. 특별히 연세 드신 노인들이 속상할 때마다 자녀들에게 이 말을 주무기처럼 사용했습니다. 당시에는 참 듣기 싫었는데 지금에 와서는 뼈저리게 그 가치를 실감하게 되는 유행어입니다. 사람들은 있을 때는 그 존재와 가치를 무시하다가 잃어버리고 나서야 비로소 사무치도록 그리워합니다. 저의 아버지는 참 과묵하신 분이었습니다. 어렸을 때 양친을 다 여의시고 형님 밑에서 자라셨다고 합니다. 안타깝게도 중이염을 심하게 앓아서 청력을 많이 잃으셨습니다. 자격지심 때문에 그랬겠지만 아버지는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을 많이 피하셨습니다. 저는 단순히 아버지가 말씀하시는 것을 천성적으로 싫어하시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덕분에 제가 미국으로 유학을 온 이래로 국제전화를 걸어 부모님과 대화를 나눌 때면 항상 저의 대화 상대는 어머니였습니다. 얼굴을 맞대고 대화를 나눌 때도 여러 번 말을 반복해야 알아들으시던 아버지와 태평양을 건너 말을 건넨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몇 년 뒤 아버지가 미국에 오셨을 때 저는 제가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인지를 단번에 알게 되었습니다. 우연히 단둘이 차 안에 남게 되었을 때 아버지가 지으시던 해 맑은 얼굴 표정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김 목사! 나는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해! 지난 10년 동안 김 목사가 전화를 할 때마다 목소리를 듣고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 아버지에게 필요한 것은 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목소리'였던 것입니다. 그날 결심했습니다. 매일 전화를 드리기로! 그러나 아버지는 더 이상 제 전화를 받을 수 없었습니다. 몇 달 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같은 실수를 감기 앓는 것처럼 반복합니다. 방에서 뭉그적거리며 게으름 부리는 아이들도 이제 몇 년 안에 대학으로 진학하면서 부모의 품을 떠날 것입니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혈기 충천해서 "분노는 나의 힘!"이라고 외치는 시부모님들도 멀지 않아 그리워지는 날이 곧 올 것입니다. 천년 만년 옆에서 내 눈의 가시로 살아갈 것 같은 웬수(?)도 을씨년스럽게 내리는 소낙비와 함께 보고 싶어지는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진저리치도록 미운 교인이 있었습니다. 동생처럼 생각했던 젊은 친구였는데 개인적인 욕심 때문에 못된 짓을 했습니다. 믿었던 만큼 배반감도 컸습니다. 그 녀석도 나름대로는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여러 입을 건너 "그 놈이 심각하게 아프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무조건 잘 해 주는 건데하고 답답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지난 주일 오후에 사무실을 나오는데 청년들이 교회 문 앞에 오글오글 모여 있었습니다. 무심결에 "한국에 계신 부모님께 전화는 자주하니?" 하고 물었습니다. 봄 병아리 같은 아이들이 한 목소리로 "예!"하고 합창을 합니다. 과연 제가 묻는 의미를 알았을지 궁금합니다. 뭐든지 있을 때 잘합시다.

2011-02-15

[사목의 향기] 마리아의 발현 (하)

참으로 신기하다. 왜 마리아냐? 이것이 나의 질문이다. 발현이나 기적 같은 것을 잘 인정하거나 믿지 않는 신학자에게는 너무나 놀라운 일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그리스도인의 한 사람으로 신앙의 대상도 아닌 마리아를 통해 이런 놀라운 전갈이 주어지니 말이다. 그리스도교는 분명히 하느님을 믿는다. 하느님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로 존재하시며(삼위일체이신 하느님) 온전한 신이신 하느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인간에게 알리신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종교이다. 그분은 그리스도이시고 구세주이시다. 이런 기본적인 교리와 신앙의 대상이 있는데도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를 통하여 신비스러운 일을 하게하시니 놀라울 뿐이다. 또 주목을 받고 있는 다른 발현지는 파티마(Fatima)이다 파티마는 포르뚜갈의 작은 시골 마을인데 하루 아침에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1917년 세계 제 1차 대전이 한창 벌어지고 있을 때 파티마 5월13일(토요일) 정오 경 하늘에서 한줄기 밝은 빛이 세 아이들에게 비추기 시작했다. 그 빛은 나무 위에 서 계시던 귀부인의 몸에서 발사하고 있었다. 그 귀부인은 아이들을 가까이 불러 죄인들의 회개와 전쟁이 빨리 끝나도록 기도하라고 이르신 후 다음 달 13일에 또 올 테니 기다리라고 하고는 사라지셨다. 그 다음 발현은 6월 13과 7월 13일에 있었다. 8월 13일에는 정부 당국에서 아이들을 그 곳에 가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발현이 없었고 아이들은 자유의 몸이 되었을 때 그 곳에 갔는데 그 날은 8월 19일이었다. 9월 13일에 발현하신 그 부인은 전쟁의 종식을 위해 로사리오 기도를 바치라고 당부하셨다. 10월 13일은 마지막 발현이었는데 그 귀부인은 자신을 '로사리오의 모후'라고 소개하면서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서 기도하고 보속하라고 이르셨다. 그 날은 그 발현이 있을 것이라는 소식이 알려져 3만 명 이상이 그 광경을 지켜보았는데 이변도 일어났다. 태양이 빙빙 돌면서 공중에서 떨어져 땅에 쳐박히는 듯한 일이 일어난 것이다. 교회는 이 사건을 당장 받아들이지 않고 13년간의 긴 조사를 거쳐 1930년에야 이를 공식 확인하고 인정했다. 그리고 그 세 어린이들 중 제일 나이가 많았던 루치아는 수녀원에 입회하여 수녀가 되었고 그 귀부인(성모 마리아)으로부터 세 가지 비밀을 받았다고 하여 사람들이 여기에 관심을 보이는 듯하다. 두 가지 비밀들은 공개되었으니 첫째는 인류가 회개하지 않으면 더 큰 전쟁이 일어날 것이고 두 번째는 공산진영의 우두머리인 러시아가 회개할 것이라는 예언이었다. 두 예언은 모두 이루어졌다. 이 예언에 의하면 인류가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세계 제 1차 전쟁보다 더 비참한 제 2차 전쟁이 일어났다. 그리고 러시아의 회개를 위하여 온 교회가 한 마음으로 기도를 해 왔다. 그 결과 러시아는 동유럽의 거의 모든 국가와 중국 베트남 북한 쿠바 등지에 공산주의 사상을 전파하여 종교를 말살하려 했으나 70여년이 지난 후 러시아의 공산당은 사라지고 말았다. 세 번째 비밀에 대해서는 말이 많은 듯하다. 그 비밀은 인류의 비참한 종말에 관한 것이라고 하셨다니 우리에게 공포를 주는 말씀이다.

2011-02-15

[법륜스님의 즉문즉설] 염불 or 참선 선택해 일심 정진을

Q: 저는 오랫동안 절을 해오다가 무릎에 문제가 생겨서 요즘은 경전 암송과 관세음보살 염불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이 그러시기를 염불로는 일심은 이룰 수 있으나 무심에는 이를 수 없다. 참선이 무심에 이를 수 있는 방법이라고 하시더군요. 제게 적합한 수행 방법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는지요? 귀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A: 기독교에서는 우리를 하느님의 피조물이라고 합니다. 피조물로서 최고의 의무는 조물주를 인정하고 나의 주인으로 받아들이는 겁니다. 하느님이 창조주임을 받아들이고 자기가 그 피조물임을 고백하는 게 제일 중요합니다. 일단 주님을 나의 구주로 모시느냐 안 모시느냐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그들의 가치관에서 볼 때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았는가 못 깨달았는가'의 문제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불교적 가치관에서 볼 때는 누가 나를 만들었든 안 만들었든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고 내가 지금 행복해지고 자유로워질 수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합니다. 자유롭고 행복해지려면 깨쳐야 합니다. 그러니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고 세상 만물을 만들었어도 불교에서는 깨치지 못했다면 그것이 설령 신이라고 해도 중생일 뿐입니다. 이렇게 기독교와 불교는 가치관이 서로 다릅니다. 그런데 불교 안에서도 가치관이 서로 다를 때가 있습니다. 경전을 중요시하는 불자라면 경전을 믿고 경전을 이해하고 경전에 근거해서 수행하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들에게서는 경전적 근거 없이 얘기한다면 그것은 외도입니다. 하지만 선에서는 '경전은 문자다. 어떻게 글자로 진리를 검증할 수가 있느냐? 진리는 내가 직접 경험해야 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 섭니다. 그러니 어느 게 옳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관점이 서로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질문자가 들었던 그런 말을 듣는다면 저것은 선의 관점에서 말하는 것이구나 하고 이해하고 본인이 좋은 것을 선택하면 됩니다. 하지만 이 질문의 요지는 욕심입니다. 무엇이 궁금해서 묻는 것 같지만 질문의 뿌리는 욕심입니다. 무엇을 해야 더 좋을까? 하는 것은 욕심이란 말입니다. 이 사람 저 사람 얘기하는 걸 들으면서 어느 걸 하는 게 더 좋을까 이렇게 재보는 그 마음의 근본에는 욕심이 깔려서 의문이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본인에게 맞는 것을 찾으려면 직접 해보면 됩니다. 교회도 가보고 절에도 가보고 절에서도 진각종 천태종 이런 곳도 가보고. 처음 선택할 때에는 그래야 됩니다. 수퍼마켓 가면 어떻게 합니까? 한 바퀴 쭉 둘러보고 물건 살펴보고 가격 보고 그런 다음에 사잖아요. 지금 질문자는 "어느 회사 제품이 제일 좋습니까?" 이렇게 묻는 거나 똑같습니다. 이 물건은 여기 가서 사고 저 물건은 저기 가서 사는 것처럼 정토회 와서는 불법 공부하고 복 빌 때에는 저 산에 가서 해도 돼요. 안 될 게 뭐가 있겠어요? 왜 그런 걸로 구애를 받습니까? 요즈음은 다양성의 시대 개방화의 시대 세계화의 시대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좋은 세상에서 정신적인 노예가 되어 꽉 매여 가지고 삽니까? 그러니 마음을 크게 열어놓고 목사님 설교도 좋으면 들으러 가고. 이 스님 저 스님 법문도 한번 들어보세요. 괜찮습니다. 그러나 매번 들으러만 다니는 건 내 공부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이 종교 저 종교 이 절 저 절 돌아다니면 분별심이 나고 마음이 집중이 안 됩니다. 그러니까 선택은 여러분이 알아서 하시지만 한번 선택한 후에는 꾸준히 공부해야 됩니다. 해보고 다시 질문하십시오.

2011-02-15

[변화] 직언

한국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내 편이냐 네 편이냐 이지 옳고 그르고는 별로 중요한 요소가 못된다. 아무리 바른 생각을 가진 사람일지라도 네 편이면 곧 적이다. 반대로 아무리 그른 생각을 가진 사람일지라도 내 편이면 감싸고 덮는다. 외국기업들이 한국에 진출하면서 풀지 못했던 난제 중에 하나라고 한다. '고소영내각' '회전문인사' '보은은사'…. 지난 4년동안 유독 인재등용에서 만큼은 신용을 얻지 못했던 이명박정부를 향해 언론이 쏟아 놓은 유행어들이다. 인재보다는 내 편만 다 모은다는 인식을 준 것이다. 대통령에게 직언을 하면 손해를 보는 분위기 때문에 지금 청와대는 충신보다는 간신이 가득하다는 글도 부쩍 자주 대하게 된다. '태산은 흙을 사양하지 않고 큰 강과 바다는 물줄기를 가리지 않는다.' 지도자는 모두를 포용할 수 있는 넓고 큰 마음이 필요하다는 경구다. 완벽한 지도자는 있을 수 없다. 그렇기에 유비의 책사 제갈공명 나폴레옹의 책사 베르티에 등 걸출한 인물 뒤에 공통적으로 훌륭한 지략가가 있었음을 보게 된다. 지략가들은 때로 자신들의 주군에게 거침없는 직언을 서슴지 않는다. 이를 받아들일 수 있는 주군은 훌륭한 리더로 거듭나는 것이고 그것을 못 참으면 우물 안에서 최고를 자랑하다 조금씩 몰락해 가는 것이다. 같은 말도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전달하느냐에 따라 그 무게가 분명 다르기에 직언을 할 때는 굉장한 주의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그보다 더 문제는 일반적으로 리더들은 직언을 듣기 싫어한다는 것이다. 특별히 많은 업무와 스트레스에 시달리면서 오랫동안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경우라면 칭찬과 아부에 더 익숙하기 쉽다. 충성스런 말은 귀에 거슬리나 행동에는 이롭다는 말이 있다. 충신은 직언을 잘한다. 그래서 역사 이래 충신의 수명이 긴 경우는 별로 없었다. 어리석은 왕들이 불편한 직언 때문에 충신을 죽이고 나서야 그가 충신이었던 것을 알게 되는 것을 보면 충신의 삶은 늘 고달프고 험난하다. 훌륭한 모임은 직언을 서슴없이 할 수 있는 분위기의 모임이고 훌륭한 리더란 직언을 서슴없이 던져도 손해를 가하지 않는 리더이다. 우리 교회가 바로 그런 모임이 되었으면 우리 목사님이 장로님이 바로 그런 리더가 되었으면 좋겠다.

2011-02-08

[생활 속에서] 서류미비 이미자의 무너진 꿈

아무리 애쓰고 노력해도 이룰 수 없는 꿈을 가진 사람은 행복한 사람일까 불행한 사람일까? 꿈을 이루기 위해 석 달 동안 4000㎞를 걸었는데 마지막 남은 35㎞를 가지 못하고 죽었다면 그는 불행한 사람일까? 열일곱 살 이라크 소년 비랄이 프랑스 칼레까지 4000㎞를 걸어간 이유는 영국으로 이민 간 애인을 만나기 위해서다. 이 순진한 꿈을 이루기 위해 그가 겪은 일은 참으로 고통스러웠다. 트레일러로 밀항하려는 시도가 실패하자 그는 영국해협을 헤엄쳐서 건널 요량으로 동네 수영장에 갔다가 수영코치 시몬을 만났고 둘은 우여곡절 끝에 엮였고 시몬은 서류미비자인 비랄을 하루 밤 재워줬다는 이유로 경찰의 감시를 받는다. 비랄은 시몬에게 수영을 배워 해협횡단에 도전하지만 영국 해안경비대에 발각되어 도망치다가 익사한다. 시몬은 출국금지명령을 어기고 영국으로 건너가 비랄의 애인을 만나 그의 죽음 소식을 전한다. 프랑스의 필리페 리오레 감독의 2009년 영화 '환영(Welcome)'의 줄거리다. 제목이 '환영'이지만 영화에서 비랄을 환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서류미비 이민자 문제를 다룬 이 영화는 개봉되자마자 화젯거리가 됐다. TV 토론회도 열렸고 법개정도 추진됐지만 결과는 용두사미로 끝났다. 서류미비 이민자 문제는 미국에서도 중요한 사회문제다. 오바마 대통령의 이민개혁 공약에 이민자들이 무더기 표를 줬지만 그는 지난 2년여 동안 공약을 지키지 않았다. 작년 말에 '드림 법안'도 부결되었다. 부모의 성격과 체질은 유전자를 통해 자녀에게 유전된다. 꿈도 후대에 유전될까? 된다면 어떤 경로로 유전될까? 예수는 하나님 나라가 땅위에 이루어지는 꿈을 꿨고 그 꿈을 이루려 애쓰다 십자가에 달려 죽임당했다. 그분이 꿈꾼 하나님 나라를 여러 가지로 묘사할 수 있겠지만 '장벽 없는 세상'도 그 중 하나리라. 유대인과 헬라인 남자와 여자 주인과 종 사이뿐 아니라 '옛날 이민자'와 '지금 이민자'를 가로막는 장벽이 없는 사회가 이뤄진다면 하나님 나라에 한걸음 다가서는 것이리라. 비랄은 영국해협을 건너지 못하고 죽었지만 그의 꿈은 출국금지령을 어기고 영국으로 날아가 그의 애인을 만난 시몬을 통해 이루어진다. 결국 그도 비랄과 같은 꿈을 꾸게 된 것이다. 영화에서 기억에 남는 장면은 비랄이 망망대해에서 홀로 수영하는 장면이다. 서류미비 이민자들의 외로운 처지인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비랄과 같이 수영해주는 사람이 있어야 그의 꿈이 이루어진다. 서류미비 이민자의 문제는 서류 갖춘 이민자가 같이 풀지 않으면 절대 풀 수 없다는 메시지로 들리는 장면이다.

2011-02-08

[사목의 향기] 마리아의 발현 (상)

참으로 이상하고 신비스럽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님이 나타나신다고 한다. 2000년 전에 이 세상을 떠나시고 하늘나라에 계실 분이 이 세상에 나타나시는 것이다. 죽은 사람이나 영적 존재들이 나타나는 것을 천주교회는 '발현'(apparition)이라고 한다. 발현에 관한 연구는 신학 중에서 영성신학에 속하고 더 세분하여 신비신학에서 다루는데 성경에 등장하는 천사들이나 악령들의 발현과 더불어 중요한 과목으로 부각되기도 한다. 지난 11월 미국 천주교회는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마리아의 발현을 공적으로 인정하였다. 위스컨신주 그린베이 교구장 리켄 주교는 약 150년 전 벨기에의 이민자 아델레 브리세 여성에게 여러 번 나타나 특별한 전갈을 주신 마리아의 발현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참으로 신기하게도 역사적으로 마리아의 발현을 체험했다는 보고서는 2400건에 이른다. 모두 교황청 교리부에 보고되어 있다. 그러나 교회는 확실해 질 때까지 기다린다. 가급적 발현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이다. 그러나 24 곳은 도저히 부인할 수 없어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발표하였는데 그 중의 하나가 이웃 나라 멕시코의 과달루페에서 발현하신 유명한 사건이다. 1531년 12월 9일 멕시코 씨티의 북서쪽에 위치한 떼뻬야끄라는 곳에서 인디안 50대 남자 후안 디에고에게 마리아님이 발현하셨는데 그 당시 교구장 후안 데 주마라가 주교가 이를 인정하지 않고 발현을 입증할 만한 기적이 있으면 믿겠다고 하자 기적을 통해 증명이 되어 인정했다는 실화가 전해진다. 떼뻬야끄는 높은 곳이고 12월에는 추운 곳이며 돌이 많은 곳이라 장미꽃이 없었는데 예쁜 꽃들이 있었고 마리아님이 꽃다발을 만들어 주교에게 갖다주라고 하여 꽃을 안고 가서 주교에게 건네자 그 남자가 입고 있던 작업복(tilma)에 발현하신 마리아의 모습이 그대로 새겨져 너무나 놀라 믿고 인정했다는 실화이다. 480여년이 지나도 마리아님이 새겨진 그 천과 색깔이 변하지 않는다는 그 자체도 초자연적 현상이며 수 많은 기적이 일어나고 있다. 매 발현에는 늘 특별한 전갈(message)이 있다. 과달루페 발현의 메시지는 그 곳에 있던 신당과 여신상을 없애고 성전을 지으라는 것이었다. 인디언들이 잡신을 섬기고 있었으므로 이를 타파하고 이 세상의 주인이신 하느님께로 돌아가라는 전갈인 것이다. 참으로 신기하다. 왜 마리아냐? 이것이 나의 질문이다. 발현이나 기적 같은 것을 잘 인정하거나 믿지 않는 신학자에게는 너무나 놀라운 일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그리스도인의 한 사람으로 신앙의 대상도 아닌 마리아를 통해 이런 놀라운 전갈이 주어지니 말이다. 그리스도교(기독교)는 분명히 하느님을 믿는다. 하느님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로 존재하시며(삼위일체이신 하느님) 온전한 신이신 하느님이 어떠한 분이신 지를 인간에게 알리신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종교이다. 그 분은 그리스도이시고 구세주이시다. 이런 기본적인 교리와 신앙의 대상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분의 어머니 마리아를 통하여 이런 신비스러운 일을 하게 하시니 놀라울 뿐이다. 과달루페는 마리아님이 발현하셨다는 12월 9일 한 달 전부터는 순례자들이 너무 많이 몰려 성지는 북새통을 이룬다. 한 달간 걸어서 노숙을 하며 성지를 찾는 신자들 죄를 보속하기 위하여 몇 백 미터 전방에서 무릎으로 기어가는 신자들 헤아릴 수 없는 기적들이 일어난다는 성지 직접 가서 눈으로 보고 확인해보고 싶다. 가까운 곳이라 꼭 한번 가보고 싶은데 시간이 잘 나지 않아 안타까울 뿐이다.

2011-02-08

[지혜의 향기] '마음공부'는 비우고 시야 넓히는 것

다른 종교들도 좀 그렇지만 특히 불교는 바깥 탓 남 탓을 하기 전에 먼저 제 마음부터 들여다보고 그 속으로 들어가라고 한다. 이른바 마음공부다. 강요된 믿음이 아니라 깊은 사색이 먼저다. 이렇게 차근히 내 마음 속을 챙겨 본 다음 어느 정도 정리가 되면 고요하게 바깥세상을 살펴본다.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자신을 먼저 들여다보며 제 마음 속으로 찾아 들어가자면 그 마음 자체에 비집고 들어갈 틈바구니가 있어야 한다. 누가 주입시켜 준 무슨 이념이나 교리 주장 같은 것으로 방들이 꽉 차 있거나 남을 배척하는 단단한 편견으로 출입구를 봉해 놓고 있으면 자신부터 한 발자국도 제 집에 발을 들여 놓을 수 없다. 하물며 아무리 귀한 손님이 있다 한들 어찌 이런 집으로 불러 모실 수가 있겠는가. 종교를 잘못 믿으면 이리 된다. 이른바 꼭 막힌 원리주의자요 근본주의의 답답함과 위험성이다. 무식하고 용감한데다 부지런하기까지 한 이러한 벽창호들보다는 차라리 대충 믿는 척을 하는 나일론 신자들이 한결 나을 수도 있다. 그래도 숨통이 좀 트이는 괜찮은 이웃이 될 테니까. 그러니 불교에서 말하는 마음공부의 큰 목적의 하나는 마음을 비워 시야를 넓히고 영어로 말해 좀 플렉시블한 인간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아무 일에나 흐물흐물해지자는 것은 아니다. 언제나 낮은 쪽으로 흘러가려는 물과 같이 굳은 것은 녹이고 흐려진 것은 가라앉히고 막힌 것은 돌아나가 빈 곳은 채우며 부처님이 일러 주신 진리의 골을 따라 유장하게 흘러가자는 것이다. 마음이 일단 이렇게 유장하게 흐른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지만 오늘 강조하고 싶은 것은 그게 아니다. 마음뿐 만 아니라 몸도 행동도 그에 따라 함께 흘러가야 한다는 점이다. 마음공부라니까 오로지 제 혼자만의 세계에 파묻혀 옴짝달싹 않는 이들도 없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불자들에게 행동력과 실천력이 모자란다는 것은 이제 숨길 수 없는 커다란 약점이 되었다. 덮어 놓고 바깥 탓 남의 탓만 하지 말고 일단 모든 것을 먼저 자기의 내부로 돌려 철저한 관조와 반성부터 하란 말씀이지 주구장천 앉아만 있다면 그 마음 닦아서 언제 무엇에다 쓰겠는가. 마음공분들 제대로 되겠는가. 자칫 제 마음 제가 속이는 최면이나 시간 죽이기 오락이 될 지도 모른다. 물이라고 다 좋은 물은 아니다. 고여서 썩는 물도 있고 꽁꽁 얼어버린 물도 있다. 우리가 부처님의 좋은 말씀을 듣고 그냥 좋은 줄로만 알고 머물러 있다면 고인 물이 되어 썩어 버리고 만다. 차가운 외풍이 두려워 기를 펴지 못하고 안으로만 파고들면 이윽고 꽁꽁 얼어붙어 빙판이 되고 만다. 움직이지 않고 실천하지 않은 죄 떨쳐 일어서서 행동하지 않은 업의 결과다. 불자의 강물은 흘러야 한다. 마음의 강물과 함께 실천과 행동의 강물이다. 무엇이 행동이냐? 바로 육바라밀의 실천이다. 보시 지계 인욕 정진에다 선정바라밀 지혜바라밀을 몸소 실행하는 것이다. 불자들은 우선 마음부터 갈고 닦아야 한다. 갈고 닦아서 나의 안을 맑고 밝게 바꾸어야 한다. 그런 다음 손잡고 움직여 대승의 강물로 도도히 흘러야 한다. 고통으로 얼룩지고 자비에 목마른 사바의 들판에 물을 대며 이 세상을 좀 더 나은 부처님의 땅으로 바꾸어 가려면.

2011-02-08

[변화] '능변'과 '눌변'

애플의 최고경영자 스티브 잡스를 가치로 환산하면 700억달러(약 7조 원)가량이라고 한다. 50불짜리 리바이스 501 청바지와 15불짜리 티셔츠 그리고 그가 즐겨 신는 뉴밸런스 운동화를 합쳐야 160불이 안 된다. 그러나 그가 최근 병가를 내고 경영일선에서 잠시 물러남에 따라 온 지구촌이 술렁이고 있다. 잡스의 건강상의 염려가 세계 IT 시장의 판도를 흔드는 매우 중요한 뉴스가 되었다. 얼마 전 발표한 삼성경제연구소의 '구글과 페이스북의 인재전쟁' 보고서에 따르면 페이스북은 지난해 사이트 방문자 수와 체류시간을 기준으로 구글을 이미 추월했다고 한다. 페이스북의 매출액과 종업원 규모는 구글의 10분의 1 이하이지만 전 세계 이용자 수는 5억명을 넘어서 구글을 위협하는 기업으로 성장했다. 페이스북 창업주 마크 주커버그는 지난해 시사주간지 타임지 선정 '올해의 인물' 1위에 오르며 세상의 패러다임을 변화시킨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페이스북을 이용하는 많은 젊은이들이 제 2의 주커버그를 꿈꾸고 있다. "불량기업은 없다. 단지 불량 최고경영자(CEO)가 있을 뿐이다"라는 말이 있다. 〔〈【최고 경영자들이 천문학적인 연봉을 제시받는 이유를 이해할 듯도 하다.】〉〕 한 사람의 담임 목회자가 우리 교회의 미래를 책임진다는 면에서 그 중요성은 세상의 CEO들과 다를 바 없다. 1세대 목회자들의 은퇴와 1.5세 목사들의 한국 진출 등으로 많은 교회들이 리더십의 공백에 놓여 있다. 어떤 인물이 담임 목회자가 되느냐에 따라 교회의 운명이 달라질 터 청빙위원회는 교회의 미래를 어깨에 짊어지고 목회자 선출에 신중을 기하고 있다. 몇 달째 사회면의 토픽을 대형교회 목회자들의 비리와 추잡스러운 문제들이 장식하자 말씀만 좋으면 인격 문제 여자문제 돈 문제 등 어떤 문제라도 면책특권을 주던 한국교회가 이제야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는 것 같다. 영어를 잘하는 목사보다 이력서가 화려한 목사보다 사람들의 가슴에 감동 주는 '능변'의 설교자 보다 말은 잘 못해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모세 바울같은 인물 엊그제 새로 나온 영화 '킹스 스피치'의 영국왕 조지 6세처럼 비록 '눌변'일지언정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사람을 선출하도록 기도해야 한다.

2011-02-01

[생활 속에서] 염려와 기도

어렵고 힘든 시기가 되면 더욱 기도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절감한다. 그래서 같이 기도하는 시간을 갖고 눈물로 나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런 간절한 기도를 보면서 놀라는 것은 우리의 기도의 대부분이 감사보다는 염려로 가득하다는 것이다. 이상하게도 염려가 가득할 때 기도가 은혜가 된다. 염려가 가득할 때 기도에 눈물이 배인다. 그래서 많은 경우 살펴보면 기도를 간절히 드리는 것이 아니라 염려를 쏟아놓고 있는 경우가 더 많다. 아무리 간절하다 해도 염려는 기도가 아니다. 많은 경우 기도를 드리는 것처럼 보이나 실제는 새벽 '염려' 모임과 수요 '염려' 모임을 한다. 그리고 더 크게 마음먹고 금요철야 '염려' 집회 그리고 40일작정 새벽 '염려' 성회를 드리며 1천 '염려' 번제까지 드리는 것을 보게 된다. 물론 염려는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염려는 우리로 하여금 다시금 기도줄을 붙드는 계기가 될 수 있고 그리고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한다. 하지만 기도하는 삶의 목적은 염려하게 된 현실을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염려에 사로잡힌 우리의 영혼이 자유롭게 되는 것이어야 한다. 빌립보서 4장6절은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감사함으로 아뢰라고 분명히 말씀하신다. 염려함으로 아뢰지 말고 감사함으로 아뢰야 함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감사의 기도는 현실이 넉넉하고 좋아서 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염려할 것밖에 없는 현실 속에서 내린 결단임을 보여준다. 우리의 기도가 간절할수록 감사보다는 오히려 염려가 가득한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겠다. 결코 염려는 기도의 동지가 아니라 대적자임을 알아야 한다. 새해에는 염려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있다 할지라도 감사함으로 간절히 구하는 기도의 삶이 되길 소망해본다. 사람들의 염려를 이용한 일부 교계의 기도 마케팅은 자제했으면 싶다. 부정적 에너지를 뜨거운 기도의 열정의 에너지로 삼아 감정 과잉상태로 몰아가지 않았으면 싶다. 힘든 현실을 이용하기 보다는 오히려 깊은 감사로 염려를 이기게 하는 도움이 필요하다. 염려의 현실을 해소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피할 수 없는 염려의 현실을 감사로 승화시키는 것이 믿음의 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기도하지만 염려를 에너지로 삼는 두려움의 영성은 이제 멈추었으면 좋겠다. 믿음의 기도와 염려의 불편한 동거를 이제 그만하고 감사로 승화된 진정한 믿음의 기도가 풍성한 한해가 되길 소망해 본다.

2011-02-01

[사목의 향기] '자신만 보는 옹졸함' 버리자

2년 전 이곳에 와서 열강을 하신 이 신부님이 세상을 떠난지도 어언 1년이 지났다. 우리에게 너무나 많은 감동을 주어 그 열기가 아직까지 남아있는 듯한데…. '울지마 톤즈'(Don't cry for me Sudan!)는 KBS가 고 이태석 신부를 기리기 위해 만든 교육용 영화인데 그가 7여년 간 아프리카의 수단에서 선교하다가 48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그를 기리는 영화가 제작되어 한국은 물론이고 이 곳 미국에서도 한국어와 영어로 상영되어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헌신적인 삶은 많은 이들에게 감동과 자극을 주고 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을 따라가는 제자답게 짧고 굵게 한 생을 사신 분이다. 그는 아프리카의 수단이라는 나라에서 신부요 교육자며 선교사로 살면서 그 지역 학생들에게는 좋은 아버지와 같았다. 수단은 우리에게는 생소한 나라지만 그를 통해 우리에게 좀 더 알려지게 되어 아프리카 지도를 한 번 더 살펴보게 됐다. 그 분의 헌신적인 활동상을 보고 일각에서는 그를 한국의 슈바이처라고 부르기도 한다. 사실이다. 사실 더 좋은 호칭이 있다면 그 분의 활동에 걸맞는 용어가 나오기를 바란다. 20년에 걸친 내전이 할퀴고 지나간 수단은 아무 것도 없고 할 일은 태산같이 많은 곳이었다. 이 신부는 그 곳에서 여러 환자들 특히 말라리아와 한센스병에 걸린 환자들의 고름까지 닦아주며 치료하였다. 그의 활동은 그가 2009년 펴낸 유일한 책 '친구가 되어 주실래요?'(생활성서사)와 그의 사후에 나온 다큐멘터리 영화 '울지마 톤즈'에 담겨 있다. '친구가 되어 주실래요?'는 10만부가 넘게 팔렸고 최근에는 한 달에 2만부씩 판매되고 있다. '울지마 톤즈'는 개봉 이후 34만5000명이 관람했다고 한다. 작년 11월 한국에서 극장 상영을 끝냈던 이 영화는 재개봉해달라는 요청이 밀려들어 12월 중순 다시 개봉했는데 그 열기는 계속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이 신부의 활동을 돕기 위해 결성된 인터넷 카페의 회원은 이 신부가 선종하기 전 2300여명에서 1만4000여명으로 급증했고 수단 어린이 장학회의 후원자도 3000여명으로 늘어났다. 카페에는 "신부님을 알게 돼 행복합니다" "신부님은 당신의 죽음으로 더 많은 이들의 마음뿐 아니라 몸까지 움직이게 하신 것 같아요" 등의 글이 계속 올라오고 있다. 이런 감동에 힘입어 그가 떠난 후 비어있던 톤즈 현지의 활동도 점차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흐뭇한 마음 금할 길 없다. 그의 후임 사제도 파견되어 활동하고 그의 모교 인제의대를 중심으로 결성된 의료진도 파견된다는 소식이다. 그리고 수단 어린이 장학회와 더불어 여러 지원이 이루어져 그의 활동이 활발히 이어지고 있다니 기쁘기 그지없다. 2년 전 이 곳에서도 그의 활동을 돕기 위한 후원회가 결성되어 활동하고 있다. 최후심판의 기준을 제시하신 예수님께서는 "너희 중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한 것이다"라고 하셨다. 그가 어려운 사람들에게 좋은 일을 한 것은 바로 큰 예수님께 한 것이다. "이태석 신부! 그대의 헌신적인 활동이 우리 모두를 감동시키고 있네. 우리도 살아가면서 자신만을 보는 옹졸한 마음에서 벗어나 남의 어려운 사정도 보고 돌보는 넓은 마음을 갖도록 하느님께 빌어주어요."

2011-02-01

[법륜스님의 즉문즉설] 남편 사업 안 되는데 위로 어떻게 하나

Q: 남편이 사업 거래처 수금이 너무나 안 돼서 한숨으로 퇴근하는 날이 많습니다. 잘될 거라고 위로하지만 부족한 것 같습니다. 제가 어떻게 하면 되는지요. A: 사업하는 사람이 물건을 주고 수금이 착착 잘되면 그 사람은 고민이 없겠죠. 공장을 지어서 제품을 생산해 놓으니 날개 돋친 듯이 팔리면 얼마나 좋겠어요. 내가 주식을 사면 계속 오르기만 하면 얼마나 좋겠어요. 내가 집을 사려고 마음만 먹으면 아파트 가격이 뚝 떨어지면 얼마나 좋겠어요. 애가 학교에 가서 공부 일등하고 서울대 들어가고 고시공부 해서 한 번에 척 붙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하지만 이세상이 그렇게 됩니까? 안 됩니다. 그럼 내가 바라는 대로 안 되는 게 정상인가요 비정상인가요? 내가 원하는 대로 안 되는 게 정상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내가 원하는 대로 안 되는 게 정상이라면 내가 원하는 대로 안 되어도 괴롭지가 않아야 됩니다. 뭐든지 다 마음먹은 대로 뜻대로 다 되면 인류 문명이 발전했을까요? 몸이 아플 때 아무 풀이나 먹고 나아버리면 약초니 독초니 하는 구분이 필요 없습니다. 약이 되는 것이 있고 안 되는 것이 있으니 그걸 찾는 노력이 필요하지요. 모든 인류 문명은 이렇게 안 되는 속에서 발전되어 왔습니다. 인류 최초의 사람들은 돌을 도구로 썼습니다. 돌로는 풀은 벨 수 있었지만 나무는 벨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최초의 인류는 초원지대에서만 살았지요. 그러다가 철기가 나왔고 그 철기 덕분에 인류 문명은 한 단계 발전했습니다. 돌로 굵은 나무가 베어지면 굳이 제철을 할 필요가 없었겠지요. 세상은 내 뜻대로 안 되는 게 정상이고 진실입니다. 그렇다면 길은 두 가지입니다. 뜻대로 안 되니 그만두는 게 한 가지 길이고 안 되는 데서 되도록 하기 위해 연구하는 다른 한 길이 있습니다. 연구하고 노력한다면 앞으로 발전할 것이고 노력은 안 하고 내 뜻대로 되기만 바란다면 좌절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남편이 수금이 잘되게 연구할 수 있도록 아내로서 옆에서 도와주는 것이 나의 문제입니다. 하지만 남편이 수금을 못 하고 술 마시고 걱정하는 것은 내가 해결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것은 나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수금 못 하는 남편을 보고 내가 신경질이 난다 하면 그것은 남편 인생에 내가 간섭하는 것입니다. 그저 밥만 먹고 살아도 된다 하면 '당신이 알아서 하세요' 하고 남편에게 맡기세요. 그런데 내가 생각해 보니 내가 남편보다 수금을 더 잘할 수 있겠다 싶으면 내가 나서서 한번 해보는 것 또한 한 가지 방법입니다. 본인이 남편 회사의 수금사원으로 취직해 수금을 잘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해 보세요. 결론적으로 말하면 남편이 하는 일을 보고 내가 괴로울 때 해결하는 길은 두 가지입니다. 수금을 잘하든 못 하든 이렇든 저렇든 그것은 남편 일이에요. 그걸 가지고 내가 염려한다고 도움이 안 됩니다. 남편 옆에서 잔소리를 해봐야 부부 갈등만 가져오고 아무 도움이 안 됩니다. 그러니 이런 일은 우리 남편이 알아서 잘할 거다. 술을 먹든 뭘 하든 당신만 믿으니 당신이 다 알아서 해라. 나는 뒷바라지만 열심히 하겠다. 밥 달라면 밥 해주고 빨래 해달라면 빨래 해주고 원하는 대로 다 해줄 테니 사업은 당신이 알아서 하십시오 이렇게 선을 딱 그어줘야 됩니다. 그런데 수금하는 것도 중요한 사업인데 남편이 연구도 안 하고 노력도 안 하는 것 같고 가만히 보니 내가 하는 게 더 낫겠다 싶으면 남편하고 의논해서 그 일을 내가 한번 해보는 겁니다. 그래서 이걸 계기로 내가 열심히 연구해서 유능한 영업 사원이 되면 이 문제가 해결됩니다.

2011-02-01

[변화] 독설을 녹이는 유머

1968년 로버트 케네디 상원의원 사망 사건 이후 40여 년 만에 처음으로 미 현역의원 개브리얼 기퍼즈 연방 하원의원의 총격 사건을 계기로 미국 정치권의 독설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공화당의 새라 페일린이 기퍼즈 의원의 지역구를 과녁 모양으로 표시해 놓고 "퇴각하지 말고 재장전하라" "M16 자동소총으로 (기퍼즈를) 쏘라" 같은 극단적 언어를 쏟아낸 것이 이번 사건의 원인이라는 인식에서다. 덕분에 그동안 독설로 재미를 본 인물들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궁지에 몰리고 있다. 라디오쇼를 통해 20년간 독설을 쏟아낸 덕에 돈을 번 '러시 림보'와 MSNBC의 저녁 뉴스를 맡고 있는 '키스 올버만'등이 중심 대상이다. 당장 폭스TV의 사장이 진행자들에게 발언의 수위를 낮출 것을 지시했다고 하지만 자극적인 것에 이미 길들여진 시청자들 때문에 미디어의 독설 문화가 쉽게 정화되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욕과 독설이 난무하는 세상이다. 스마트폰에는 '욕 애플리케이션' 까지 등장했다. 무식하고 잔인한 욕설이 무려 500여 개나 재생된다. 욕이 빠지면 말을 이어가지 못하는 청소년들도 상당 수에 이른다. 영국의 수상 윈스턴 처칠이 처음 하원의원에 출마했을 때 그의 라이벌들은 정견회장에서 그에 대한 인신공격을 시작했다. "내가 듣기에 상대방 후보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만약에 그게 사실이라면 그런 게으른 사람은 의회에 앉을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자 이어 등단한 처칠이 이에 대해 멋지게 유머로 응수했다. "아마도 나처럼 예쁜 마누라를 데리고 산다면 당신들도 일찍 일어나지 못할 겁니다." 청중들은 웃었고 처칠은 당선되었다. 진중권이라는 문화평론가가 최근심형래감독이 만든 '라스트 갓파더'를 '불량품 가게'라고 폄하했다. 독설을 들은 심형래감독은 '오늘이 마침 내 생일인데 생일선물 주는건가?'하면서 유머로 응수했고 며칠 만에 200만 관객을 동원하는 기염을 토하며 진짜 생일 선물이 되어버렸다. 정치를 하건 영화 감독을 하건 아니면 교회 구역장을 하건 사람들이 주목하는 자리에 앉으려면 독설을 유머로 승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반드시 있어야 할 것 같다.

2011-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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