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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신인문학상-단편소설 부문 가작] 작은 거인과 사이다

이상희

1.

병원 소독약 냄새는 버스 매연 냄새와 더불어 내가 가장 싫어하는 냄새다. 대학병원 지하 주차장에 차를 대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가며 또 다시 맡게 될 소독약 냄새를 생각하니 이내 미간 사이에 내 천(川)자가 그려진다. 바지 속에 있던 핸드폰이 요동쳐 꺼내보니 아내가 보낸 문자 메시지였다.

'어디야?' 엘리베이터에 오르며 나는 둔한 속도로 힘겹게 답장을 보내기 시작했다. '다 왔어. 주차장' 엘리베이터를 타고 3층에서 내리자 소독약 냄새가 코를 찌른다. 나는 아내와 만나기로 한 산부인과 앞으로 걸어갔다. 대기실 소파에 앉아있던 아내가 나를 보자 미소와 함께 가볍게 손을 흔든다. 퇴근시간이라 그런지 대기실 주위엔 사람이 거의 없고 한가했다. "많이 기다렸어?" 나는 아내 옆 빈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아니 나도 온 지 얼마 안됐어." 이제 막 불혹이 된 우리 부부는 결혼 5년 차지만 아직 아이가 없다. 부부관계가 소원하거나 둘 사이에 애정이 식은 건 절대 아니다. 어떤 커플보다 더 서로 사랑하고 아끼는 사이지만 아이만 없었다. 누구보다 더 아이를 기다리는 아내와 주위의 권유로 우리는 작년부터 6개월마다 한 번씩 검진을 받기 시작했고 오늘은 일주일 전에 받은 검사 결과를 확인하는 날이다. "어머 오셨어요?" 젊은 간호사가 나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안녕 하세요?" 나도 자리에서 일어나며 정중하게 답례했다. "잠시만요. 제가 선생님한테 오셨다고 말씀 드릴게요" 간호사는 진료파일을 가슴에 안은 채 얌전하게 진료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곧 다시 나와 우리를 진료실 안으로 안내했다. "야 어서 와라! 재수씨 그동안 안녕 하셨어요?" 노트북 컴퓨터를 보고 있던 현수가 아내와 나를 보자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이 자식은 맨날 재수씨래? 형수님이라니깐!" "현수씨 잘 지내셨어요?" 아내도 가벼운 목례를 겸해 말했다.



"현수 너 우리 때문에 퇴근 늦은 거 아냐?" 나는 아내와 함께 현수 책상 앞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당연하지!" 현수는 손목시계를 가리키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알았다. 내가 오늘 한 잔 살게!" "그럼 나야 좋지. 하하!" 현수는 나와 아내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그리고는 간호사가 책상에 놓고 간 진료기록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현수 자리 뒤 커다란 유리창 너머엔 하루의 마감을 알려주듯 붉은 석양 노을이 세상 화폭 위에 서서히 물들고 있었다. 문득 아내의 얼굴을 쳐다보니 진료결과를 기다리는 게 조금 초조해 보였다. 진료기록이 들어있는 폴더를 넘기던 현수가 말문을 열었다.

"재수씨나 정수 모두 아무 이상 없이 건강합니다!" 그러자 아내의 얼굴이 금새 환해졌다. "재수씨 아무 이상이 없어도 임신이 안 되는 경우가 종종 있어요.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제가 처방해 드린 약 꾸준히 복용하시고 운동도 병행하면서 노력하면 분명 좋은 결과가 있을 겁니다." "네 그럴게요. 고마워요 현수씨!" 아내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야 현수야 너 이제 퇴근해도 되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러자 현수도 자리에서 일어나 가운을 벗으며 말했다. "응. 네가 오늘 마지막 환자였어!" 나는 아내에게 자동차 키를 주며 먼저 집에 들어가라고 했다. 아내는 혼자 집에 가는 게 썩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으나 검진결과 아무 이상이 없자 기분이 좋았는지 잔소리 없이 먼저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현수와 나는 병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작은 재래시장 내 순댓국 집에서 식사 겸 술잔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정수야 언제까지 재수씨를 속일 셈이야?" 현수가 내 잔을 채우며 말했다. "글쎄다." 대답 후 나는 바로 잔을 비웠다. 그러자 또 다시 현수가 내 잔을 채우며 말한다. "정수 너 때문에 내 어쩔 수 없이 재수씨한테 거짓말을 하지만 나도 의사야? 양심에도 찔리고 환자를 속이면 안 된다고!" 나는 아무 대꾸 없이 진한 순댓국 국물을 순대와 함께 떠 마셨다. 십 년 넘게 먹어 온 이 할매집 순댓국은 깻잎 향과 함께 입안에 스며드는 국물 맛이 진하고 얼큰한 게 아주 일품이었다.

6살 어린 아이에겐 이 세상 최고의 맛이었던 사이다와
아버지가 까주신 삶은 계란 두 세개를 먹고나니 어느새
기차 밖 눈 덮인 세상은 환하게 밝아 있었다.


"정수야 이제 그만 정관수술 한 거 풀고 아이 가져! 남들 다 갖는 아이를 도대체 너는 왜 안 가지려고 하는데?" 나는 현수 질문에 대답 대신 질문을 던졌다. "현수야 너 의사되려고 공부도 많이 하고 국가고시 시험도 봤지?" "그랬지!" "현수야 의사가 되려면 공부도 많이 해야 하고 어려운 시험도 통과해야 하는 이유는 의사는 바로 소중한 생명을 다루어야 하는 직업이기 때문이야!" 현수는 아무 말 없이 내 눈만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말이다 부모가 되는 과정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 의사는 소중한 생명을 다루지만 부모는 바로 그 소중한 생명을 탄생시키는 사람이야. 그런데 난 그 고귀한 일을 하는데 필요한 공부도 시험도 보지 않았어. 그래서 자신이 없어!"

정말 그랬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성인이 되면 누구나 아이를 낳을 수는 있지만 아무나 부모가 될 순 없다'고 생각했다. 내 말을 듣던 현수는 아무 말 없이 자신의 술잔을 비우기 시작했다.

2.

초등학교가 국민학교로 불리던 1970년대 중반 나는 당시 학교에 입학하지도 않은 6살 어린 나이였지만 국민학교 2학년인 우리 형보다 더 매년 겨울방학을 손꼽아 기다리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겨울방학이 시작되고 해가 바뀌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우리네 최대 명절 설! 설 전날이 되면 나는 아버지의 큼지막한 손을 꼭 잡은 채 어머니의 손을 잡은 형과 함께 늘 버스를 타고 영등포 역으로 향했다. 평상시에는 내 코를 아프게 후벼 파고 머리를 어지럽게 만들던 버스의 검은 매연 냄새도 그 날 만큼은 친근하게 느껴졌다. 버스에서 내려 영등포 역으로 걸어가는 길에는 어둠이 깔린 이른 아침시간임에도 불구하고 항상 사람들의 물결로 인해 발 디딜 틈 조차 없었다.

저 마다 들뜬 마음으로 고향을 향해 가는 귀성객들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지게로 짐을 나르는 짐꾼들 그리고 설 대목에 한 푼이라도 더 벌려고 호객행위를 하며 입김과 함께 마지막 열정을 토해내는 장사꾼들… 그럴 때면 아버지는 작은 내 손을 더 꽉 잡고 전보다 더 뒤를 자주 돌아보며 어머니에게 '아 잃어버리지 않게 단디 잡고 온 나!' 라고 외치셨다. 그렇게 십 여분을 걸어 통일호로 불리던 허름한 기차 안에 오르면 그때서야 아버지는 꼭 잡았던 내 손을 놓아주셨다. 그리고 밝은 미소와 함께 '우리 아들 욕봤다!' 라고 말씀하시며 내 머리와 얼굴을 다정하게 쓰다듬어 주셨다.

귀성열차 안에는 항상 사람이 많았다. 좌석은 물론 입석도 매진되어 말 그대로 콩나물 시루 같았다. 아버지는 그 와중에도 열차 내 작은 틈을 찾아 바닥에 신문을 깔고 앉아 나에게 포근하고 안락한 당신의 앉은 다리를 내 주셨다.

그곳에는 좌석번호도 초록색 좌석의 푹신한 쿠션도 없었지만 나에게는 이 세상 최고의 좌석이었다. '잠시 후 이 열차 출발하겠습니다. 즐겁고 편안한 여행 되십시오' 라는 기차내 안내방송이 나오면 기차는 늘 그렇듯 뿌연 연기와 기적소리를 뿜어내며 서서히 목적지를 향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면 내 심장도 기차 바퀴처럼 점점 더 빨리 뛰었고 형과 나는 서로를 바라보며 아무 이유 없이 환한 미소를 귀에 걸었다.

새벽 기차 시간에 늦지 않으려 우리는 늘 아침 식사도 거른 채 집을 나서야만 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늘 그랬던 것처럼 기차가 힘차게 달리기 시작하자 가방 안에서 누런 봉지를 꺼냈고 거기에는 누룽지와 삶은 계란 그리고 신문지 조각에 싼 굵은 소금 뭉치가 있었다. 그리고 그 때가 되면 신기하게도 나는 늘 허기를 느끼곤 했다. 아버지는 마치 내가 언제쯤 배가 고플 거란 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와 삶은 계란이다!" 내가 큰 소리로 호들갑을 떨면 아버지는 늘 "가만 있어 봐라!" 하시며 고개를 두리번거리셨다. 그리고 조금 있으면 가슴에 '홍익'이란 글자가 선명하게 쓰여진 유니폼을 입은 이동매점 아저씨가 귤 삶은 계란 오징어 카스테라 빵 맥주 등 먹거리를 잔뜩 실은 채 등장했다.

그러면 아버지는 자리에서 일어나 "보소 여기 사이다하고 환타 한 병 주이소"라고 말씀하시며 오백원짜리 지폐를 '홍익' 아저씨에게 내미셨다. 사이다는 나에게 환타는 형에게 건네주신 아버지는 다시 바닥에 앉으시며 "음식 먹기 전에는 늘 목을 축이고 먹어야 안 체한다 알았나?"라고 말씀하셨다. 형과 내가 입맛을 다시며 음료수 병을 입으로 가져 가자 옆에 있던 어머니가 "얘들아 먹을 게 있으면 어떡해야지?"라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형은 "아버지 먼저 드세요!"라며 들고 있던 환타 병을 내밀며 말했다. "아이다 나는 개안타. 느그들이나 마이 묵어라." 아버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형과 나는 일제히 어머니를 쳐다 보았다. 어머니는 목에 두르고 있던 목도리를 풀며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형과 나는 서로를 바라보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리고 우렁차게 "잘 먹겠습니다!"라고 외친 후 환타와 사이다를 마시기 시작했다.

입안 가득 달콤함을 선사하고 시원 짜릿하게 목을 스치고 넘어가는 사이다의 상쾌한 맛은 6살 어린 아이에겐 이 세상 최고의 맛이었다! 돌이켜 보면 나는 설날을 기다린 게 아니라 일년에 딱 두 번 한 번은 형이 소풍 가는 날 그리고 다른 한 번은 시골 가는 기차 안에서 마실 수 있었던 사이다를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사이다와 아버지가 까 주신 삶은 계란 두 세 개를 먹고 나니 어느새 기차 밖 눈 덮인 세상은 환하게 밝아 있었다. 나는 틈틈이 창문 너머로 흘러가는 세상 풍경을 바라보았다. 도심을 벗어난 기차는 우리에게 눈 덮인 자연의 아름다운 모습을 전해 주고 있었다. 창문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을 바라보고 있자니 내 눈가에는 마치 처마 밑 고드름처럼 졸음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나도 모르게 다리에 힘이 빠지고 내 머리는 어느새 아버지의 아랫배를 베개 삼아 꿈나라로 떠나고 있었다. 노는 시간과 자는 시간은 어릴 적부터 늘 짧게 느껴졌다.

얼마 잔 거 같지 않은데 어머니가 "정수야 다 왔다. 어서 일어나야지?"하며 내 몸을 일으켜 세우셨다. 졸린 눈을 비비며 게슴츠레 눈을 뜨니 아버지는 언제 일어나셨는지 좌석 위 짐칸에 올려 두었던 자주색 보자기로 싼 짐과 낡은 검정색 가방을 내리고 있었고 기차 안 스피커에서는 '잠시 후 이 열차 김천 김천 역에 정차하겠습니다. 내리 실 때는 잊으신 물건 없이 안전한 여행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라는 안내방송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아버지의 손을 잡고 기차에서 내리니 열심히 달려온 기차는 힘에 부쳐 거친 숨을 몰아 쉬듯 하얀 연기를 뿜어내고 있었고 서울과는 사뭇 다른 지방 공기는 내 눈가에 남아있는 졸음을 털어내며 어린 내 가슴 속 깊이 시원하게 스며들었다.

아버지의 시골 집은 김천 역에서 버스를 타고 약 사십 분 가량 들어가야 했다. 그리고 콘크리트 포장 도로가 끊긴 버스 종점에서부터 또 다시 약 사십 분 가량 걸어가야 했다. 할아버지에게 드릴 사탕과 담배 그리고 큰 집 식구들에게 줄 양말과 빨간 내복 등 선물꾸러미 짐을 들고 걸어야 하는 어머니는 하루 빨리 아버지 마을까지 도로가 포장되어 버스가 다녀야 한다며 걱정 섞인 불만을 토로하셨지만 형과 나는 아버지와 함께 걸어가는 서울에서는 감히 상상도 못할 그 시골 길의 때묻지 않은 자연풍경이 너무 신기하고 아름답게 보였다.

눈 덮인 넓디 넓은 들판과 사방을 마치 병풍처럼 둘러싼 높고 낮은 산들의 조화! 그 넓은 들판 여기저기서 평화롭게 먹거리를 찾고 노는 흑염소들! 꽁꽁 얼어붙은 저수지 한 켠에서 팽이를 돌리거나 썰매를 타는 아이들! 그리고 서울에서 보던 하늘보다 더 높고 푸른 시골하늘! 그곳에서 들이키는 무공해 시골 공기 맛은 짜릿하고 상쾌한 사이다보다 더 기막히고 독특한 한 마디로 끝내주는 맛이었다.

"정수야 저기 토끼다!" 앞서 걷던 형이 말했다. "어디 어디?"나는 아버지의 손을 놓고 형에게 달려갔다. "잘 봐. 저기 있잖아!"형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형의 손가락 끝을 조심스럽게 따라가자 그곳에는 마치 친구처럼 보이는 하얀 토끼 세 마리가 옹기종기 모여 귀를 쫑긋 세운 채 먹거리를 찾는 듯 주위를 두리번 거리고 있었다. 나는 얼른 뒤돌아 아버지에게 달려갔다. "아버지 저기 있는 토끼 좀 잡아주세요!" "정수야 토끼는 우리 보다 걸음이 빨라서 그냥은 못 잡는다. 내가 내일 덫 나서 잡아 주께!" "정말요?" 아버지는 대답대신 나를 내려다 보며 환한 미소를 짓었다.

다음날 아버지는 약속대로 눈 덮인 산 이곳 저곳에 내가 일어나기도 전인 이른 아침부터 덫을 놓아 토끼는 물론 꿩까지 잡으셨다. 고기가 귀하던 시절 토끼나 꿩 고기를 넣어 끓인 떡국의 담백하고 진한 국물은 그 맛이 아주 일품이었다. 아울러 고기 한 점이라도 더 건지려고 수저로 국물 속을 이리저리 헤집는 재미 또한 쏠쏠 했으며 그 국물에 밥을 말아 땅에 묻어 두었던 김장김칫독에서 꺼낸 시원한 김치를 손으로 쭉 찢어 밥에 올려먹는 맛 또한 한 마디로 끝내주었다.

어디 그 뿐인가? 아버지께서는 땔감으로 쓰려고 산에서 잘라온 나무더미에서 굵은 가지 하나를 꺼내 낫으로 고무줄 새총이나 모형 총 그리고 자치기 등의 놀이도구를 뚝딱 만들어 주셨다. 나는 아버지가 만들어 준 새총을 이리저리 신기하게 쳐다보며 말했다. "아버지 아버지는 어떻게 뭐든지 다 잘 만드세요?" 그러면 아버지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씀하셨다. "우리 정수도 나중에 커서 어른이 되면 이 아빠보다 더 잘 만들 거야." "정말요?" "그럼! 아빠도 너 만할 때 할아버지께서 새총이나 자치기 등을 만들어 주셨거든! 그 때 이 아빠도 정수 너처럼 할아버지한테 똑 같은 질문을 했었단다!"

아들의 부탁은 거의 다 들어주시고 내가 궁금해 하는 것에 대한 모든 정답을 알고 게시던 아버지는 내게 있어 이 세상에서 가장 크고 멋진 분이셨다!

3.

학교 교무실을 자주 찾는 학생은 크게 두 종류로 분류된다. 하나는 공부에 관심이 많아 선생님에게 질문하러 오는 공부벌레들. 그리고 다른 하나는 학교생활에 문제가 있어 혼나러 오는 소위 문제아들.

5월의 따스한 햇살이 고등학교 교무실 전체를 환하게 비추던 어느 화창한 날 나는 또 학생주임 책상 옆에 앉아 반성문을 쓰고 있었다. "아버지는?" 학생주임은 극히 사무적으로 물었다.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나 또한 무덤덤하게 답했다. 그러자 그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언제?" "오늘이요!" 나도 목소리 톤이 높아졌다. 그러자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손바닥을 들어 나를 때리려다 "됐다. 내가 인삼보다 귀하다는 고3 때려서 모하겠냐? 간밤 꿈자리도 사나워서 오늘은 내가 참는다 참아!"하고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나는 내심 그가 내 얼굴을 때려주길 원했다.

그러면 그걸 핑계 삼아 이 지겨운 학교를 뛰쳐나가고 아울러 학교도 그만 두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나는 이런 사소한 일 하나도 인생은 마음 먹은 대로 쉽게 되지 안는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에이 포 용지에 쓰던 반성문이 거의 끝나갈 무렵 누군가 다가오는 인기척에 고개 들어보니 아버지가 내 자리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낡은 황토색 면바지에 군청색 잠바 그리고 아무 문양이나 로고도 없는 검정색 모자를 쓴 아버지. 그의 운동화는 몇 년을 신은 건지 그 기억조차 아련할 정도로 낡아 있었다.

아버지는 학생주임과 눈이 마주치자 모자를 벗고 허리를 90도로 굽히며 정중히 인사했다. 하지만 학생주임은 의자에서 일어나지도 않은 체 모가지만 끄덕였다. 나는 싸가지 없는 학생주임보다 허리까지 굽혀가며 인사하는 아버지의 비굴함이 못마땅해 일부러 그의 눈길을 피하기 시작했다.

아버지께서는 언제 오셨는지 내 손을 잡으며 말씀하셨다. "선생님 우리 정수가 이번에는 또 무슨 잘못을 한 건가요?" 학생주임은 날 쳐다보며 말했다. "정수 너는 밖에 나가서 기다리고 있어."

나는 아버지 손을 살며시 벗어내고 교무실 밖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문득 아버지의 온기가 아직 내 손에 남아 있음을 느끼며 손을 쳐다봤다. 어릴 적에는 그렇게 크게 느껴지던 아버지의 손이 오늘따라 왜 이렇게 작게 느껴졌을까? 의아했다.

1층 교무실 밖 벤치에 앉아 허공을 쳐다보고 있은 지 십 여분의 시간이 흘렀을까? 뒤에서 '범수야' 하고 부르는 아버지의 음성이 들렸다. 나는 심하게 허리 숙인 아버지 때문에 심통이 나서 일부러 못 들은 척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밥은 묵었나?" 아버지가 어느새 내 옆에 와 앉으며 말했다. "선생님이 뭐래요? 또 정학이래요?" 나는 허공을 응시하며 나지막이 말했다. "정학은 무신 정학? 아들끼리 싸우기도 하는 거지 모 그깟 일로 정학?"

아버지는 교무실과 나를 번갈아 보며 내 기를 살려주시려는 듯 큰소리로 말씀을 이어 가셨다. "괘 안타 걱정 마라! 이 아버지가 다 해결 봤다 아이가!"

갑자기 그런 아버지가 안쓰러워 보여 나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장사하다 오셨을 텐데 빨리 가보셔야죠?" "안 그래도 오늘은 장사가 안돼 아직도 팔게 마이 남았다." 아버지는 자리에서 일어나 손바닥으로 바지를 툭툭 털며 말씀하셨다.

아버지와 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교문 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문득 어릴 적 아버지와 함께 걷던 시골 길이 생각났다. 나를 잃어버리거나 혹 내가 넘어질까 봐 항상 내 손을 꼭 잡아주시던 아버지! 하지만 아버지의 손을 잡고 함께 걸어본 지가 언제인지 그 기억조차 아련했다.

그리고 아버지 고향에 있는 산만큼이나 커 보여 내가 항상 올려봐야 했던 아버지는 언제부터인가 내가 내려보고 있었다.

"근데 오늘은 왜 싸웠는데?"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그냥이요." "그래? 선생님이 네가 왜 싸웠는지 그 이유를 말 안 해서 화가 났다고 하시더라." 나는 아무 말 없이 계속 발 걸음만 옮겼다.

"나는 누가 뭐래도 우리 아들 믿는다!" 아버지는 내 등을 토닥이며 말씀하셨다. 어느덧 교문에 다다르자 아버지는 바지 주머니에서 만 원짜리 한 장을 꺼내 내 손에 쥐어주며 말씀하셨다.

"배 곯지 말고 배 고프면 먹고 싶은 거 사먹어라. 느그 나이 때는 먹고 돌아서면 또 배 고프고 쇳덩이도 소화시킨다 아이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공부 잘하는 착실한 형과 달리 공부에 관심도 없고 문제만 일으키는 나 때문에 자주 학교에 불려 오셔야 했던 아버지는 단 한번도 내게 매를 들거나 싫은 소리를 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런 나를 형보다 더 믿어주고 챙겨주셨다.

"나는 누가 뭐라케도 우리 아들 믿는다!"

내 등을 토닥이며 밝은 미소와 함께 말씀하신 아버지는 어느새 교문 밖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계셨다. 수업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귓가에 스며들었지만 나는 한 참 동안이나 아버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가만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4.

학교 뒤에는 작은 산이 하나 있었다. 이따금 마음이 답답하거나 기분이 울적하면 나는 그 곳에 올라 소리를 지르거나 아니면 큰 바위에 누워 파란 하늘을 바라보는 것으로 답답해진 내 마음과 울적해진 내 기분을 달래주곤 했다. 아버지가 학교에 불려온 그 날도 나는 친구 현수와 함께 야간자율학습을 땡땡이 치고 학교 뒷산에 올랐다. 어둑해진 숲 속에는 귀뚜라미 같은 곤충들의 울음소리가 마치 작은 숲 속의 교향곡처럼 잔잔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고 초생달빛은 숲 속을 은은하게 비춰주고 있었다.

아버지가 준 돈으로 현수와 함께 학교 근처 중국집에서 짬뽕과 소주를 사 먹고 온 우리는 취기를 달래기 위해 잡초 위 바닥에 드러 누웠다. 눈 앞에 펼쳐진 밤 하늘은 어릴 적 시골에서 아버지가 들려주던 재미난 옛날 이야기를 들으며 바라보던 밤 하늘처럼 별이 많지는 않았다. 하지만 답답한 마음과 무거운 현실을 잠시 내려놓기에는 그럭저럭 괜찮아 보였다.

"현수 너 괜히 나 때문에 이러는 거 아냐? 담임한테 땡땡이 친 거 걸리기라도 하면 너희 부모님도 아시게 될 텐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 "너 때문에 그러는 거 아니니까 걱정하지마!" 현수는 자리에 누운 채 말했다. "정말이지?" "그래 정말이야." "그럼 다행이고!" 나는 다시 자리에 누우며 말했다.

국민학교 3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현수는 나와 중.고등학교까지 함께 다니고 있는 친구였다. 우리는 오랜 시간 우정의 탑을 함께 쌓아온 사이여서 서로에게 편하고 소중한 존재였다. 국민학교 때까지 상위권 성적을 유지하다 중학교에 진학하며 공부에 흥미를 잃은 나와는 달리 현수는 늘 공부 잘하고 말썽 안 피우는 모범생 친구였다.

어릴 적 내 부탁은 거의 다 들어주시고 내가 궁금해 하는 것에
대한 모든 정답을 가지고 계셨던 아버지는 적어도 나에겐 이
세상에서 가장 크고 멋진 분이셨다. 사람을 비교하는 못된 능
력이 생긴 나에게 아버지는 더 이상 이 세상 최고가 아니었다.


"참 오늘 그 덩치 큰 5반 녀석하고는 왜 싸운 거야?" 이번에는 현수가 자리에서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 "너도 알잖아. 내가 싸울 이유는 한 가지밖에 없다는 거." 나도 현수처럼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 "아버지 직업 때문에?" 나는 대답대신 고개를 위 아래로 끄덕였다. 그러자 현수는 "아니 고 3이나 된 녀석이 유치하게 왜 남의 아버지 직업 가지고 뭐라 그러는 거야?"라며 흥분하기 시작했다. "남의 아버지 직업 가지고 왈가왈부할 수도 있지. 단 나 없는 곳에서 내 귀에 안 들리게 하면 괜찮지만 내 귀에 들리면 왈가왈부한 값은 꼭 치러야지!" 현수는 아무 말 없이 내 등을 자신의 손바닥으로 어루만져 주었다.

모범생 현수는 내게 소중한 친구이면서 한편으론 부러움의 대상이기도 했다. 국민학교 3학년 때 현수네 집에 놀러 가면서부터 나는 난생 처음 우리 집과 남의 집을 비교하기 시작했다. 낡고 비좁은 한옥 우리 집과 달리 현수네 집은 부자들만 산다는 5층 아파트에서 가장 좋은 3층에 있었다.

항상 따뜻한 물이 나오고 우리 집처럼 화장실이 밖에 있지 않고 집 안에 있어 밤에 화장실 갈 일이 생겨도 전혀 무섭지 않은 현수네 집은 나에게 신기함과 부러움 그 자체였다.

물건과 물건을 비교하게 된 나는 어느새 사람까지 비교하게 되었다. 대학교수인 현수네 아버지는 늘 깔끔하게 양복을 입고 다니셨다. 그런 그의 모습은 일년 내 단 두벌의 남루한 옷으로 버티시며 생선 행상을 하는 우리 아버지의 모습과는 전혀 딴 판이었다. 나는 이따금 '우리 아버지도 현수네 아버지처럼 멋진 양복을 입고 생선장사 대신 회사에 다니셨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한 번은 우리도 현수네 집처럼 근사한 아파트로 이사를 갔는데 내가 너무 기분이 좋아 집 안에 있는 화장실 변기에 시원하게 소변을 보다 눈을 떠 보니 꿈이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소변 본 일은 애석하게도 현실이었다.

어릴 적 내 부탁은 거의 다 들어주시고 내가 궁금해 하는 것에 대한 모든 정답을 가지고 계셨던 아버지는 적어도 나에겐 이 세상에서 가장 크고 멋진 분이셨다. 하지만 사람을 비교하는 못된 능력이 생긴 나에게 아버지는 더 이상 이 세상 최고가 아니었다.

5.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찌감치 대학진학을 포기한 나는 동네 선배가 운영하는 사채 일을 도와주고 있었다. 일은 비교적 간단했다. 사채를 쓰고 갚지 않는 사람들을 찾아가 돈을 받아내는 일이었다. 그리고 일이 성공하면 선배와 나는 수익을 6대4로 나누었다. 물론 4가 내 몫이었다. 내가 이 일을 시작한 이유는 고졸학력으로 내 나이에 할 수 있는 다른 직업에 비해 비교적 많은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이다. 학창시절 공부를 안 한 내가 어느 날 갑자기 현수네 아버지처럼 양복 입는 대학교수가 될 순 없지만 적어도 우리 아버지처럼 일년 내 후지 구리한 옷을 입고 행상을 하며 선생들한테 허리 조아려 가며 초라하게 살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려면 돈이 필요했다.

한 가지 단점이 있다면 밤낮 가리지 않고 일을 하다 보니 친구 현수를 자주 만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물론 의대에 진학한 현수 또한 엄청난 공부 량에 파묻혀 쉽게 시간을 내지는 못했다.

늦게 일어나 아침도 거르고 집을 나서는 나에게 어머니께서는 빨리 기술을 배워 안정적인 사회생활을 하라고 재촉하셨다. 공부 잘하고 말 잘 듣던 든든한 장남이 군대에 가고 없자 나를 향한 어머니의 잔소리는 날이 갈수록 더 심해지는 것 같았다.

좋은 생선을 조금이라도 저렴하게 구입하려 새벽 일찍 집을 나가 하루 종일 행상을 하고 저녁 늦게 집에 오시는 아버지는 마지막으로 뵌 게 언제인지 기억조차 가물거렸다. 학창시절엔 그 나마 저녁시간에는 볼 수 있었지만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성인이 되어 집에 들어오는 시간이 늦어지고 외박도 하자 한 집에 살면서도 아버지와 나는 쉬 얼굴을 마주칠 수 없었다.

선배가 운영하는 사채 사무실은 재래시장 내 허름한 건물 2층에 있었다.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조용했다. 구석에서 경리 일을 보는 미스 김이 나를 보자 조용히 머리를 숙이며 인사한다. 선배가 인기척을 느꼈던지 들고 있던 신문을 내리며 말했다.

"정수 왔냐?" "왜 이렇게 조용해? 애들은?" 나는 선배 앞 검은 색 가죽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어 조금 있으면 올 거야. 내가 은행에 심부름 보냈거든." 선배는 신문을 접어 책상에 내려 놓으며 "김양아 여기 커피 두 잔만 아메리칸 스타일루다 타오너라!"라고 말했다. 선배가 내려 놓은 스포츠 신문을 집어 한국의 마돈나라는 가수 김완선 기사를 읽고 있자 어느새 김양이 커피를 타와 내 앞에 내려놓는다.

"미스 김 잘 마실게. 고마워!" 내가 인사를 건네자 미스 김은 수줍은 듯 미소와 함께 목례를 하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문득 말수도 적고 얌전한 미스 김은 왠지 이런 곳에서 일하기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그녀를 다시 한 번 더 쳐다보았다. 철재책상 앞에 앉아 경리 일을 보고 있는 미스 김을 보고 있자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미스 김도 제대로 된 부모를 만났으면 지금쯤 한참 멋 부리며 대학교 캠퍼스를 누비면서 젊음을 만끽하고 있을 텐데…' 그러자 마시던 커피 맛이 마치 세상 맛처럼 더 쓰고 더럽게 느껴졌다. 순간 나도 모르게 화가 치밀었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하루 빨리 부모 면허를 도입하던지 해야지. 개나 소나 무조건 낳아서 대체 뭘 어쩌겠다는 거야? 낳았으면 제대로 키우고 능력이 없음 아예 낳지를 말던가!" "야 정수야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선배가 말했다. "무슨 소리긴? 사람소리지! 오늘 특별히 할 일 없으면 어디 가서 소주나 한 잔 합시다" "따봉! 나야 좋지! 내가 언제 술 마다하는 거 봤냐!"
선배는 물 만난 생선처럼 앞장 서 사무실 문을 열고 나갔다. 그를 따라가던 나는 김양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십만 원짜리 수표 한 장을 그녀 책상에 내려 놓았다. "만 원짜리로 바꿔 드릴까요?" 김양이 말했다. "아니. 그거 미스 김 써!" "저 쓰라고요?" 미스 김의 눈이 커졌다. "그래. 큰 돈은 아니지만 그거 가지고 먹고 싶은 거 사먹던지 아니면 사고 싶은 옷을 사 입던지 오늘만큼은 다른 사람 말고 너만을 위해서 써! 그리고 사무실 일은 내가 책임질 테니까 그만 문 닫고 퇴근해!" 사무실 문을 닫고 나오는데 등 뒤에서 김양의 '감사합니다' 라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더 많은 돈을 주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해 오히려 미안했다. 나도 모르게 입에서 불만이 삐쳐 나왔다.
"십팔 사는 게 뭔지…"
6.
점심 무렵부터 시작한 술판은 저녁 9시가 다 되어 끝이 났다. 선배와 나는 소주를 얼마나 마셨는지 10병 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이후로는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술 마시고 집에 가는 길은 늘 숨이 찼다. 그래도 오늘은 전봇대나 아스팔트가 내 얼굴을 향해 날아들지는 않았다.
집에 도착해 대문을 밀자 '끼 이익' 거리는 낡고 녹슨 대문의 한 숨 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제 오니?" 좁은 마당 한 켠에서 연탄 불에 생선을 굽던 어머니가 나를 반겼다. "또 고등어?" 나는 코를 막으며 말했다. "고등어가 어때서? 이거 먹고 싶어도 못 먹고 사는 사람도 많아!" 어머니는 석쇠를 뒤 집으시면서 말했다. "아 네!" 나는 빈정거리 듯 말했다. "저녁 안 먹었으면 어여 씻고 같이 먹자. 아버지 곧 나오실 거다." 어머니 말이 끝남과 동시에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안방 문이 열리더니 파자마 바지에 반팔 흰색 런닝 차림의 아버지가 마루로 나왔다. "야 이게 누고? 우리 집 둘째 아들 정수아이가!" 나는 아버지를 향해 머리를 숙이며 최대한 술 마신 티를 안 내려 노력하며 말했다. "아버지 다녀오셨세요!" 하지만 내 혀는 의도와는 달리 심하게 휘청거렸다.
잠시 후 마루에는 늦은 저녁 밥 상이 차려졌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식사하시는 걸 나는 마루에 걸 터 앉아 보고 있었다. 된장찌개와 묵은 김치 그리고 아버지가 팔다 남아 가지고 온 고등어 구이. 우리 집 밥상은 늘 이런 식이었다. "아버지 우리도 남들처럼 고깃국에 매일 갈비 좀 먹으면 안됩니까?" 아버지께서는 엷은 미소만 지으실 뿐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대신 어머니가 말했다. "술 냄새 난다. 쓸데없는 소리 할거면 어여 씻고 자라! 그리고 말이 났으니 말인데 그 동안 네가 싸움질만 안 했어도…" "고마 해라!" 아버지가 어머니 말을 가로 막았다. "이제 정수도 다 컸는데 알건 알아야지요!" 아버지는 아무 말씀 없이 수저를 내려 놓으시고 방으로 들어가셨다. 이윽고 이어진 어머니 설명은 내가 학교에서 아이들과 싸워 그간 물어준 치료비만 해도 꽤 된다는 것이었다. 아울러 나에게 맞은 아이들의 부모들이 아버지에게 나를 고소한다며 요구해온 합의금도 꽤 된다는 것이었다.
나는 마루에서 벌떡 일어나 화를 내기 시작했다. "아니 왜 그런걸 지금 말하는 건데? 나보고 지금 미안해 하라고 말하는 거야?"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나는 미안했다.
"정수 넌 언제 철 들려고 그러니? 이 에미가 지금 너 미안해 하라고 이 말 하는 거니? 제발 네 형 반만 닮아라!" "제발 형하고 나좀 비교하지 말아요. 맨날 '네 형 반만 닮아라!' 지겹지도 않아요? 그리고 내가 엄마나 아버지를 다른 부모들하고 비교하면 좋아요?" 순간 내 자신이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버지를 다른 아버지들과 늘 비교해 왔으면서 어머니가 나를 다른 사람도 아닌 형과 비교하는 걸 싫어하다니!
내 자신에 대한 모순을 발견하자 갑자기 화가 치밀었다. 나는 마당 수도가에 놓여있던 양은 세숫대야를 발로 걷어차고 집을 나왔다.
7.
집을 나와 선배 사무실에서 먹고 잔지 벌써 삼일 째다. 여름 장마가 시작되려는지 아침부터 습하던 날씨는 점심 때가 되자 기어코 창가에 빗줄기를 토해내기 시작했다. "야 비 한번 시원하게 온다!" 창가에 서 담배를 피던 선배가 말했다. 나는 소파에 앉아 미스 김이 빨아다 준 뽀송뽀송한 양말을 신으며 나갈 채비를 했다. "야 비 오는 데 나가려고?" 선배가 나를 보고 말했다. "돈 되는데 비가 문제야? 눈보라가 몰아쳐도 돈이 된다면 가야지!" 나는 동생 두 명을 데리고 사채 삼천만 원을 빌려 쓰고 갚지 못하는 분식집으로 찾아갔다. 원래 이 집은 동생들 담당이었으나 그들이 돈을 제대로 받아내지 못해 내가 직접 나선 것이었다.
"이 집입니다 형님!" 키도 덩치도 큰 동생이 말했다. "열어!" 유리로 된 미닫이 문을 '드르륵' 열고 들어서자 주인 아줌마가 '어서 오세요' 하며 우리를 반기려다 동생들을 발견하자 그녀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피어났다. 나는 동생들에게 "일단 엎고 시작하자"라고 명령했다. 그러자 그들은 닥치는 대로 분식집 안을 뒤집어 엎기 시작했다.
식탁이 뒤집어 지고 의자와 수저통이 날아가고 벽 유리가 깨지는 등 분식집 내부가 아수라장이 되자 처음에는 동생 들을 말리려던 오십대로 보이는 그 주인 아줌마는 결국 바닥에 주저 앉아 울기 시작했다. "울지마 울긴 왜 울어~ 그 까짓 돈 갚으면 되지~"키 작은 동생이 주인 아줌마 곁에서 개사한 노래를 부르며 깐족거렸다.
"이 여자가 주인이냐?" 내가 물었다. "주인은 이 여자 남편인데요. 지금 없는 것 같습니다." 키 큰 동생이 말했다. 그 때였다. 한 중년 남자가 시장 바구니를 들고 들어오다 난장판이 된 분식집 내부를 보자 시장 바구니를 떨구었다. 그리고는 곧 주인 아줌마에게 달려가 어깨를 감싸 안으며 "여보 괜찮아? 어디 다친 데는 없어?"라고 말했다.
순간 그 중년남자의 모습이 낯설지 않았다. 목소리도 귀에 익은 듯 했다. 나는 무릎을 꿇고 앉아 그 남자의 얼굴을 자세히 보며 말했다.
"혹시 용수 아저씨?" 그러자 그 남자는 "내 이름이 용수요. 그런데 댁은 뉘 시요?"라고 반문했다. 그 남자의 얼굴을 자세히 보자 확신이 섰다. 그는 아버지 고향친구인 용수 아저씨였다! "아저씨 저 모르시겠어요? 저 정수에요 김정수!" "뭐 정수? 네가 김천 근우 아들 김정수라고?" 동생들에게 엉망이 된 분식 집을 원래보다 더 좋게 만들어 놓으라고 시킨 나는 용수 아저씨와 함께 인근 포장마차로 자리를 옮겼다.
"아저씨 도대체 이게 얼마만이에요? 그 동안 왜 우리 집에 안 오셨어요?" 나는 아저씨의 잔을 채우며 말했다. "그게 말이다…" 아저씨는 주춤거렸다.
아저씨는 우리 집에 자주 놀러 오시던 아버지의 고향 친구였다.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신 용수 아저씨는 서울에 있는 한 은행에 다니고 계셨고 우리 집에 놀러 올 때 마다 어린 나에게 오백 원짜리 지폐를 용돈으로 주시거나 아니면 종합과자선물세트를 사다 주시곤 하셨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아저씨는 우리 집 출입을 딱 끊으셨다.
"그래 아버지 어머니는 안녕 하시니?" 아저씨가 말씀하셨다. "그럼요." "아직도 그 산 동네 한옥 집에 살고?" "좀 지겹지만 아직 그 집에 살아요." 나는 웃으며 말했다.
"미안하구나. 나만 아니 였으면 네가 그렇게 살고 싶어한 아파트로 진작에 이사했을텐데…" "아파트요? 아저씨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잠시 주춤이던 아저씨는 거듭된 내 부탁에 세월이란 보자기에 쌓여있던 오래 된 이야기를 천천히 풀어놓기 시작했다.
내가 현수네 집에 다녀온 후 학교 숙제로 쓰던 그림 일기장에 '나도 아파트에서 살고 싶다'라고 쓴 내용을 본 아버지는 다음 날 바로 용수 아저씨를 찾아가 주택청약 저축과 또 다른 적금구좌 하나를 개설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워낙 성실하고 근면하신 분이셨지만 그날 이후로 더욱 더 악착같이 돈을 모으셨다고 한다. 리어카에 생선을 가득 식고 하루 종일 행상을 해야 하는 힘든 일을 하셨지만 점심으로 즐겨 드시던 순댓국 값을 아끼기 위해 매일같이 어머니가 싸준 차디찬 도시락으로 끼니를 때우셨다고 한다. 아울러 자식들에게 못 배운 설움을 물려주지 않으려 교육 때문에 서울에 처음 올라왔을 때는 작고 허름한 집이라도 자기 집에서 아이들을 키워야겠다는 일념 하에 아버지는 1년 365일중 단 이틀 추석과 설날만 쉬고 일 하셨다고 한다. 특히 처음 서울에 와 아무 연고도 없고 세상 물정도 모를 때는 영등포 역에서 지게로 짐을 나르는 짐꾼 일도 하셨으며 때에 따라선 비가 오고 눈이 오는 날 영등포에서 장충동까지 그 먼 길을 비나 눈을 맞으며 짐을 지고 걸어갔다고 한다.
"정수야 네 아버지는 정말 훌륭한 사람이란다. 나도 자식 키우는 부모지만 난 내 모든 걸 전부 다 자식들에게 주진 못한다. 물론 나도 부모니까 자식들 뒷바라지야 하겠지만 부모이전에 나도 사람이니까 혼자 맛있는 것도 먹을 수 있고 마음에 드는 옷도 사 입고 가끔은 여자 있는 술 집도 갈 수 있는데 네 아버지는 정말이지 평생을 하루같이 너희 두 아들만 위해 자신의 모든 걸 희생한 사람이란다!"
아저씨는 목이 마른 듯 이번에는 술잔대신 물잔을 비우고 말씀을 이어갔다.
"어디 그 뿐이니? 내가 돈 욕심에 은행을 그만두고 네 아버지가 아파트 사려고 모아둔 돈을 빌려 사업하다 잘못돼 그 돈을 다 날렸지만 네 아버지는 단 한 번도 나한테 싫은 소리를 하거나 경찰에 신고하지도 않았단다. 이미 돈은 날라간 거 친구까지 잃고 싶지 않다며 말이다."
아저씨의 말을 듣고 있자니 아버지의 모습이 머리 속에 떠 올랐다. 그리고 그간 아버지를 남과 비교했던 내 자신이 한 없이 밉고 또 미워졌다.
"정수야! 네 아버지는 말이다 키도 작고 체격도 왜소하지만 자식을 위한 희생과 남을 배려하는 마음만큼은 그 누구도 쉽게 흉내낼 수 없는 거인이란다! 한 마디로 작은 거인이지 작은 거인!"
용수 아저씨와의 짧은 재회를 끝낸 나는 아버지가 보고 싶어 무작정 집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여름 장마비가 주적주적 내리고 있었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얼마나 달렸을까? 이미 내 몸은 비와 땀으로 범벅이 되어버렸다. 대문을 박차고 집 안으로 들어선 나는 무조건 아버지를 부르기 시작했다.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하지만 아무 대답이 없었다. 아니 대답은 커녕 늘 집에 계시던 어머니마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안방 문도 열어보고 부엌 문도 열어보고 연탄을 보관하는 창고 문도 열어봤지만 그 어느 곳에도 아버지나 어머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 때였다. '끼 이익' 대문 소리가 나더니 옆 집 사는 할머니가 들어오셨다. 나는 "안녕 하세요?" 하고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할머니는 그리 밝지 않은 얼굴로 내게 오시더니 작은 종이 쪽지 한 장을 건네셨다. 거기에는 '강북대 부속병원 응급실' 이라고 적혀 있었다.
8.
'제발 제발 제발!'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가는 동안 나는 마음 속으로 얼마나 간절히 빌고 또 빌었는지 모른다. 아버지가 제발 무사하시길 말이다.
문득 창 밖을 보았다. 빗줄기는 멈추었지만 내 눈에는 계속해서 빗줄기가 내리는 것처럼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입 안으로 스며들었다. 택시를 타고 가는 동안 옆 집 할머니가 해주신 말이 귓가에 맴 돌았다.
'그 동안 어디 있었어? 네 아버지가 널 얼 매나 찾았는지 몰러~ 교통사고 나서 병원에 실려 가서도 계속해서 너만 찾는댜~ 어여 가봐~'
택시에서 내린 나는 응급실을 향해 무조건 달리기 시작했다. 숨이 턱 밑까지 차 올랐지만 힘든지도 몰랐다. 응급실 안내 데스크에 도착한 나는 헐떡이는 숨을 고르며 "저 저기요. 김 김근우 환자를 찾는데요?"라고 겨우 말했다. 그 때였다.

뒤에서 '정수야'라고 부르는 소리에 고개 돌려보니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나를 보자 마자 내 손을 잡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정수야 네 아버지 불쌍해서 어떡하니? 남들처럼 호강도 한 번 못해봤는데 네 아버지 불쌍해서 어떡하니? 너희들 키운다고 먹고 싶은 고기도 한 번 실컷 못 먹고 매일 일만 했는데 너희 아버지 불쌍해서 어떡하니?"
나는 어머니가 볼까 바 고개 돌려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어머니가 들을까 바 우는 소리를 내지 않으려 입술을 깨물었다.
갑자기 쏟아진 장마비에 급 브레이크를 밟던 트럭이 인도로 미끄러지며 아버지를 덮쳤고 아버지는 응급실에 실려와 급히 수술을 받고 지금은 중환자실에 누워 계셨다.
의사는 외관상 보이는 골절은 큰 문제가 아니나 장기파손이 심각해 하루 이틀 경과를 지켜 봐야 한다고 했다.
하루 종일 눈물이 나왔지만 그 눈물은 쉬 멈추지 않았다. 어릴 적 아버지와 함께 걸었던 시골 길을 생각해도 눈물이 나왔고 며칠 전 아버지가 드시던 밥 상을 생각해도 눈물이 나왔다. 어머니와 난 그렇게 아버지 생각에 하루 종일 눈물만 흘렸다. 사랑하는 아버지가 병상에 누워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어도 자식으로서 아무 것도 할게 없다는 무능력에 내 자신이 밉고 그래서 또 눈물이 나왔다.

"네 아버지는 말이다, 키도 작고 체격도 왜소하지만 자식을 위한
희생과 남을 배려하는 마음만큼은 그 누구도 쉽게 흉내낼 수 없는
거인이란다! 한 마디로 작은 거인이지, 작은 거인!"


병실 근처 의자에 앉아 한 없이 흐르는 눈물을 주체 못하고 있는 그 때였다.

"김근우씨 보호자 되시죠?" 고개 들어 쳐다보니 간호사였다. "네." 짧게 대답했다.

"김근우씨가 지금 의식이 돌아와서 식구분들을 찾으세요."

간호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나는 어머니를 모시고 병실로 달려갔다. 작고 왜소한 아버지의 손을 잡고 그 앞에 앉았다.

아버지 얼굴엔 피 멍이 들어 작은 얼굴이 더 작고 초라해 보였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 상태에서도 어머니와 나의 걱정을 덜어주려는 듯 애써 미소를 지으려 하셨다. 하지만 그럴수록 통증이 있는 듯 간간이 인상을 쓰기도 했다.

"아버지 미안해요. 그리고 사랑해요!" 나는 아버지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

"우 울지 마라! 사내 놈이 눈물이 많으면 안 된다." 아버지는 힘에 겨운 듯 잠시 숨을 고르고 계속해서 말을 이으셨다. "아들 미안하다. 에비 잘 못 만나 남들마냥 아파트에서 매일 고기 국에 갈비도 못 먹고 좋은 옷도 못 입고 살게 해서 억수로 미안하다."

"아니에요 아버지! 제가 잘못했어요. 죄송해요." 나는 아버지 앞에서 참았던 눈물을 터 틀이며 엉엉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콧물과 눈물이 범벅이 되어 내 시야를 가렸지만 나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아버지 어서 일어나세요. 제가 그 동안 아버지 가게 차려드리려고 돈 모았어요. 그리고 아버지 맨날 따듯한 물 나오는 아파트에서 살게 해드리려고 적금도 붓고 있단 말이에요. 아버지 아버지!"

나는 절규에 가까운 소리를 토해내고 있었다.

"정수야 내년에 느그 형 제대하면 우리 오랜 만에 기차 타고 시골에 가면서 사이다도 사 묵고 아버지랑 손 잡고 시골 길도 걷고 토끼도 잡고 놀자 알겠지?"

아버지는 내 손을 꼭 잡으시며 말씀하셨다. 나는 설움이 복받쳐 울먹이며 아무 대답도 못하고 고개만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그렇게 내 눈 앞에서 내 손을 잡으신 채 어머니와 나 그리고 군대에 가 있는 형을 남겨놓고 우리 곁을 떠나셨다.

낮부터 내리기 시작한 여름 장마비는 어머니와 내 눈가에 흐르는 눈물처럼 그날 밤에도 쉬 멈추지 않고 계속 내렸다.

9.

매년 여름 장마가 시작될 무렵이면 나는 어머니를 모시고 아내와 함께 아버지의 시골 고향 집에 가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얘 에미야! 돼지머리고기 챙겼냐?" "네 어머니! 상하지 말라고 아이스 박스에 넣어 잘 챙겼어요." "이민간 너희 형도 같이 가면 참 좋으련만…"

어머니는 아버지 기일에 쓰려고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 가장 좋아하셨지만 돈 때문에 마음껏 드시지 못했던 순댓국에 들어가는 돼지머리고기를 매년 양껏 준비하셨다.

어릴 적 아버지와 함께 걷던 시골 길은 세월의 풍파 때문에 많이 변해있었다. 어머니의 바램처럼 이제 아버지 고향마을까지 아스팔트가 곱게 포장되어 편하게 차로 방문할 수 있게 되었다.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문명이 발전되어 살기 편한 곳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그게 살기 좋은 세상은 결코 아니었다.

조금 불편하고 조금 모자랐어도 나는 아버지와 함께 시골을 찾던 옛 시절이 더 살기 좋은 세상인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자주 찾아 뵙지 못한 아버지 산소에는 그간 풀이 많이 자라있었다. 고향을 지키는 사촌 형님이 있어 간혹 아버지 산소를 돌봐주긴 하지만 나는 내가 직접 벌초할 때 마음이 편해짐을 느낄 수 있었다.

벌초 후 집에서 준비해온 음식을 아버지에게 대접한 우리는 아버지 곁에 둘러앉아 늦은 점심을 먹기 시작했다.

목을 적시라며 와이프가 건넨 사이다를 받아 한 모금 마셨다. 어릴 적 아버지가 기차 안에서 사주었던 사이다와 똑 같은 회사에서 만들어낸 똑 같은 제품이었지만 왠지 맛이 달랐다.

아마도 그건 아버지의 사랑이 담기지 않은 사이다였기 때문인 것 같았다!

평소보다 더 아버지가 보고 싶은 오늘따라 '성인이 되면 누구나 아이를 낳을 수는 있지만 아무나 부모가 될 수 없다'는 내 신념이 더욱 더 굳어지는 것 같았다.

나는 아버지의 산소를 바라보며 마음 속으로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버지 아버지는 제가 이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이 세상 최고의 남자였어요. 아버지 저도 아버지처럼 자식을 위해 모든 걸 희생할 수 있는 훌륭한 아버지 아버지 다운 아버지가 될 수 있을까요?'

〈끝〉

■수상소감…'내일'이라는 희망의 시앗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루하루 죽지 못해 사는 사람과 단 하루를 살아도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사는 사람! 그리고 이 두 종류의 기준은 삶에 대한 희망 존재유무의 차이가 아닐까 싶습니다. 지독한 불경기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고통 받고 있습니다.
하루 아침에 집을 잃고 잘 다니던 직장을 잃고 그래서 사랑하는 가족과 헤어지고…. 저 또한 그런 사람 중에 하나입니다. 하루하루 사는 게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제게 주신 소중한 삶을 오늘이 힘들다는 이유만으로 결코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밤 마다 찾아오는 자괴감과 힘든 현실을 이겨내려 술과 담배 대신 펜을 잡고 글을 썼습니다. 제가 쓴 건 단순한 소설이 아니라 '내일'이란 희망의 씨앗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씨앗은 중앙신인문학상이란 작은 꽃봉오리가 되어 제 입가에 실로 오랜 만에 밝은 미소를 걸어 주었습니다. 이제 저에겐 그 '꽃봉오리'를 만개시켜야 할 책임이 생겼습니다.
편치 않은 현실의 벽이 있지만 중앙신인문학상이 제게 준 희망을 벗삼아 앞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과 희망을 전해줄 수 있는 따듯한 글을 쓰겠습니다. 그것만이 제게 능력주신 하나님과 제 글을 뽑아주신 심사위원 모두에게 진정 감사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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