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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신인문학상' 수상자 발표

예비 문인들의 뜨거운 관심 속에 개최된 2011년도 '중앙신인문학상' 수상자가 선정됐다. 단편소설 당선작으로는 노숙자를 통한 처절한 사회상과 삶의 비화를 그린 이상호씨의 '숙자가 천사를 만났다'가 뽑혔다. 시 부문에서는 윤석호씨의 '작용 속 반작용'이 올해 처음 추가된 수필 부문에서는 개와 고양이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 데이비드 이씨의 '키리와 미코'가 당선의 영예를 안았다. 논픽션 부분은 당선작을 내지 못했다. 가작 수상작은 소설 부문에 권이조씨의 '월광곡'과 박숙자씨의 '건너야 할 강' 시 부문에 장성희씨의 '기적은 기적을 울리며 오지 않는다'와 윤민초씨의 '막국수 그 푸른소리' 수필 부문에 이필순씨의 '25초간의 걸음마'와 김연아씨의 '깊고 샛노란 밤' 논픽션 부문에 윤재현씨의 '송기죽을 먹는 것 보다 낫다'와 홍을미씨의 '희망봉에서 자라는 나무'가 뽑혔다. 올해 소설 부문 심사를 맡은 원로 소설가 홍승주 선생은 응모작들이 예년보다 더 참신한 소설적 허구와 의식 구조와 구성에 접근 신선하고 매력적인 테마와 탁월한 소재로 이민소설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 총평했다. 특히 당선작 '숙자가 천사를 만났다'는 "절묘한 구성과 군더더기 없는 차분한 전개 생략되고 집약된 문체의 묘기가 돋보였다"고 평가했다. 시와 수필 부문의 심사를 담당한 원로 배정웅 시인과 김호길 시인은 시 당선작인 윤석호씨의 작품이 적절한 비유법의 구사 등 개성있는 시적발성을 보였다고 선정 이유를 설명했다. 수필 당선작인 데이비드 이씨의 작품은 담담한 필치가 돋보였다고 평가했다. 논픽션 부문의 심사를 맡은 김광주 전 UC샌디에이고 교수는 "이민 생활이라는 특수한 환경에서 경험한 소재들을 사실적 감동으로 엮어내기 위해 수고한 응모자들의 노고를 치하하고 싶다"고 밝혔다. 중앙신인문학상 시상식은 오는 4월22일 오후 5시에 중앙일보 갤러리에서 열린다. 이경민 기자

2011-03-30

[중앙신인문학상-논픽션 부문 당선작] 미켈란젤로의 꿈

남편은 저 무거운 조각을 언제 집에다 옮겨 놨을까? 하나같이 얼굴표정이 똑같은 아버지의 조각들. 하나같이 무표정한 얼굴에 꼭다문 입술. 동그라미를 자로 잰 듯한 눈동자들. 아버지의 이십년 삶이 그랬듯이 아버지의 조각품들은 거의 같은 표정들을 하고 있었다. 남편이 집에 옮겨다 놓은 엘비스 프레슬리 조각도 그 중의 하나였다. 신기하게도 엘비스 프레슬리나 케네디 대통령이나 모세나 다윗이나 모두 같은 표정들을 하고 있었다. 심지어 성모상도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이민와서 아버지가 살았던 세월들처럼 겉으론 화려한 것 같지만 늘 표정없는 같은 시간들이 쌓인 미국의 표정이기도했다. 오클라호마에서 만들었던 세 명의 미국 대통령 조각들을 제외하곤 사는 사람도 주문하는 사람도 없는 조각들을. 아버지는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만들었다. 하나의 조각품이 끝나면 누가 재촉하기라도 하듯이 다음 조각 데생에 들어갔고 그런지 몇 달 뒤면 어김없이 마당 한구석엔 새 조각품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 조각품의 재료는 시멘트와 시멘트가갈라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아크릴 아세테이트라는 하얀 물체를 섞어서 만든 켈스톤이라는 재료였다. 켈스톤의 켈은 아버지 예전의 후원자 이름이었다. 그 켈씨는 몇 년에 걸쳐 시멘트가 갈라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실험을 하면서 매번 새로운 화합물이 들어갈 때마다 아버지에게 그 재료를 가지고 와서 시험을 해보게 하였다 그중에서 맨 마지막에 만든 켈스톤이 조각품이 갈라지는 것을 방지하는데 제일 효과가 있었다. 아버지는 그 때나 지금이나 주로 외부에 설치할 조각을 만들었기에 시멘트가 갈라지는걸 방지하는 게 최우선 과제였다. 대통령 조각을 만들기 전에도 몇 개의 조각을 만들었는데 시간이 흐른 뒤 균열이 가서 실패한 적이 있었다. 그 중하나는 오클라호마시티에 증정한 사자상이었고 다른 하나는 털사 수녀원 입구에 설치한 피에타상이었다. 생전에 아버지는 그 두 조각품을 다시 보지 않으셨지만 남편은 가끔 그 수녀원 앞을 지날 때면 웬지 갈라진 조각이 자기탓 인양 고개를 들수가 없었노라고 했다. 그 조각들은 켈스톤이 아닌 다른 재료로 만든 것들이었다. 아버지는 정식으로 조각을 공부한 적이 없다. 한국에서는 미군부대 앞에서 오랫동안 미군들의 초상화을 그리며 사셨다. 6.25전쟁이 일어나기전 홀로 월남한 아버지는 파주 부근에 있는 미군부대앞에 정착을 하고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어릴 적부터 그림에 소질이 있었던 아버지는 황해도 해주가 고향인데 해주에서 중등과정인 예술학교를 졸업하고 북한 인민군대를 따라다니며 초상화를 그리셨다고했다. 그 당시에 김일성장군의 초상화도 직접 그린 적이있는데 김일성은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키가 훤칠한 미남이었다고 기억하셨다. 그런데 6.25전쟁준비로 더 많은 군인들이 필요했던 북한정권은 더 많은 쳥년들을 군인으로 징집을 했다. 아버지는 군대가기가 죽기보다 싫어서 가족들을 두고 야반도주를 해 남한으로 건너오셨는데 그 때가 육이오 전쟁 전 무렵이었다. 아버지는 파주에서 남편의 이모부 되는분의 소개로 시어머니를 만나서 가정을 꾸리셨다. 손재주가 많으셨던 아버지는 파주부근의 싼 땅을 사서 집도 직접 짓고 집 담장에는 금강산 벽화를 그리고 마당 한가운데는 다리가 있는 큰 연못도 만들었다고 남편은 얘기를 했다. 남편은 유달리 그 연못을 좋아했는지 나중에 우리도 집을 사면 그런 연못을 만들자고 했다. 남편의 가족에겐 연못이 있던 그집에 살던 때가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던 것같았다. 그러나 아이들이 자라면서 남편의 가족들은 아버지 초상화 수입만으로 살기엔 너무 빠뜻해졌다. 당시 남편의 형은 서울에서 대학교를 다니고 있었는데 등록금을 낼 때마다 동네 사람들에게 빚을 져야만 했다. 나머지 동생들은 그나마 고향에서 학교를 다녀 학비가 덜 들었는데도 결국 세 동생 중 1명은 학비를 제때 못내 고교 중퇴를 했다. 그 당시 아버지의 꿈은 큰 아들이 어서 빨리 대학을 나와서 집안을 살리는것이었다. 큰 아들의 한 학기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하루에 초상화를 몇 십장씩 그렸다고 하셨다. 그러나 아버지가 허리가 휘도록 초상화를 그려 대학을 졸업한 큰 아들은 집안에 별 보탬이 되지 못했다. 중소기업 사장 막내딸 사위가 된 큰 아들은 처갓집에서 인정받는 사위로 살기 위해 처갓집에서 아들 노릇을 했다. 게다가 중학교부터 서울로 나가 공부를 한 아들은 식구들에게 별 애틋한 정도 없었다. 그런데 그 당시 남편 집에는 고아원을 뛰쳐나와 오갈 데 없는 처지에서 남편의 집으로와 한집에 살게 된 누이가 한 명 있었다. 남편말로는 남편이 누나라고 불렀으니 몇 살 위 였던것 같다고 했다. 이름이 영희였던 이 누이는 낮에는 미군장교집에서 파출부 노릇을 했는데 그 집에 심부름을 하고 다녔던 미군사병과 눈이 맞았다. 이름이 제이슨이었던 이 사병은 나이 스물도 안되는 이 한국처녀에게 결혼을 해서 미국으로 가서 함께 살자고 했다. 영희누이로서는 딱히 오갈데도 없는 데다 형편이 어려운 남편집에 자기까지 덤으로있는 것도 내심 미안했던지라 쉽게 허락을 했다. 그런데 미국을 가기 위해선 이민서류를 작성해야했는데 그 영희 누이는 호적이 없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영희 누이를 딸로 호적에 입적시켜 이민을 갈수 있게 도와 주었다. 그 일이 고마웠는지. 영희 누이는 미국에 간지 일년 만에 소식을 보내왔다. 자기가 사는 곳은 오클라호마주 클레모어라는 조그만 시골동네 인데 비행기표를 보낼 테니 한번 다녀 가시라는 내용이었다. 당시 아버지는 오랜 초상화 작업으로 늑막염에 걸려서 병원에서 수술을 하고 치료를 받는 중이었다. 무표정한 얼굴에 꼭다문 입술, 동그라미를 자로잰 듯한 눈동자들… 아버지의 이십년 삶이 그랬듯이 아버지의 조각품들은 거의 같은 표정들을 하고 있었다 초상화 주문도 예전 같지가 않았다. 80년대 중반들어서면서 미군들이 서서히 본국으로 돌아가 파주부대에도 미군들이 줄어드는 추세였다. 그렇다고 평생을 그림만 그린 아버지가 한국에서 다른걸 시작하기도 막막한 상태였다 나중에 아버지는 남편에게 그 당시엔 어쨌든 미국에 가기만하면 그곳에 정착을 하리라고 마음을 이미 먹고 있었다고 하셨다. 아버지가 미국에 와 보니 영희누이가 사는 것도 그다지 여유있어 보이지 않았는데 어쨌든 아버지에게 미국은 아버지 반생의 나머지 기회였다. 그 무렵 아버지는 호세라는 쿠바사람이 운영하는 스테인 드글라스와 소형조각을 만들어 파는데 취직을 하게 되었는데 약삭빠른 호세는 아버지가 조각에 소질이 있다는 것을 곧바로 간파했다. 그래서 주급 200불을 주고 아버지를 정식직원으로 채용했다. 그 무렵 호세는 몇 군데에서 야외용 조각을 주문받았는데 아버지에게 그걸 만들라고 했다. 아버지는 시간에 관계없이 밤낮으로 일을 해서 주문날짜에 맞추어 조각들을 만들었는데 그 조각들의 가격에 비하면 호세가 아버지에게 쥐어 주는 돈은 너무 터무니없이 작았다. 그 주문받은 조각품 중 하나는 미국의 초대 대통령 토마스 제퍼슨 상이었다. 클레모어에 위치한 라저스 칼리지에서 주문한 조각이었다. 이 대학은 웨스트 포인트출신의 로저스라는 사람이 건립한 대학이었는데 학생수는 많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 학교를 졸업한 동문들이 제법 그 부근에서 성공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그 동문들이 펀드레이징을 해서 별 특징없이 밋밋한 캠퍼스에 조각품을 하나 세우기로 했다. 아버지가 대형조각을 하게된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다. 아버지의 조각방식은 약간 특이했다. 일단 그림으로 조각을 데생한 다음 철근으로 전체적인 윤곽을 잡았다. 철근을 끊어내고 구부리고 오므리고 하는 작업이 마치 철공소일를 방불케 했다. 그런 다음 켈스톤을 물에 개어 시멘트 바르듯 발라나갔다. 어떻게 보면 예술을 한다기보다 집을 짓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의외로 드넓은 미국에서 이런 대형조각을 하는 사람들이 드물었다. 대부분의 실내용 대리석 조각은 이태리에서 수입을 해오고 정원용이나 묘지에 설치하는 조각들은 예술성보다는 실용성 위주의 장식용 조각들이 공장에서 대량으로 생산되어 팔리고 있었다. 아버지는 3개월 만에 토마스제퍼슨을 완성했다. 켈스톤으로 만든 조각은 훨씬 섬세한 표현을 할 수 있어 토마스 제퍼슨의 얼굴은 실물사진과 흡사했고 또한 토마스 제퍼슨이 취임식에 입었다는 연미복은 바지의 주름까지도 표현될 정도로 입체감이 있었다. 대학 학장은 몹시 흡족해서그뒤 조지 워싱턴 상을 하나 더 만들어달라고 아버지에게 부탁했다. 그리고 학교측에서는 아버지에게 레지던트 아티스트라는 직함을 주며 사택과 생활비를 제공했다. 아마도 그때가 아버지 인생에서 제일 황금기라고 할 만했다. 한국에서 온 한 무명의 초상화가가 미국엘 와서 영주권을 받고 대학의 레지던트 아티스트가 된것이었다. 내가 남편을 만난 것은 그 무렵이었다 당시 나는 미국에 와서 운전면허시험을 세번 연속 낙방하고 실의에 빠져 있을 때였다. 이곳에서는 운전을 한다는 것은 걸을 수 있다는 의미와 비슷하다. 가뜩이나 운동신경도 둔한데다 한국에서는 운전대 한번 안 잡아보고 이민을 온 것이다. 내가 이민 올 80년대 후반만 해도 한국은 자가용이 그렇게 흔치 않던 때였다. 더구나 결혼도 안한 미혼의 직장인이 운전을 하는 경우는 더더욱 흔치 않았다. 늘 그렇치만 참으로 막연하다는 것이 사람을 잡는경우가 많다. 당시 미국이란 나라에 대해 내가 가지고 있던 지식은 참으로 막연하고 뜬구름 같은것 이어서 무조건 잘 사는 나라였다. 그 잘산다는 의미가 부자집에서 잔치상을 차려놓고 나를 기다리는 의미로 받아 들였는지 난 미국을 가기 위해 준비한게 거의 없었다. 더구나 처음에 내가 당도할 목적지가 캘리포니아임에도 불구하고 겨울옷만 잔뜩 싸가지고 온 걸 보면 거의 한심한 수준이라고 볼 수도 있었다. 미국와서 처음 석달은 캘리포니아 언니집에 있다가 간호원으로 있던 선배가 있는 오클라호마로 가게 되었다. 그 곳에서 다시 간호학공부를 할 예정이었다. 오클라호마는 캘리포니아보다는 주가 작고 시골이어서 학비나 생활비가 싸다는게 선배의 충고였다. 당시 나에게는 한국에서 간호원 근무를 하면서 모은 돈 기천불이 전재산이었는데 운전면허 레슨으로 이미 천오백불이 넘게 지출이 된 상황이었다. 선배는 너처럼 둔한애는 처음이라고 했다. 자기도 두번 째는 기를 쓰고 연습해서 붙었는데 어찌 세 번을 늦가을 낙엽 우수수 떨어지듯이 그렇게 연속으로 떨어지는지 그런 애는 처음이라고 했다. 그래도 필기는 딱 한번에 붙었는데 실기를 보러가서는 시험관만 보면 주눅이 들어 가뜩이나 안되는 영어가 더 안됐다. 오죽하면 여자시험관이 페러럴 파킹을 해보라고 하자 "예써"하고 대답을 했을까? 그날 시험은 5분도 안되어 끝이 났다. 그러다 보니 오클라호마엘 여름에 왔는데 가을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선배네에서 누구를 저녁초대를 한다고 하면서 부산을 떨었다. 선배네와 친한집 아들이라고 했다. 그 아들은 운동을 하다왔는지 태극기 문양이 그려진 하얀 티셔츠에 빨간 다우다 반바지를 촌스럽게 입고 선배네집으로 들어왔다. 교민 축구시합을 하다가 오는 길이라고 했다. 남편은 첫 인상도 그렇거니와 사람이 참 편안해보였다. 너무 편안해보여서 마치 한국에서부터 알던 옆집 오빠같은 인상이었다. 선배네와는 막역한 사이인지 선배네도 친동생 대하듯 했다. 그러고 며칠후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다. 자기가 운전을 가르켜줄테니 다시 배워보라는 것이었다. 우리가 십년전 텍사스로 이사올 무렵 아버지는 오클라호마주를 떠나 아칸소 주로 이사를 가셨다. 아버지가 계시던 라저스 칼리지에서는 토마스 제퍼슨 조지 워싱턴 에이브러햄 링컨 등 세명의 대통령 조각이 완성되자 더 이상 주문을 하지않았다. 아버지말로는 학교측의 아트부문 예산이 바닥이 났기 때문이라는데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예나 지금에나 아버지는 당신 조각에 문제가 있어서 일 거라고는 추호도 생각치 않으셨다. 어쨌든 무명의 한인조각가가 미국대학캠퍼스에 조각품을 세작품이나 완성한 것은 흔치 않은 일이었다. 그 관계로 털사시의 지역방송에서는 아버지의 조각에 대해서 몇 번 방영을 했고 지역신문 라이프란엔 '열정의 노 조각가'란 제목아래 전면기사가 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아버지의 성공이 생활이 나아지는데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못했다. 아버지는 여전히 가난했고 당신의 재능을 파는 방법도 몰랐다. 학교측에서는 계약이 끝나자 당장 집세부터 내라고 고지서를 보냈다. 그때 아칸소에 사는 어느 크리스천이 소문을 듣고 아버지에게 대형 예수상을 만들어줄 것을 부탁했다. 그는 아칸소 시골에 있는 어느 고아원 원장이었는데 대형 예수상 제작을 위하여 돈을 모금하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그 예수상은 저 브라질의 상파울로에 있는 세계에서 가장 큰 예수상 사이즈로 제작될 예정이라 아버지가 아예 조각이 놓여질 장소로 이사를 해서 그곳에서 제작을 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아버지는 오클라호마에서 10년간의 삶을 청산하고 아칸소 주로 이사를 가셨다. 아버지 말로는 리틀 락에서 꽤 많이 들어가는 인구도 몇백명 되지않은 시골이라고 했다. 그런데 집과 생활비와 작품에 소요되는 모든 경비를 제공한다는 말에 아버지는 선뜻 승낙을 하신 것 같았다. 아버지의 생활에서 조각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삶의 필수조건이었다. 어떤 환경일지라도 당신이 재료비나 생활을 걱정하지 않고 조각을 할 수 만 있다면 지구 끝까지라도 주저않고 가실 분이었기에 가족들은 아버지의 결정에 반대를 할 수가 없었다. 한편으론 아버지 연세를 생각하면 다소 염려스럽기도 했지만 아버지는 평범한 사람들의 노후의 삶을 포기하신지 오래였다. 그때가 그해 2월쯤이었다. 그런데 그해 사월 어느 새벽에 누가 초인종을 계속해서 눌러서 나가보니 아버지가 처음보는 중년의 백인남자와 함께 서계셨다. 아버지 뒤에는 트럭 비슷한게 보였는데 가까이서보니 유홀 트럭이었다. 아버지는 대뜸 가족이 보고 싶어서 그 산중에서 도저히 살 수 가 없어서 어제 이삿짐을 싸서 밤새 드라이브를 해서 왔노라고 하셨다. 그 아칸소 산중마을엔 인가도 없고 갈만한 곳도 없고 외로워서 살 수 가 없었노라고하셨다. 그러나 난 솔직히 아버지의 갑작스런 출현도 그 이유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왜냐면 아버지가 아칸소 주로 이사가기 전 그곳에 사전답사를 세번은 갔다 오셨기 때문에 그 곳 사정을 모르고 가신 것도 아니었고 혼자 사시는 것에 익숙한 아버지가 갑자기 가족들이 그리워질 이유가 없었다. 아버지는 가족때문에 당신의 진로를 바꾸실 분이 결코 아니었다. 시어머니가 위암으로 판정받고 누워 계실 때조차도 아버지는 조각만 하던 분이었다. 어머니가 위암말기환자들의 극도의 통증을 호소할 때도 아버지는 별 동요없이 당신 하시던 걸 계속하시던 분이었기에 가족 때문에 조각을 그만 둔다는 것은 아버지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칸소에서 무슨 일이 있었음에 분명했다. 예를 들어 경제적으로 서포트를 해주겠다던 약속이 이행되지 않았거나아버지가 하기 원하지 않는 조각을 만들어 달라고 그쪽에서 무리한 요구를 했거나 예상치 않은 일이 생겼음에 분명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갑작스럽게 아버지 삶의 반경을 바꾼 것을 가족 때문이라고 특히 큰 손주가 보고싶어서였노라고 하셨다. 왜 갑자기 그렇게 큰 손주가 보고 싶으셨을까? 그 애의 돌 때도 이런저런 이유로 안오시고우리가 텍사스에 이사오고 나서 새 집을 장만했을 때도 바쁘시다는 핑계로 발걸음 한 번 안하시던 분이었다. 아버지는 더이상 당신 조각을 원하는 사람들이 없자 가족을 찾으신 것이다. 남편은 평범한 사람이다. 그 평범이 예술에 관한 애정으로 분류된다면 평범 이하일지도 모른다. 남편은 미국에 건너온 뒤로 아버지 대신 가장의 역할을 하고 살았다. 처음 이민와서 다니던 대학도 그만두고 밤엔 청소를 하고 낮엔 주유소일을 했다. 아버지는 라저스칼리지에 레지던트 아티스트란 그럴듯한 명함만 있었지 칼리지에서 주는 생활비라는게 한달 식비 정도였다. 집세는 안냈지만 그외 어머니 약값이나 공과금을 비롯한 모든 생활비를 남편이 벌어야 했다. 남편은 그시절엔 하루에 4시간 이상을 자본 적이 없노라고 했다. 미국의 풍요는 남편에게는 해당되지 않은 풍요였다. 미국에 올 때 남편 집안 재산이란 것은 모두 빚으로 넘어가고 온 가족이 빈몸으로 온 터였다. 그렇다고 오자마자 돈이 나올 데도 없는지라 그저 밤낮으로 일을 해도 생활비 대기에 급급한 생활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생활은 외면한 채 밤낮으로 조각에만 열중해 살았다. 그런 연유인지 남편은 예술이란것에 대해 늘 못마땅해 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예술가들이리라. 자신의 이상을 위해 자신의 존재이유를 위해 늘 주변에 희생자를 만드는 사람들이란 게 남편이 생각하는 예술가들이었다. 언젠가부터 아버지는 당신의 꿈을 미켈란젤로에 버금가는 조각가로 정해놓고 미켈란젤로에 대한 책들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그런 다음 집안의 벽이란 벽엔 온통 미켈란젤로의 조각품 사진들로 도배되었고 아버지의 꿈은 자식들 교육도아니고 아픈 아내의 병간호도 아닌 미켈란젤로와 같은 조각가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신이 되고자하는 미켈란젤로의 꿈에 가까이 다가가면 갈수록 남편은 아버지와 점점 더 멀어지면서 더욱 더 현실적이 되어갔다 . 내가 시아버지 되실 분을 처음 뵌 것은 여름이 가고 피캉열매가 나무에서 떨어질 무렵이었다. 그날 나는 남편의 권유로 남편집이 있는 클레모어시에서 운전면허시험을 보기로 했다. 남편말로는 시골이라서 운전면허시험이 대도시보다는 까다롭지 않다고 했다. 그날 나는 시험장 가기 전에 남편 집에서 미리 만나기로 약속을 했었다. 남편이 사는 집이 시험장에서 가깝기도 하거니와 남편의 사는 모습이 보고 싶기도 했다. 그날 아침 남편은 자동차 본넷을 열어놓고 뭘 고치고 있는 중이었다. 남편은 아침을 먹지 않았으면 주스라도 한 잔 마시고 가자며 집 안으로 나를 데리고 들어갔다. 조그만 계단을 지나 오래되고 낡은 회색문을 여니 바로 부엌이 나타났다. 싱크대 위에 캐비넷 몇 개와 냉장고 냉장고 옆에 스토브가 보였다. 부엌바닥에 카펫도 그렇거니와 낡은데다 언제 청소를 했는지 부엌 내에 있는 것들은 거의 제 색깔을 내고 있는게 없어 보였다. 냉장고 표면도 얼마나 얼룩이 묻었는지 이 냉장고가 원래 하얀 색깔이었는지 베이지색이었는지 구분이 가질 않았다. 그 냉장고를 경계로 때묻은 자주색 커텐이 쳐 있었는데 그 곳이 아버지의 작업실겸 리빙룸이었다. 방은 커보이지 않았는데 큰 테이블이 두개나 놓여 있었다. 하나는 긴 사각형 테이블로 어버지가 주로 쓰는거였고 그 옆에 육각형 모양의 식탁이라고 하기에는 다소 커 보이는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그 방의 사방의 벽엔 아버지의 조각 데생 그림과 미켈란젤로의 조각품 화보 사진이 여기저기 어지럽게 붙어 있었고 그 옆엔 소나무 분재 그림과 그 그림을 설명하는듯한 어떤 도표 비슷한 게 붙어 있었다. 우리가 방에 들어가자 아버지는 책을 들여다보고 계시다가 우리에게 눈길을 돌렸다. 아버지는 혼기가 가득 찬 노총각 아들이 데리고 들어오는 여자를 며느리감으로서의 관심은 거의 보이지 않으셨다. 대뜸 뒷뜰에 있는 당신 조각을 봤느냐고 물어보았다. 아직 못보았다고 내가 대답하자 그것부터 봐야 한다며 뒷마당으로 나를 데려갔다. 리빙룸 오른쪽 구석에 문이 하나 있었는데 그 문을 열자 바로 뒷마당이었다. 뒷마당은 울타리가 없이 옆집과도 연결되어 있고 근처에서 말들을 키우는지 말똥냄새가 진동을 했다.그 마당 한 가운데 커다란 링컨 조각의 골조가 세워져 있었다. 그 조각품의 골조는 철근으로 세워져 있었는데 얼추 봐도 높이가 20피트는 넘어보였다. 난 더구나 키가 작았으므로 한참을 올려다 봐야 했다. 아버지는 이 에이브러햄 링컨 조각이 워싱턴에 있는 링컨 모뉴먼트 다음으로 큰 것이라 아마도 미국 역사에 길이 남을 조각이라며 당신 조각에 관해 거의 한 시간이 넘게 설명을 하셨다. 아버지의 꿈은 자식들 교육도 아니고 아픈 아내의 병간호도 아닌 미켈란젤로와 같은 조각가가 되는 것이었다 난 조각에 관해서는 거의 문외한이었으므로 별로 흥미는 없었으나 평소 내가 생각해왔던 예술가의 삶을 가까이서 보는 기분이 들어 흥미로웠다. 아버지의 헝클어진 머리며 다리가 부러진 안경이며 파자마에 오래된 가디건을 걸치고 당신 조각을 설명하는 모습이 어떤 열정을 느끼게 했다. 그런데 그 때 보여준 남편의 태도는 좀 의외였다. 남편은 아버지가 나를 뒷마당에 데리고 나갈 때 부터 내내 냉소적인 표정이었다. 어쩌면 당신 며느리가 될 지도 모르는 여자를 집에 데리고 왔는데 아버지는 그 점에 대해선 모른 척하고 나를 당신 작품의 관람객 쯤으로 대하는 것부터가 남편은 못마땅했음이 분명했다. 대부분의 평범한 집안에서는 아들이 사귀는 여자를 데리고 나타나면 의례적으로 몇 가지 질문을 하고 관심을 갖기 마련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런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집 안에 오는 모든 손님들은 당신 조각을 보러오는 사람들로 단정해버렸다. 심지어 어머니가 위암으로 투병중일 때조차도 아버지는 문병객들에게 당신 조각 얘기만 하셨다고 하니 남편과 나머지 형제들이 느끼는 아버지에 대한 감정이 어떠하리라고는 짐작이 가고도 남음이 있었다. 마침내 아버지의 예술이야기가 한 시간을 넘기자 남편은 이 아가씨는 운전 시험을 보러가야 한다며 아버지의 말문을 잘랐다. 나는 평소에 보았던 남편의 모습과 다른 모습을 본 기분이었다. 남편은 늘 친절하고 따뜻한 사람이었다. 나한테 뿐만 아니라 주변사람들에게도 늘 사람 좋은 웃음을 달고 다니며 자신의 도움이 필요한 곳엔 주저하지 않고 도움을 주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 남편이 아버지에게 하는 태도는 좀 냉정하고 쌀쌀맞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결혼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그런 남편의 태도를 이해하게 되었다. 아버지는 한 시도 쉬지 않고 남편을 늘 바쁘게 힘들게 만들었다. 우리에겐 아버지가 아칸소에 머무셨던 몇 달이 아버지의 일로 신경을 안 쓸 수 있었던 가장 긴 휴식기간이었다. 그런데 그 아버지가 다시 나타나신 거였다. 그 날 새벽 낯선 백인남자을 데리고 들어올 때에도 아버지는 마치 아침에 나갔다가 저녁에 퇴근하신 것처럼 들어오자마자 소파에 드러 누우시더니 아침을 먹자고 하셨다. 남편은 내가 일어날 생각을 안 하자 자기가 곧 키친으로 가서 베이컨을 굽고 달걀 후라이를 몇 개 해서 아버지와 백인남자를 대접했다. 곧 이어 자신을 토마스라고 소개한 백인남자는 아칸소까지 돌아가려면 일찍 출발해야 한다며 자기가 아버지 유홀 렌트비와 여기까지오는 기름값을 빌려 주었다며 돈 얘기를 꺼냈다. 남편은 방으로 들어와서 첵북을 챙겨 나가더니 오백몇불을 써주며 아버지를 도와줘서 고맙다고 땡큐를 몇번이고 했다. 아버지는 뭐든 이런 식이었다. 당신은 하고 싶은대로 하시고 그 뒷처리는 늘 남편 몫이었다. 그럴 때마다 남편은 말없이 뒷처리를 다하곤 했는데 그런 모습들이 나에겐 좀 생소하게 보였다. 마치 제 역할이 바뀐 부자의 모습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으며 결코 평범하지 않은 부자관계였다. 또한 사고를 치는 쪽은 늘 아버지였으므로 남편은 아버지만 보면 얼굴이 늘 편하지가 않았다. 그 날 이후 아버지는 당신이 당장 조각을 할 수 있는 집이 필요하다고 우리를 채근하셨다. 그러나 갑자기 아버지가 조각을 하실만한 마당 넓은 집을 구하기란 쉽지가 않았다. 또한 식사때문이라고 해도 우리가 사는 곳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고 최소한 5피트이상 되는 대형조각을 만들 수 있는 집을 시내에서 구하려고 하니 마땅한 집이 나서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이웃에 살던 교포 한 분이 가지고 있던 집이 렌트가 나왔다고 해서 그 집을 보러갔다. 그 집은 몹시 낡았지만 마당이 넓었으므로 아버지는 마음에 들어하셨다. 아버지는 그 집에서 거의 십년을 더 사시다가 돌아가셨는데 그 사이 아버지가 그 집에서 만들었던 조각품의 수는 거의 20여점이 넘어 있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무신론자였던 아버지가 만들어 놓고 간 조각은 거의가 다 성상이었다. 예수상을 비롯하여 마리아 모세다윗 등 거의 실물크기로 만든 이 조각들은 무겁기도 하거니와 사 가는 사람도 없어서 처음 그 조각들이 자리 잡았던 마당 한편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그 집마당은 마치 야외 조각전시장 같았는데 관람객이라고는 그 집앞에 있는 멕시칸 식당에 점심을 먹으러 오는 트럭운전수들이나 구매능력이 전혀 없는 동네의 초라한 늙은이들이 전부였다. 간혹 미국교회관계자들이 모금을 해서 예수상이나 모세상을 사겠다고 한 적도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턱없이 높은 가격을 불러서 일이 성사된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모든 예술품들은 예술가 사후에나 빛을 보게 마련이라며 그 때에는 남편이 일하지 않고도 아버지 덕에 평생을 놀면서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장담을 하셨다. 그러나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조각은 아버지 생전이나 사후에나 빛을 발하지도 구매력을 불러 일으키지도 못했다. 이름도 알려지지않은 무명조각가의 조각을 거금을 들여 살 사람은 없었다. 아버지의 이름을 조각가로 알고 있는 사람은 오클라호마 조그만 시티 대학 관계자들 정도였으나 그나마 아버지가 텍사스로 이주하고 나서는 그런 사람들마저도 없는 셈이었다. 아버지는 팔리지도 않은 조각들이 마당 한 구석을 차지할 때마다 당신의 예술을 이해하지 못하는 텍사스 사람들을 무식한 카우보이의 후예들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오리지널 카우보이 타운인 포트워스엔 미국에서 내노라는 박물관이 몇 군데나 있으며 카우보이들을 주제로 한 브론즈 조각이나 그림들이 웨스턴 아트라 하여 애호가들의 사랑을 널리 받고 있었다. 문제는 예술과 실용 두가지 다 소비자들에게 어필하지 못하는 아버지 예술의 한계였다. 가끔 나는 여름날 화씨 100도가 넘는 날씨에 조각을 하고 있는 아버지를 볼 때가 있는데 그런 광경을 볼 때면 도대체 조각이 아버지에게 뭐길래 뜨거운 태양볕 아래서 저러고 계시는 걸까? 하는 생각이 매번 들었다. 아버지에게 조각은 무엇이었을까? 아버지는 정말 당신의 재능이 미켈란젤로를 닮았다고 생각하셨을까? 아니면 외로운이민생활을 이겨내기위한 방편이었을까? 그 어느 쪽이라해도 아버지에게 조각은 절대적으로 아버지의 삶을 지배하는 천사이자 폭군이었다. 누가 보아도 돈이 되지않는것에 목숨을 걸고 매달리는 아버지의 삶은 이해가 되지않은 삶이었다. 그럴때마다 아버지는 당신은 행복하다고 주장했는데 주변의 자식들은 아버지의 행복이 이해가 되지않아 늘 안달을 했다. 자식들이 생각하기엔 아버지의 부족한 현실인식이 당신의삶을 점점 피폐하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왜냐면 아버지에게 드리는 용돈은 모두 조각의 재료로 사용되었기에 아버지는 늘 가난했고 아버지집엔 성한 가재도구하나가 없었다. 겨울에 전기담요를 사드리면 그 담요는 어느날 조각품덮개로 변해있었고,전기세를 아껴 재료비로 쓰기위해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춥게 지내셨다. 또한 아버지의 방은 알수없는 공식과 기호로 온벽이 도배가 되었는데 아버지의 말에따르면 그 도표는 예술과 그예술에 반응하는 사람의 신체적반응을 해부학과 화학 생리학을 응용해서 그려놓은것이라고했다. 방한구석엔 그런 두루마리가 수도없이 쌓여있었다. 가끔 아버지집을 흥미를 가지고방문하는 미국사람들은 보통 아버지의 예술이론을 한시간이상씩 경청하고 갔는데 무엇이든 남과다른무엇을 좋아하는 미국인들에겐 아버지의열정이 에디슨 같은 천재를 연상시키는지도 모르는일이었다..그러나 아버지는 에디슨처럼 수천번의 실패에서 전구를 발명하지도 못했고 미켈란젤로처럼 불후의 명작을 남기지도 못한채 점점 쇠약해져갔다. 칠순이 넘은 아버지가 새벽에 3시에 일어나서 해부학이나 생리학 화학등을 공부하시고 식사하는 시간을 제외한 나머지시간은 거의 조각하는것으로 보내셨는데 노인의 몸으로 그건 누가보아도 무리였다. 어떤날은 해가 지고나서도 밖에서 작업을 계속 하기도 했는데 그런날은 사다리위에 라이트를 설치해서 작업을 하셨다. 아마도 아버지가 미켈란젤로와 가장 닮은점은 조각에 대한 열정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아버지를 인정하지않은 현실이 늘어나면서 아버지의 꿈도 조금씩 바뀌기시작했다. 처음 텍사스주로 와서는 당신도 이제 돈을 좀 벌어야겠다고 엘비스프레슬리나 마릴린몬로 조각을 만들어 카피본을 제작하였다. 당신말로는 카피본을 만들어 대량생산하여 월마트나 조각품가게로 넘긴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카피를 만드는것 또한 돈과 인력이 많이 드는일이었다. 아버지도 그것을 모를리 없었다. 카피본을 하나 제작하는데만 기천불이 드는일이었다. 설사 카피본을 제작했다해도 카피로 만들조각의 재료로 켈스톤은 적절치않았다. 시멘트처럼 굳으면 무거운재료로 조각의 카피를 뜨는 조각가는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한번 마음먹은것은 하고마는 성미인지라 마침내 엘비스프레슬리 조각의 카피본을 한달여만에 만들었다. 그사이 남편은 아버지의 펑크난 체킹어카운트를 메꾸러 은행을 몇번들락거렸다. 아버지는 수천불을 들여 제작한 카피본에서 고작 3개의 카피를 만들어 내고 중단을 했다. 그러고선 하시는 말이 연습삼아 해본것이 라는것이었다. 그연습의 댓가치고는 경제적으로 손실이 좀 큰게 흠이었다. 어차피 카피본을 만든다해도 일손도없는데다 대량생산에 소비자가 납득할만한 값에 조각품이 나오기도 힘든일이었다. 사람들은 아버지조각품만이 가지고있는 변하지않는 재료의 견고함이나 사이즈보다는 적당한 가격에 적당한 사이즈들을 원했다. 보통의 미국인들은 카피본에 익숙해져있다. 세계의 어떤 예술품도 미국에 오면 넘쳐나는 복사본으로 예술을 감상할수도있고 쉽게 소유할수도있다. 이곳에서 예술의 가치는 어떤 특정인들만의 전유물이 아닌 대다수의 중산층 소비자들에게 매력있는것이라야만 한다.그래서 이곳에서는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나 고호의 해바라기, 클림트의 키스 등 유명한 그림의 카피본을 어디서든지 구할수있다.그점에서는 장식용 조각도 마찬가지이다. 그렇게 크지않는 실내용이나 정원의 장식용조각은 데코레이션가게를 가면 얼마든지 구입할수가있다.그런면에서 아버지조각은 산업혁명전의 상품처럼 시장성이 없었다. 예술이 뭐 별건가? 인간의 마음 저 깊숙한 곳에 숨어있는 순수함과 이상을 끄집어 낼 수 있으면 그게 진짜 예술이지 게다가 아버지가 만든조각품들은 거의모두가 성상이고 외부에 설치할 크기여서 일반 소비자들은 사겠다는 사람이 거의없었고 가끔 장의사나 교회에서 연락이 왔는데 그들은 아주 싼값에 구입하기를 희망하거나, 아니면 전적으로 도네이션을 원했다.그래서 나중엔 남편도 도네이션을 생각했는데 문제는 조각품들이 모두 흩어져 있게 된다는것이었다.남편은 도네이션을 하더래도 한곳에 모아두고 전시를 하거나보존을 할 사람을 찾았다.또한 훗날에 자손들이 아버지조각이 보고싶으면 언제던지볼수있는 그리멀지않는곳에 조각을 두고싶어했다. 특히 큰애는 할아버지의 조각을 좋아했다. 어릴때부터 할아버지집을 놀이터삼아 자라온아이는 자라면서 세상에서 제일 조각을 잘만드는 할아버지조각이 왜 인기가 없는 지 이해할수가 없는 표정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2년이 지났다. 우리는 이시간동안 아직도 아버지의 조각을 처리하지못했다.이런탓에 남편은 여전히 아버지가 세들어살던집 집세를 물고있는 형편이었다.집 주인은 마당에있는 아버지의 조각품들때문에 집을 세놓을수가 없으므로 그 조각품들이 처리될때까지는 집세를 받아야된다고 했다.집주인으로서는 당연한 애기였지만 사람이 살지도않는 집에 집세를 물어야되는 남편의 심정은 그나마 아버지에게 남아있던 희미한 연민의정마저도 사라지게 만들었다.더구나 대부분의 조각품 사이즈가 라이프사이즈 이상되고 켈스톤으로 만든조각품들은 바위처럼무거웠기 때문에 기중기같은 특수장비가 필요했고 인력도 상당히 요구되는일이었다. 그당시 우리는 그 조각을 옮길만한 장소도 없었고. 몇만불이 예상되는 조각이사비용도 엄두가 나지않았다. 마음같아선 예술성을 떠나 아버지의 유작이었으므로 간직하여 후손들에게 보여주고싶은생각도 있었다. 사실 그 조각들은 예술적인가치를 떠나서 아버지의 분신과도 같은것들이었다.이민와서 20여년을 거의 조각만 하고 사셨던아버지였다. . 외로운 이민생활에 가까이 지내던 친구도 없었던 아버지는 필사적으로 조각에만 매달리셨고 해가갈수록 더 큰조각을 하기를 원하셨다.그럴때 마다 남편은 이집은 남의집인데 저 크고무거운조각을 어디로옮기시려고 이렇게 큰사이즈로 만드시냐고 우려를 했다 그러면 아버지는 조각품한점만 팔면 이런집 사고도남는다고하시며 남편의 우려를 일축해버리시곤했다. 그러나 아버지가돌아가신후 남편의 예상은 생각대로 현실로다가왔고 뒷처리는 또한 어김없이 남편몫이었다 그집은 지금.사람이 살지않는집이었지만 렌트한집이었므로 일단은 잔듸깍기등의 기본적인것은 리스를 한사람이해야되는 입장이었다,여름이면 무더운텍사스날씨에 유독 잘자라는 잔듸를 남편은2년이넘게 깍으러다녔다. 잔듸를 깍고 돌아오는날,남편의 표정은 ,남북전쟁이 끝나고난뒤 새벽 어스름한 들판위를 다리를 절룩거리며 돌아오는 남부패잔병의 모습 바로 그것이었다 한사람의 자유를위해선 한사람의 희생이 필요한것인지도 모르는일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보이지않는 시간과의 전쟁이 언제끝이나는 냐는것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린치라는 선교사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는 아버지생전에 아버지 의 많지않은 후원자중의 한명이었다. 키가 7피트는 되보이고 백발이 성성한 그레고리팩처럼 미남인 이 훤칠한키의 미국인은 있는재산다 팔아서 남미에서 선교사로 활동하고있는 60대 백인남자였다. 아버지 생전에 지나가다 우연히 아버지의 조각품들을 보고는 어떤조건도없이 물심양면으로 아버지를후원 해주던 선한 사마리아인같은 후원자였다.그러고보니 그사람을 마지막으로본게 2년전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삼일전날 쯤 되었던것같았다. 그는 인상이 비슷한 자기형과같이와서 아버지 마지막가는길을위해 기도를 해주고 장례비용에 보태라며 얼마간의돈이든 봉투를우리에게 주고갔었다. 맞아! 그때 그사람이 나중에 조각품때문에 상의할일이 있으면 연락를 하라고했었는데 왜 우리는 그생각을 못했을까? 무엇때문에 우리는 저 조각들을 이러지도 저러지도못하고 2년을 끌어오며 마음고생을 했던것일까? . 그건 우리의 욕심때문이었는지도 몰랐다.우리는내심 아버지조각을 팔아서 생활에 보탬이 되고자했던 마음도 있었고 한편으론 전시할 장소만 제공되면 우리가 보존하고자했던 생각도 있었다. 그러나 2년동안 인터넷에 조각품사이트를 오픈해서 구입할사람도찾아보고 나중엔 조각을 전시할 땅이라도 도네이션 해줄사람을 찾아보았으나 그런사람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뒤에 생각해보니 이모든일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위해 생긴일같고, 아버지 20년 삶의표상인 조각들의 운명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미스터 린치라면 누구보다도 아버지조각을 조각품들이 놓여있어야할 제자리를 찾아줄것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또한 예술성은 차지하고라도 저만한 성상들이 이부근에는 없으므로 린치같은 크리스챤들에게는 필요한 조각들이기도 했다.어쩌면 린치는 우리들보다 아버지의 조각품이 지니고있는 진정한의미와 가치를 더 잘알지도 모른다.미켈란젤로를 꿈꾸며 살았던 한 동양인노인의 타국에서의 삶과 꿈이들어있는 조각품들이었다..아버지는 생전에 늘 그러셨다. “ 예술이 뭐 별건가? 인간의 마음 저깊숙한 곳에 숨어있는 순수함과 이상을 끄집어낼수있으면 그게 진짜 예술이지” 그러시면서 예술가중에서 피카소를 제일 싫어하셨는데, 저 피카소의 난해한 그림들은 인간의 감정이나 정서를 혼돈시키기만 할뿐 인간의 자연스런정서와는 맞지않는다고... 우리가 꽃을 보거나 아름다운경치를볼때 나도모르게 감탄이 나오듯 예술도 그래야된다고하시며 추상쪽보다는 구상화를 더 선호하셨고 그런맥락에서 조각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아이러니칼하게도 아버지 조각은 아버지이론과는 달리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지도. 사로잡지도못한채 그자리에 그냥 방치되어 있었다. 남편은 오늘 린치를 만나기로 했다. 아버지조각품의 거취를 최종상의하기위해서이다.지난번 통화에서 도네이션의사를 밝혔기때문에 서류상 사인만 하면되는일이었다. 린치의 계획은 바이블 조각공원을 만들계획인데 조만간 땅을 도네이션 해줄사람이 나타날것같다고 했다. 린치의 계획이 아버지의 꿈과 조금 다른것이라 해도 여러사람이 아버지의 조각을 감상할수있고. 그 성상들을 보고 사람들마음에 하느님의 섭리를 조금이라도 심어줄수있다면 아버지도 기뻐하실일인것은 분명했다. 아버지는 무신론자였지만 돌아가시기 2주전에 세례를 받고 요셉이라는 세례명을 받으셨다.신부님께 강복을 받으시면서 행복하다고 웃으시던 아버지의 모습은 어쩌면 살아생전 조각을 하시면서 보속을 다하고 가셨기때문이 아닐까 하는생각이 들었다. 나는 차에 시동을 걸고있는 남편의 조각처럼 굳은뒷모습을 보며,그 모습이 어디선가 본듯한 생각이 자꾸 들었다. 남편은 어쩜 아버지의 조각품을 떠나 보내며 아버지를 두번 떠나보내는 심정인지도 모른다. 또한 아버지와 함께 꿈꾸었던 저 꿈의 세월들을 남편은 차마 보낼수가 없는지도 모른다. 이제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저 꿈의 세월들을…. ■수상 소감, 조각가로 살다가신 아버지에게 영광을… 해마다 하얀 벚꽃이 흩날릴 즈음이면 조각을 사랑하다 가신 아버지 생각을 합니다. 미국에 이민 오셔서 무명의 조각가로 20여 년을 살다가신 아버지…. 아무도 알아주지않는 일을 당신의 신앙처럼 순수한 열정을 가지고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하셨던 아버지. 삶을 철저히 외롭고도 철저히 사랑했던 아버지를 기리며 수상의 기쁨을 아버지와 아버지를 말없이 사랑했던 남편에게 돌립니다. 또한 저의 부족한 글을 뽑아주신 심사위원분들과 중앙일보에 감사드립니다. ■논픽션 심사평…삶을 따뜻하게 바라보는 시선 감동 미주 중앙일보 논픽션 공모에서‘미켈란젤로의 꿈' (박혜자)이 당선작으로 'H 부인의 비밀'(김항선)이 가작으로 뽑혔다. 응모작은 모두 23편이었는데 예심을 거쳐 몇 편의 작품이 물망에 올랐다. '미켈란젤로의 꿈'은 노 조각가인 시아버지의 집념과 예술혼 그 열정으로 인해 희생 당하는 남편의 모습을 자기 감정을 절제하고 균형잡힌 시각으로 담담히 서술하고 있다. 안정된 문장력 구성력 모두 탁월하고 삶을 따뜻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감동으로 다가온다. 아무도 사 가지 않는 실물 크기의 버려진 조각상이 이민자들의 꿈의 정체를 돌아보게 한다. 'H 부인의 비밀'은 논픽션다운 반전 복선과 암시가 깔린 기법으로 한 개인의 이야기를 민족사적인 의미로 부각시키고 있다. 한국 전쟁으로 잃은 아들 대신 한국인 의사에게 관심을 주었던 노부인의 마음과 희생된 아들을 가진 수많은 부모들의 아픔을 기억하게 한다. '드들강에 부는 바람'은 이야기 전개에 무리가 없고 담백하고 진솔한 입지전적인 글이다. 늦은 시간 드들강 언덕에서 자신을 기다리던 어머니의 모습을 배경에 깔고 살아온 날들의 애환을 한 편의 수채화처럼 보여준다. 정확한 어휘 선택에 문제가 있는 것은 한국을 떠나온 지 오래된 이민자들의 공통된 어려움이긴 하지만 극복해야 할 점이다. 마지막 부분에 인생에 대한 겸허한 마음이 표출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세 여인의 인생 파노라마'는 운명을 거슬리고 살아 온 경험과 업적을 바탕으로 한 편의 자서전으로 다시 쓰여지면 좋을 작품이다. 내용이 장황하고 통일감을 잃은 것이 논픽션으로서 결정적인 흠이다. 당선자들에게 축하를 드리고 탈락하신 분들에게 새로운 도전을 기대해 본다. 심사위원/ 홍승주.김광주

2010-05-17

[중앙신인문학상-단편소설 부문 가작] 작은 거인과 사이다

1. 병원 소독약 냄새는 버스 매연 냄새와 더불어 내가 가장 싫어하는 냄새다. 대학병원 지하 주차장에 차를 대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가며 또 다시 맡게 될 소독약 냄새를 생각하니 이내 미간 사이에 내 천(川)자가 그려진다. 바지 속에 있던 핸드폰이 요동쳐 꺼내보니 아내가 보낸 문자 메시지였다. '어디야?' 엘리베이터에 오르며 나는 둔한 속도로 힘겹게 답장을 보내기 시작했다. '다 왔어. 주차장' 엘리베이터를 타고 3층에서 내리자 소독약 냄새가 코를 찌른다. 나는 아내와 만나기로 한 산부인과 앞으로 걸어갔다. 대기실 소파에 앉아있던 아내가 나를 보자 미소와 함께 가볍게 손을 흔든다. 퇴근시간이라 그런지 대기실 주위엔 사람이 거의 없고 한가했다. "많이 기다렸어?" 나는 아내 옆 빈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아니 나도 온 지 얼마 안됐어." 이제 막 불혹이 된 우리 부부는 결혼 5년 차지만 아직 아이가 없다. 부부관계가 소원하거나 둘 사이에 애정이 식은 건 절대 아니다. 어떤 커플보다 더 서로 사랑하고 아끼는 사이지만 아이만 없었다. 누구보다 더 아이를 기다리는 아내와 주위의 권유로 우리는 작년부터 6개월마다 한 번씩 검진을 받기 시작했고 오늘은 일주일 전에 받은 검사 결과를 확인하는 날이다. "어머 오셨어요?" 젊은 간호사가 나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안녕 하세요?" 나도 자리에서 일어나며 정중하게 답례했다. "잠시만요. 제가 선생님한테 오셨다고 말씀 드릴게요" 간호사는 진료파일을 가슴에 안은 채 얌전하게 진료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곧 다시 나와 우리를 진료실 안으로 안내했다. "야 어서 와라! 재수씨 그동안 안녕 하셨어요?" 노트북 컴퓨터를 보고 있던 현수가 아내와 나를 보자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이 자식은 맨날 재수씨래? 형수님이라니깐!" "현수씨 잘 지내셨어요?" 아내도 가벼운 목례를 겸해 말했다. "현수 너 우리 때문에 퇴근 늦은 거 아냐?" 나는 아내와 함께 현수 책상 앞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당연하지!" 현수는 손목시계를 가리키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알았다. 내가 오늘 한 잔 살게!" "그럼 나야 좋지. 하하!" 현수는 나와 아내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그리고는 간호사가 책상에 놓고 간 진료기록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현수 자리 뒤 커다란 유리창 너머엔 하루의 마감을 알려주듯 붉은 석양 노을이 세상 화폭 위에 서서히 물들고 있었다. 문득 아내의 얼굴을 쳐다보니 진료결과를 기다리는 게 조금 초조해 보였다. 진료기록이 들어있는 폴더를 넘기던 현수가 말문을 열었다. "재수씨나 정수 모두 아무 이상 없이 건강합니다!" 그러자 아내의 얼굴이 금새 환해졌다. "재수씨 아무 이상이 없어도 임신이 안 되는 경우가 종종 있어요.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제가 처방해 드린 약 꾸준히 복용하시고 운동도 병행하면서 노력하면 분명 좋은 결과가 있을 겁니다." "네 그럴게요. 고마워요 현수씨!" 아내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야 현수야 너 이제 퇴근해도 되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러자 현수도 자리에서 일어나 가운을 벗으며 말했다. "응. 네가 오늘 마지막 환자였어!" 나는 아내에게 자동차 키를 주며 먼저 집에 들어가라고 했다. 아내는 혼자 집에 가는 게 썩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으나 검진결과 아무 이상이 없자 기분이 좋았는지 잔소리 없이 먼저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현수와 나는 병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작은 재래시장 내 순댓국 집에서 식사 겸 술잔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정수야 언제까지 재수씨를 속일 셈이야?" 현수가 내 잔을 채우며 말했다. "글쎄다." 대답 후 나는 바로 잔을 비웠다. 그러자 또 다시 현수가 내 잔을 채우며 말한다. "정수 너 때문에 내 어쩔 수 없이 재수씨한테 거짓말을 하지만 나도 의사야? 양심에도 찔리고 환자를 속이면 안 된다고!" 나는 아무 대꾸 없이 진한 순댓국 국물을 순대와 함께 떠 마셨다. 십 년 넘게 먹어 온 이 할매집 순댓국은 깻잎 향과 함께 입안에 스며드는 국물 맛이 진하고 얼큰한 게 아주 일품이었다. 6살 어린 아이에겐 이 세상 최고의 맛이었던 사이다와 아버지가 까주신 삶은 계란 두 세개를 먹고나니 어느새 기차 밖 눈 덮인 세상은 환하게 밝아 있었다. "정수야 이제 그만 정관수술 한 거 풀고 아이 가져! 남들 다 갖는 아이를 도대체 너는 왜 안 가지려고 하는데?" 나는 현수 질문에 대답 대신 질문을 던졌다. "현수야 너 의사되려고 공부도 많이 하고 국가고시 시험도 봤지?" "그랬지!" "현수야 의사가 되려면 공부도 많이 해야 하고 어려운 시험도 통과해야 하는 이유는 의사는 바로 소중한 생명을 다루어야 하는 직업이기 때문이야!" 현수는 아무 말 없이 내 눈만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말이다 부모가 되는 과정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 의사는 소중한 생명을 다루지만 부모는 바로 그 소중한 생명을 탄생시키는 사람이야. 그런데 난 그 고귀한 일을 하는데 필요한 공부도 시험도 보지 않았어. 그래서 자신이 없어!" 정말 그랬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성인이 되면 누구나 아이를 낳을 수는 있지만 아무나 부모가 될 순 없다'고 생각했다. 내 말을 듣던 현수는 아무 말 없이 자신의 술잔을 비우기 시작했다. 2. 초등학교가 국민학교로 불리던 1970년대 중반 나는 당시 학교에 입학하지도 않은 6살 어린 나이였지만 국민학교 2학년인 우리 형보다 더 매년 겨울방학을 손꼽아 기다리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겨울방학이 시작되고 해가 바뀌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우리네 최대 명절 설! 설 전날이 되면 나는 아버지의 큼지막한 손을 꼭 잡은 채 어머니의 손을 잡은 형과 함께 늘 버스를 타고 영등포 역으로 향했다. 평상시에는 내 코를 아프게 후벼 파고 머리를 어지럽게 만들던 버스의 검은 매연 냄새도 그 날 만큼은 친근하게 느껴졌다. 버스에서 내려 영등포 역으로 걸어가는 길에는 어둠이 깔린 이른 아침시간임에도 불구하고 항상 사람들의 물결로 인해 발 디딜 틈 조차 없었다. 저 마다 들뜬 마음으로 고향을 향해 가는 귀성객들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지게로 짐을 나르는 짐꾼들 그리고 설 대목에 한 푼이라도 더 벌려고 호객행위를 하며 입김과 함께 마지막 열정을 토해내는 장사꾼들… 그럴 때면 아버지는 작은 내 손을 더 꽉 잡고 전보다 더 뒤를 자주 돌아보며 어머니에게 '아 잃어버리지 않게 단디 잡고 온 나!' 라고 외치셨다. 그렇게 십 여분을 걸어 통일호로 불리던 허름한 기차 안에 오르면 그때서야 아버지는 꼭 잡았던 내 손을 놓아주셨다. 그리고 밝은 미소와 함께 '우리 아들 욕봤다!' 라고 말씀하시며 내 머리와 얼굴을 다정하게 쓰다듬어 주셨다. 귀성열차 안에는 항상 사람이 많았다. 좌석은 물론 입석도 매진되어 말 그대로 콩나물 시루 같았다. 아버지는 그 와중에도 열차 내 작은 틈을 찾아 바닥에 신문을 깔고 앉아 나에게 포근하고 안락한 당신의 앉은 다리를 내 주셨다. 그곳에는 좌석번호도 초록색 좌석의 푹신한 쿠션도 없었지만 나에게는 이 세상 최고의 좌석이었다. '잠시 후 이 열차 출발하겠습니다. 즐겁고 편안한 여행 되십시오' 라는 기차내 안내방송이 나오면 기차는 늘 그렇듯 뿌연 연기와 기적소리를 뿜어내며 서서히 목적지를 향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면 내 심장도 기차 바퀴처럼 점점 더 빨리 뛰었고 형과 나는 서로를 바라보며 아무 이유 없이 환한 미소를 귀에 걸었다. 새벽 기차 시간에 늦지 않으려 우리는 늘 아침 식사도 거른 채 집을 나서야만 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늘 그랬던 것처럼 기차가 힘차게 달리기 시작하자 가방 안에서 누런 봉지를 꺼냈고 거기에는 누룽지와 삶은 계란 그리고 신문지 조각에 싼 굵은 소금 뭉치가 있었다. 그리고 그 때가 되면 신기하게도 나는 늘 허기를 느끼곤 했다. 아버지는 마치 내가 언제쯤 배가 고플 거란 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와 삶은 계란이다!" 내가 큰 소리로 호들갑을 떨면 아버지는 늘 "가만 있어 봐라!" 하시며 고개를 두리번거리셨다. 그리고 조금 있으면 가슴에 '홍익'이란 글자가 선명하게 쓰여진 유니폼을 입은 이동매점 아저씨가 귤 삶은 계란 오징어 카스테라 빵 맥주 등 먹거리를 잔뜩 실은 채 등장했다. 그러면 아버지는 자리에서 일어나 "보소 여기 사이다하고 환타 한 병 주이소"라고 말씀하시며 오백원짜리 지폐를 '홍익' 아저씨에게 내미셨다. 사이다는 나에게 환타는 형에게 건네주신 아버지는 다시 바닥에 앉으시며 "음식 먹기 전에는 늘 목을 축이고 먹어야 안 체한다 알았나?"라고 말씀하셨다. 형과 내가 입맛을 다시며 음료수 병을 입으로 가져 가자 옆에 있던 어머니가 "얘들아 먹을 게 있으면 어떡해야지?"라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형은 "아버지 먼저 드세요!"라며 들고 있던 환타 병을 내밀며 말했다. "아이다 나는 개안타. 느그들이나 마이 묵어라." 아버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형과 나는 일제히 어머니를 쳐다 보았다. 어머니는 목에 두르고 있던 목도리를 풀며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형과 나는 서로를 바라보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리고 우렁차게 "잘 먹겠습니다!"라고 외친 후 환타와 사이다를 마시기 시작했다. 입안 가득 달콤함을 선사하고 시원 짜릿하게 목을 스치고 넘어가는 사이다의 상쾌한 맛은 6살 어린 아이에겐 이 세상 최고의 맛이었다! 돌이켜 보면 나는 설날을 기다린 게 아니라 일년에 딱 두 번 한 번은 형이 소풍 가는 날 그리고 다른 한 번은 시골 가는 기차 안에서 마실 수 있었던 사이다를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사이다와 아버지가 까 주신 삶은 계란 두 세 개를 먹고 나니 어느새 기차 밖 눈 덮인 세상은 환하게 밝아 있었다. 나는 틈틈이 창문 너머로 흘러가는 세상 풍경을 바라보았다. 도심을 벗어난 기차는 우리에게 눈 덮인 자연의 아름다운 모습을 전해 주고 있었다. 창문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을 바라보고 있자니 내 눈가에는 마치 처마 밑 고드름처럼 졸음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나도 모르게 다리에 힘이 빠지고 내 머리는 어느새 아버지의 아랫배를 베개 삼아 꿈나라로 떠나고 있었다. 노는 시간과 자는 시간은 어릴 적부터 늘 짧게 느껴졌다. 얼마 잔 거 같지 않은데 어머니가 "정수야 다 왔다. 어서 일어나야지?"하며 내 몸을 일으켜 세우셨다. 졸린 눈을 비비며 게슴츠레 눈을 뜨니 아버지는 언제 일어나셨는지 좌석 위 짐칸에 올려 두었던 자주색 보자기로 싼 짐과 낡은 검정색 가방을 내리고 있었고 기차 안 스피커에서는 '잠시 후 이 열차 김천 김천 역에 정차하겠습니다. 내리 실 때는 잊으신 물건 없이 안전한 여행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라는 안내방송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아버지의 손을 잡고 기차에서 내리니 열심히 달려온 기차는 힘에 부쳐 거친 숨을 몰아 쉬듯 하얀 연기를 뿜어내고 있었고 서울과는 사뭇 다른 지방 공기는 내 눈가에 남아있는 졸음을 털어내며 어린 내 가슴 속 깊이 시원하게 스며들었다. 아버지의 시골 집은 김천 역에서 버스를 타고 약 사십 분 가량 들어가야 했다. 그리고 콘크리트 포장 도로가 끊긴 버스 종점에서부터 또 다시 약 사십 분 가량 걸어가야 했다. 할아버지에게 드릴 사탕과 담배 그리고 큰 집 식구들에게 줄 양말과 빨간 내복 등 선물꾸러미 짐을 들고 걸어야 하는 어머니는 하루 빨리 아버지 마을까지 도로가 포장되어 버스가 다녀야 한다며 걱정 섞인 불만을 토로하셨지만 형과 나는 아버지와 함께 걸어가는 서울에서는 감히 상상도 못할 그 시골 길의 때묻지 않은 자연풍경이 너무 신기하고 아름답게 보였다. 눈 덮인 넓디 넓은 들판과 사방을 마치 병풍처럼 둘러싼 높고 낮은 산들의 조화! 그 넓은 들판 여기저기서 평화롭게 먹거리를 찾고 노는 흑염소들! 꽁꽁 얼어붙은 저수지 한 켠에서 팽이를 돌리거나 썰매를 타는 아이들! 그리고 서울에서 보던 하늘보다 더 높고 푸른 시골하늘! 그곳에서 들이키는 무공해 시골 공기 맛은 짜릿하고 상쾌한 사이다보다 더 기막히고 독특한 한 마디로 끝내주는 맛이었다. "정수야 저기 토끼다!" 앞서 걷던 형이 말했다. "어디 어디?"나는 아버지의 손을 놓고 형에게 달려갔다. "잘 봐. 저기 있잖아!"형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형의 손가락 끝을 조심스럽게 따라가자 그곳에는 마치 친구처럼 보이는 하얀 토끼 세 마리가 옹기종기 모여 귀를 쫑긋 세운 채 먹거리를 찾는 듯 주위를 두리번 거리고 있었다. 나는 얼른 뒤돌아 아버지에게 달려갔다. "아버지 저기 있는 토끼 좀 잡아주세요!" "정수야 토끼는 우리 보다 걸음이 빨라서 그냥은 못 잡는다. 내가 내일 덫 나서 잡아 주께!" "정말요?" 아버지는 대답대신 나를 내려다 보며 환한 미소를 짓었다. 다음날 아버지는 약속대로 눈 덮인 산 이곳 저곳에 내가 일어나기도 전인 이른 아침부터 덫을 놓아 토끼는 물론 꿩까지 잡으셨다. 고기가 귀하던 시절 토끼나 꿩 고기를 넣어 끓인 떡국의 담백하고 진한 국물은 그 맛이 아주 일품이었다. 아울러 고기 한 점이라도 더 건지려고 수저로 국물 속을 이리저리 헤집는 재미 또한 쏠쏠 했으며 그 국물에 밥을 말아 땅에 묻어 두었던 김장김칫독에서 꺼낸 시원한 김치를 손으로 쭉 찢어 밥에 올려먹는 맛 또한 한 마디로 끝내주었다. 어디 그 뿐인가? 아버지께서는 땔감으로 쓰려고 산에서 잘라온 나무더미에서 굵은 가지 하나를 꺼내 낫으로 고무줄 새총이나 모형 총 그리고 자치기 등의 놀이도구를 뚝딱 만들어 주셨다. 나는 아버지가 만들어 준 새총을 이리저리 신기하게 쳐다보며 말했다. "아버지 아버지는 어떻게 뭐든지 다 잘 만드세요?" 그러면 아버지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씀하셨다. "우리 정수도 나중에 커서 어른이 되면 이 아빠보다 더 잘 만들 거야." "정말요?" "그럼! 아빠도 너 만할 때 할아버지께서 새총이나 자치기 등을 만들어 주셨거든! 그 때 이 아빠도 정수 너처럼 할아버지한테 똑 같은 질문을 했었단다!" 아들의 부탁은 거의 다 들어주시고 내가 궁금해 하는 것에 대한 모든 정답을 알고 게시던 아버지는 내게 있어 이 세상에서 가장 크고 멋진 분이셨다! 3. 학교 교무실을 자주 찾는 학생은 크게 두 종류로 분류된다. 하나는 공부에 관심이 많아 선생님에게 질문하러 오는 공부벌레들. 그리고 다른 하나는 학교생활에 문제가 있어 혼나러 오는 소위 문제아들. 5월의 따스한 햇살이 고등학교 교무실 전체를 환하게 비추던 어느 화창한 날 나는 또 학생주임 책상 옆에 앉아 반성문을 쓰고 있었다. "아버지는?" 학생주임은 극히 사무적으로 물었다.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나 또한 무덤덤하게 답했다. 그러자 그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언제?" "오늘이요!" 나도 목소리 톤이 높아졌다. 그러자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손바닥을 들어 나를 때리려다 "됐다. 내가 인삼보다 귀하다는 고3 때려서 모하겠냐? 간밤 꿈자리도 사나워서 오늘은 내가 참는다 참아!"하고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나는 내심 그가 내 얼굴을 때려주길 원했다. 그러면 그걸 핑계 삼아 이 지겨운 학교를 뛰쳐나가고 아울러 학교도 그만 두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나는 이런 사소한 일 하나도 인생은 마음 먹은 대로 쉽게 되지 안는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에이 포 용지에 쓰던 반성문이 거의 끝나갈 무렵 누군가 다가오는 인기척에 고개 들어보니 아버지가 내 자리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낡은 황토색 면바지에 군청색 잠바 그리고 아무 문양이나 로고도 없는 검정색 모자를 쓴 아버지. 그의 운동화는 몇 년을 신은 건지 그 기억조차 아련할 정도로 낡아 있었다. 아버지는 학생주임과 눈이 마주치자 모자를 벗고 허리를 90도로 굽히며 정중히 인사했다. 하지만 학생주임은 의자에서 일어나지도 않은 체 모가지만 끄덕였다. 나는 싸가지 없는 학생주임보다 허리까지 굽혀가며 인사하는 아버지의 비굴함이 못마땅해 일부러 그의 눈길을 피하기 시작했다. 아버지께서는 언제 오셨는지 내 손을 잡으며 말씀하셨다. "선생님 우리 정수가 이번에는 또 무슨 잘못을 한 건가요?" 학생주임은 날 쳐다보며 말했다. "정수 너는 밖에 나가서 기다리고 있어." 나는 아버지 손을 살며시 벗어내고 교무실 밖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문득 아버지의 온기가 아직 내 손에 남아 있음을 느끼며 손을 쳐다봤다. 어릴 적에는 그렇게 크게 느껴지던 아버지의 손이 오늘따라 왜 이렇게 작게 느껴졌을까? 의아했다. 1층 교무실 밖 벤치에 앉아 허공을 쳐다보고 있은 지 십 여분의 시간이 흘렀을까? 뒤에서 '범수야' 하고 부르는 아버지의 음성이 들렸다. 나는 심하게 허리 숙인 아버지 때문에 심통이 나서 일부러 못 들은 척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밥은 묵었나?" 아버지가 어느새 내 옆에 와 앉으며 말했다. "선생님이 뭐래요? 또 정학이래요?" 나는 허공을 응시하며 나지막이 말했다. "정학은 무신 정학? 아들끼리 싸우기도 하는 거지 모 그깟 일로 정학?" 아버지는 교무실과 나를 번갈아 보며 내 기를 살려주시려는 듯 큰소리로 말씀을 이어 가셨다. "괘 안타 걱정 마라! 이 아버지가 다 해결 봤다 아이가!" 갑자기 그런 아버지가 안쓰러워 보여 나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장사하다 오셨을 텐데 빨리 가보셔야죠?" "안 그래도 오늘은 장사가 안돼 아직도 팔게 마이 남았다." 아버지는 자리에서 일어나 손바닥으로 바지를 툭툭 털며 말씀하셨다. 아버지와 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교문 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문득 어릴 적 아버지와 함께 걷던 시골 길이 생각났다. 나를 잃어버리거나 혹 내가 넘어질까 봐 항상 내 손을 꼭 잡아주시던 아버지! 하지만 아버지의 손을 잡고 함께 걸어본 지가 언제인지 그 기억조차 아련했다. 그리고 아버지 고향에 있는 산만큼이나 커 보여 내가 항상 올려봐야 했던 아버지는 언제부터인가 내가 내려보고 있었다. "근데 오늘은 왜 싸웠는데?"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그냥이요." "그래? 선생님이 네가 왜 싸웠는지 그 이유를 말 안 해서 화가 났다고 하시더라." 나는 아무 말 없이 계속 발 걸음만 옮겼다. "나는 누가 뭐래도 우리 아들 믿는다!" 아버지는 내 등을 토닥이며 말씀하셨다. 어느덧 교문에 다다르자 아버지는 바지 주머니에서 만 원짜리 한 장을 꺼내 내 손에 쥐어주며 말씀하셨다. "배 곯지 말고 배 고프면 먹고 싶은 거 사먹어라. 느그 나이 때는 먹고 돌아서면 또 배 고프고 쇳덩이도 소화시킨다 아이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공부 잘하는 착실한 형과 달리 공부에 관심도 없고 문제만 일으키는 나 때문에 자주 학교에 불려 오셔야 했던 아버지는 단 한번도 내게 매를 들거나 싫은 소리를 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런 나를 형보다 더 믿어주고 챙겨주셨다. "나는 누가 뭐라케도 우리 아들 믿는다!" 내 등을 토닥이며 밝은 미소와 함께 말씀하신 아버지는 어느새 교문 밖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계셨다. 수업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귓가에 스며들었지만 나는 한 참 동안이나 아버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가만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4. 학교 뒤에는 작은 산이 하나 있었다. 이따금 마음이 답답하거나 기분이 울적하면 나는 그 곳에 올라 소리를 지르거나 아니면 큰 바위에 누워 파란 하늘을 바라보는 것으로 답답해진 내 마음과 울적해진 내 기분을 달래주곤 했다. 아버지가 학교에 불려온 그 날도 나는 친구 현수와 함께 야간자율학습을 땡땡이 치고 학교 뒷산에 올랐다. 어둑해진 숲 속에는 귀뚜라미 같은 곤충들의 울음소리가 마치 작은 숲 속의 교향곡처럼 잔잔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고 초생달빛은 숲 속을 은은하게 비춰주고 있었다. 아버지가 준 돈으로 현수와 함께 학교 근처 중국집에서 짬뽕과 소주를 사 먹고 온 우리는 취기를 달래기 위해 잡초 위 바닥에 드러 누웠다. 눈 앞에 펼쳐진 밤 하늘은 어릴 적 시골에서 아버지가 들려주던 재미난 옛날 이야기를 들으며 바라보던 밤 하늘처럼 별이 많지는 않았다. 하지만 답답한 마음과 무거운 현실을 잠시 내려놓기에는 그럭저럭 괜찮아 보였다. "현수 너 괜히 나 때문에 이러는 거 아냐? 담임한테 땡땡이 친 거 걸리기라도 하면 너희 부모님도 아시게 될 텐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 "너 때문에 그러는 거 아니니까 걱정하지마!" 현수는 자리에 누운 채 말했다. "정말이지?" "그래 정말이야." "그럼 다행이고!" 나는 다시 자리에 누우며 말했다. 국민학교 3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현수는 나와 중.고등학교까지 함께 다니고 있는 친구였다. 우리는 오랜 시간 우정의 탑을 함께 쌓아온 사이여서 서로에게 편하고 소중한 존재였다. 국민학교 때까지 상위권 성적을 유지하다 중학교에 진학하며 공부에 흥미를 잃은 나와는 달리 현수는 늘 공부 잘하고 말썽 안 피우는 모범생 친구였다. 어릴 적 내 부탁은 거의 다 들어주시고 내가 궁금해 하는 것에 대한 모든 정답을 가지고 계셨던 아버지는 적어도 나에겐 이 세상에서 가장 크고 멋진 분이셨다. 사람을 비교하는 못된 능 력이 생긴 나에게 아버지는 더 이상 이 세상 최고가 아니었다. "참 오늘 그 덩치 큰 5반 녀석하고는 왜 싸운 거야?" 이번에는 현수가 자리에서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 "너도 알잖아. 내가 싸울 이유는 한 가지밖에 없다는 거." 나도 현수처럼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 "아버지 직업 때문에?" 나는 대답대신 고개를 위 아래로 끄덕였다. 그러자 현수는 "아니 고 3이나 된 녀석이 유치하게 왜 남의 아버지 직업 가지고 뭐라 그러는 거야?"라며 흥분하기 시작했다. "남의 아버지 직업 가지고 왈가왈부할 수도 있지. 단 나 없는 곳에서 내 귀에 안 들리게 하면 괜찮지만 내 귀에 들리면 왈가왈부한 값은 꼭 치러야지!" 현수는 아무 말 없이 내 등을 자신의 손바닥으로 어루만져 주었다. 모범생 현수는 내게 소중한 친구이면서 한편으론 부러움의 대상이기도 했다. 국민학교 3학년 때 현수네 집에 놀러 가면서부터 나는 난생 처음 우리 집과 남의 집을 비교하기 시작했다. 낡고 비좁은 한옥 우리 집과 달리 현수네 집은 부자들만 산다는 5층 아파트에서 가장 좋은 3층에 있었다. 항상 따뜻한 물이 나오고 우리 집처럼 화장실이 밖에 있지 않고 집 안에 있어 밤에 화장실 갈 일이 생겨도 전혀 무섭지 않은 현수네 집은 나에게 신기함과 부러움 그 자체였다. 물건과 물건을 비교하게 된 나는 어느새 사람까지 비교하게 되었다. 대학교수인 현수네 아버지는 늘 깔끔하게 양복을 입고 다니셨다. 그런 그의 모습은 일년 내 단 두벌의 남루한 옷으로 버티시며 생선 행상을 하는 우리 아버지의 모습과는 전혀 딴 판이었다. 나는 이따금 '우리 아버지도 현수네 아버지처럼 멋진 양복을 입고 생선장사 대신 회사에 다니셨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한 번은 우리도 현수네 집처럼 근사한 아파트로 이사를 갔는데 내가 너무 기분이 좋아 집 안에 있는 화장실 변기에 시원하게 소변을 보다 눈을 떠 보니 꿈이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소변 본 일은 애석하게도 현실이었다. 어릴 적 내 부탁은 거의 다 들어주시고 내가 궁금해 하는 것에 대한 모든 정답을 가지고 계셨던 아버지는 적어도 나에겐 이 세상에서 가장 크고 멋진 분이셨다. 하지만 사람을 비교하는 못된 능력이 생긴 나에게 아버지는 더 이상 이 세상 최고가 아니었다. 5.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찌감치 대학진학을 포기한 나는 동네 선배가 운영하는 사채 일을 도와주고 있었다. 일은 비교적 간단했다. 사채를 쓰고 갚지 않는 사람들을 찾아가 돈을 받아내는 일이었다. 그리고 일이 성공하면 선배와 나는 수익을 6대4로 나누었다. 물론 4가 내 몫이었다. 내가 이 일을 시작한 이유는 고졸학력으로 내 나이에 할 수 있는 다른 직업에 비해 비교적 많은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이다. 학창시절 공부를 안 한 내가 어느 날 갑자기 현수네 아버지처럼 양복 입는 대학교수가 될 순 없지만 적어도 우리 아버지처럼 일년 내 후지 구리한 옷을 입고 행상을 하며 선생들한테 허리 조아려 가며 초라하게 살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려면 돈이 필요했다. 한 가지 단점이 있다면 밤낮 가리지 않고 일을 하다 보니 친구 현수를 자주 만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물론 의대에 진학한 현수 또한 엄청난 공부 량에 파묻혀 쉽게 시간을 내지는 못했다. 늦게 일어나 아침도 거르고 집을 나서는 나에게 어머니께서는 빨리 기술을 배워 안정적인 사회생활을 하라고 재촉하셨다. 공부 잘하고 말 잘 듣던 든든한 장남이 군대에 가고 없자 나를 향한 어머니의 잔소리는 날이 갈수록 더 심해지는 것 같았다. 좋은 생선을 조금이라도 저렴하게 구입하려 새벽 일찍 집을 나가 하루 종일 행상을 하고 저녁 늦게 집에 오시는 아버지는 마지막으로 뵌 게 언제인지 기억조차 가물거렸다. 학창시절엔 그 나마 저녁시간에는 볼 수 있었지만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성인이 되어 집에 들어오는 시간이 늦어지고 외박도 하자 한 집에 살면서도 아버지와 나는 쉬 얼굴을 마주칠 수 없었다. 선배가 운영하는 사채 사무실은 재래시장 내 허름한 건물 2층에 있었다.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조용했다. 구석에서 경리 일을 보는 미스 김이 나를 보자 조용히 머리를 숙이며 인사한다. 선배가 인기척을 느꼈던지 들고 있던 신문을 내리며 말했다. "정수 왔냐?" "왜 이렇게 조용해? 애들은?" 나는 선배 앞 검은 색 가죽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어 조금 있으면 올 거야. 내가 은행에 심부름 보냈거든." 선배는 신문을 접어 책상에 내려 놓으며 "김양아 여기 커피 두 잔만 아메리칸 스타일루다 타오너라!"라고 말했다. 선배가 내려 놓은 스포츠 신문을 집어 한국의 마돈나라는 가수 김완선 기사를 읽고 있자 어느새 김양이 커피를 타와 내 앞에 내려놓는다. "미스 김 잘 마실게. 고마워!" 내가 인사를 건네자 미스 김은 수줍은 듯 미소와 함께 목례를 하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문득 말수도 적고 얌전한 미스 김은 왠지 이런 곳에서 일하기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그녀를 다시 한 번 더 쳐다보았다. 철재책상 앞에 앉아 경리 일을 보고 있는 미스 김을 보고 있자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미스 김도 제대로 된 부모를 만났으면 지금쯤 한참 멋 부리며 대학교 캠퍼스를 누비면서 젊음을 만끽하고 있을 텐데…' 그러자 마시던 커피 맛이 마치 세상 맛처럼 더 쓰고 더럽게 느껴졌다. 순간 나도 모르게 화가 치밀었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하루 빨리 부모 면허를 도입하던지 해야지. 개나 소나 무조건 낳아서 대체 뭘 어쩌겠다는 거야? 낳았으면 제대로 키우고 능력이 없음 아예 낳지를 말던가!" "야 정수야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선배가 말했다. "무슨 소리긴? 사람소리지! 오늘 특별히 할 일 없으면 어디 가서 소주나 한 잔 합시다" "따봉! 나야 좋지! 내가 언제 술 마다하는 거 봤냐!" 선배는 물 만난 생선처럼 앞장 서 사무실 문을 열고 나갔다. 그를 따라가던 나는 김양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십만 원짜리 수표 한 장을 그녀 책상에 내려 놓았다. "만 원짜리로 바꿔 드릴까요?" 김양이 말했다. "아니. 그거 미스 김 써!" "저 쓰라고요?" 미스 김의 눈이 커졌다. "그래. 큰 돈은 아니지만 그거 가지고 먹고 싶은 거 사먹던지 아니면 사고 싶은 옷을 사 입던지 오늘만큼은 다른 사람 말고 너만을 위해서 써! 그리고 사무실 일은 내가 책임질 테니까 그만 문 닫고 퇴근해!" 사무실 문을 닫고 나오는데 등 뒤에서 김양의 '감사합니다' 라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더 많은 돈을 주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해 오히려 미안했다. 나도 모르게 입에서 불만이 삐쳐 나왔다. "십팔 사는 게 뭔지…" 6. 점심 무렵부터 시작한 술판은 저녁 9시가 다 되어 끝이 났다. 선배와 나는 소주를 얼마나 마셨는지 10병 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이후로는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술 마시고 집에 가는 길은 늘 숨이 찼다. 그래도 오늘은 전봇대나 아스팔트가 내 얼굴을 향해 날아들지는 않았다. 집에 도착해 대문을 밀자 '끼 이익' 거리는 낡고 녹슨 대문의 한 숨 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제 오니?" 좁은 마당 한 켠에서 연탄 불에 생선을 굽던 어머니가 나를 반겼다. "또 고등어?" 나는 코를 막으며 말했다. "고등어가 어때서? 이거 먹고 싶어도 못 먹고 사는 사람도 많아!" 어머니는 석쇠를 뒤 집으시면서 말했다. "아 네!" 나는 빈정거리 듯 말했다. "저녁 안 먹었으면 어여 씻고 같이 먹자. 아버지 곧 나오실 거다." 어머니 말이 끝남과 동시에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안방 문이 열리더니 파자마 바지에 반팔 흰색 런닝 차림의 아버지가 마루로 나왔다. "야 이게 누고? 우리 집 둘째 아들 정수아이가!" 나는 아버지를 향해 머리를 숙이며 최대한 술 마신 티를 안 내려 노력하며 말했다. "아버지 다녀오셨세요!" 하지만 내 혀는 의도와는 달리 심하게 휘청거렸다. 잠시 후 마루에는 늦은 저녁 밥 상이 차려졌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식사하시는 걸 나는 마루에 걸 터 앉아 보고 있었다. 된장찌개와 묵은 김치 그리고 아버지가 팔다 남아 가지고 온 고등어 구이. 우리 집 밥상은 늘 이런 식이었다. "아버지 우리도 남들처럼 고깃국에 매일 갈비 좀 먹으면 안됩니까?" 아버지께서는 엷은 미소만 지으실 뿐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대신 어머니가 말했다. "술 냄새 난다. 쓸데없는 소리 할거면 어여 씻고 자라! 그리고 말이 났으니 말인데 그 동안 네가 싸움질만 안 했어도…" "고마 해라!" 아버지가 어머니 말을 가로 막았다. "이제 정수도 다 컸는데 알건 알아야지요!" 아버지는 아무 말씀 없이 수저를 내려 놓으시고 방으로 들어가셨다. 이윽고 이어진 어머니 설명은 내가 학교에서 아이들과 싸워 그간 물어준 치료비만 해도 꽤 된다는 것이었다. 아울러 나에게 맞은 아이들의 부모들이 아버지에게 나를 고소한다며 요구해온 합의금도 꽤 된다는 것이었다. 나는 마루에서 벌떡 일어나 화를 내기 시작했다. "아니 왜 그런걸 지금 말하는 건데? 나보고 지금 미안해 하라고 말하는 거야?"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나는 미안했다. "정수 넌 언제 철 들려고 그러니? 이 에미가 지금 너 미안해 하라고 이 말 하는 거니? 제발 네 형 반만 닮아라!" "제발 형하고 나좀 비교하지 말아요. 맨날 '네 형 반만 닮아라!' 지겹지도 않아요? 그리고 내가 엄마나 아버지를 다른 부모들하고 비교하면 좋아요?" 순간 내 자신이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버지를 다른 아버지들과 늘 비교해 왔으면서 어머니가 나를 다른 사람도 아닌 형과 비교하는 걸 싫어하다니! 내 자신에 대한 모순을 발견하자 갑자기 화가 치밀었다. 나는 마당 수도가에 놓여있던 양은 세숫대야를 발로 걷어차고 집을 나왔다. 7. 집을 나와 선배 사무실에서 먹고 잔지 벌써 삼일 째다. 여름 장마가 시작되려는지 아침부터 습하던 날씨는 점심 때가 되자 기어코 창가에 빗줄기를 토해내기 시작했다. "야 비 한번 시원하게 온다!" 창가에 서 담배를 피던 선배가 말했다. 나는 소파에 앉아 미스 김이 빨아다 준 뽀송뽀송한 양말을 신으며 나갈 채비를 했다. "야 비 오는 데 나가려고?" 선배가 나를 보고 말했다. "돈 되는데 비가 문제야? 눈보라가 몰아쳐도 돈이 된다면 가야지!" 나는 동생 두 명을 데리고 사채 삼천만 원을 빌려 쓰고 갚지 못하는 분식집으로 찾아갔다. 원래 이 집은 동생들 담당이었으나 그들이 돈을 제대로 받아내지 못해 내가 직접 나선 것이었다. "이 집입니다 형님!" 키도 덩치도 큰 동생이 말했다. "열어!" 유리로 된 미닫이 문을 '드르륵' 열고 들어서자 주인 아줌마가 '어서 오세요' 하며 우리를 반기려다 동생들을 발견하자 그녀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피어났다. 나는 동생들에게 "일단 엎고 시작하자"라고 명령했다. 그러자 그들은 닥치는 대로 분식집 안을 뒤집어 엎기 시작했다. 식탁이 뒤집어 지고 의자와 수저통이 날아가고 벽 유리가 깨지는 등 분식집 내부가 아수라장이 되자 처음에는 동생 들을 말리려던 오십대로 보이는 그 주인 아줌마는 결국 바닥에 주저 앉아 울기 시작했다. "울지마 울긴 왜 울어~ 그 까짓 돈 갚으면 되지~"키 작은 동생이 주인 아줌마 곁에서 개사한 노래를 부르며 깐족거렸다. "이 여자가 주인이냐?" 내가 물었다. "주인은 이 여자 남편인데요. 지금 없는 것 같습니다." 키 큰 동생이 말했다. 그 때였다. 한 중년 남자가 시장 바구니를 들고 들어오다 난장판이 된 분식집 내부를 보자 시장 바구니를 떨구었다. 그리고는 곧 주인 아줌마에게 달려가 어깨를 감싸 안으며 "여보 괜찮아? 어디 다친 데는 없어?"라고 말했다. 순간 그 중년남자의 모습이 낯설지 않았다. 목소리도 귀에 익은 듯 했다. 나는 무릎을 꿇고 앉아 그 남자의 얼굴을 자세히 보며 말했다. "혹시 용수 아저씨?" 그러자 그 남자는 "내 이름이 용수요. 그런데 댁은 뉘 시요?"라고 반문했다. 그 남자의 얼굴을 자세히 보자 확신이 섰다. 그는 아버지 고향친구인 용수 아저씨였다! "아저씨 저 모르시겠어요? 저 정수에요 김정수!" "뭐 정수? 네가 김천 근우 아들 김정수라고?" 동생들에게 엉망이 된 분식 집을 원래보다 더 좋게 만들어 놓으라고 시킨 나는 용수 아저씨와 함께 인근 포장마차로 자리를 옮겼다. "아저씨 도대체 이게 얼마만이에요? 그 동안 왜 우리 집에 안 오셨어요?" 나는 아저씨의 잔을 채우며 말했다. "그게 말이다…" 아저씨는 주춤거렸다. 아저씨는 우리 집에 자주 놀러 오시던 아버지의 고향 친구였다.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신 용수 아저씨는 서울에 있는 한 은행에 다니고 계셨고 우리 집에 놀러 올 때 마다 어린 나에게 오백 원짜리 지폐를 용돈으로 주시거나 아니면 종합과자선물세트를 사다 주시곤 하셨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아저씨는 우리 집 출입을 딱 끊으셨다. "그래 아버지 어머니는 안녕 하시니?" 아저씨가 말씀하셨다. "그럼요." "아직도 그 산 동네 한옥 집에 살고?" "좀 지겹지만 아직 그 집에 살아요." 나는 웃으며 말했다. "미안하구나. 나만 아니 였으면 네가 그렇게 살고 싶어한 아파트로 진작에 이사했을텐데…" "아파트요? 아저씨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잠시 주춤이던 아저씨는 거듭된 내 부탁에 세월이란 보자기에 쌓여있던 오래 된 이야기를 천천히 풀어놓기 시작했다. 내가 현수네 집에 다녀온 후 학교 숙제로 쓰던 그림 일기장에 '나도 아파트에서 살고 싶다'라고 쓴 내용을 본 아버지는 다음 날 바로 용수 아저씨를 찾아가 주택청약 저축과 또 다른 적금구좌 하나를 개설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워낙 성실하고 근면하신 분이셨지만 그날 이후로 더욱 더 악착같이 돈을 모으셨다고 한다. 리어카에 생선을 가득 식고 하루 종일 행상을 해야 하는 힘든 일을 하셨지만 점심으로 즐겨 드시던 순댓국 값을 아끼기 위해 매일같이 어머니가 싸준 차디찬 도시락으로 끼니를 때우셨다고 한다. 아울러 자식들에게 못 배운 설움을 물려주지 않으려 교육 때문에 서울에 처음 올라왔을 때는 작고 허름한 집이라도 자기 집에서 아이들을 키워야겠다는 일념 하에 아버지는 1년 365일중 단 이틀 추석과 설날만 쉬고 일 하셨다고 한다. 특히 처음 서울에 와 아무 연고도 없고 세상 물정도 모를 때는 영등포 역에서 지게로 짐을 나르는 짐꾼 일도 하셨으며 때에 따라선 비가 오고 눈이 오는 날 영등포에서 장충동까지 그 먼 길을 비나 눈을 맞으며 짐을 지고 걸어갔다고 한다. "정수야 네 아버지는 정말 훌륭한 사람이란다. 나도 자식 키우는 부모지만 난 내 모든 걸 전부 다 자식들에게 주진 못한다. 물론 나도 부모니까 자식들 뒷바라지야 하겠지만 부모이전에 나도 사람이니까 혼자 맛있는 것도 먹을 수 있고 마음에 드는 옷도 사 입고 가끔은 여자 있는 술 집도 갈 수 있는데 네 아버지는 정말이지 평생을 하루같이 너희 두 아들만 위해 자신의 모든 걸 희생한 사람이란다!" 아저씨는 목이 마른 듯 이번에는 술잔대신 물잔을 비우고 말씀을 이어갔다. "어디 그 뿐이니? 내가 돈 욕심에 은행을 그만두고 네 아버지가 아파트 사려고 모아둔 돈을 빌려 사업하다 잘못돼 그 돈을 다 날렸지만 네 아버지는 단 한 번도 나한테 싫은 소리를 하거나 경찰에 신고하지도 않았단다. 이미 돈은 날라간 거 친구까지 잃고 싶지 않다며 말이다." 아저씨의 말을 듣고 있자니 아버지의 모습이 머리 속에 떠 올랐다. 그리고 그간 아버지를 남과 비교했던 내 자신이 한 없이 밉고 또 미워졌다. "정수야! 네 아버지는 말이다 키도 작고 체격도 왜소하지만 자식을 위한 희생과 남을 배려하는 마음만큼은 그 누구도 쉽게 흉내낼 수 없는 거인이란다! 한 마디로 작은 거인이지 작은 거인!" 용수 아저씨와의 짧은 재회를 끝낸 나는 아버지가 보고 싶어 무작정 집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여름 장마비가 주적주적 내리고 있었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얼마나 달렸을까? 이미 내 몸은 비와 땀으로 범벅이 되어버렸다. 대문을 박차고 집 안으로 들어선 나는 무조건 아버지를 부르기 시작했다.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하지만 아무 대답이 없었다. 아니 대답은 커녕 늘 집에 계시던 어머니마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안방 문도 열어보고 부엌 문도 열어보고 연탄을 보관하는 창고 문도 열어봤지만 그 어느 곳에도 아버지나 어머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 때였다. '끼 이익' 대문 소리가 나더니 옆 집 사는 할머니가 들어오셨다. 나는 "안녕 하세요?" 하고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할머니는 그리 밝지 않은 얼굴로 내게 오시더니 작은 종이 쪽지 한 장을 건네셨다. 거기에는 '강북대 부속병원 응급실' 이라고 적혀 있었다. 8. '제발 제발 제발!'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가는 동안 나는 마음 속으로 얼마나 간절히 빌고 또 빌었는지 모른다. 아버지가 제발 무사하시길 말이다. 문득 창 밖을 보았다. 빗줄기는 멈추었지만 내 눈에는 계속해서 빗줄기가 내리는 것처럼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입 안으로 스며들었다. 택시를 타고 가는 동안 옆 집 할머니가 해주신 말이 귓가에 맴 돌았다. '그 동안 어디 있었어? 네 아버지가 널 얼 매나 찾았는지 몰러~ 교통사고 나서 병원에 실려 가서도 계속해서 너만 찾는댜~ 어여 가봐~' 택시에서 내린 나는 응급실을 향해 무조건 달리기 시작했다. 숨이 턱 밑까지 차 올랐지만 힘든지도 몰랐다. 응급실 안내 데스크에 도착한 나는 헐떡이는 숨을 고르며 "저 저기요. 김 김근우 환자를 찾는데요?"라고 겨우 말했다. 그 때였다. 뒤에서 '정수야'라고 부르는 소리에 고개 돌려보니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나를 보자 마자 내 손을 잡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정수야 네 아버지 불쌍해서 어떡하니? 남들처럼 호강도 한 번 못해봤는데 네 아버지 불쌍해서 어떡하니? 너희들 키운다고 먹고 싶은 고기도 한 번 실컷 못 먹고 매일 일만 했는데 너희 아버지 불쌍해서 어떡하니?" 나는 어머니가 볼까 바 고개 돌려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어머니가 들을까 바 우는 소리를 내지 않으려 입술을 깨물었다. 갑자기 쏟아진 장마비에 급 브레이크를 밟던 트럭이 인도로 미끄러지며 아버지를 덮쳤고 아버지는 응급실에 실려와 급히 수술을 받고 지금은 중환자실에 누워 계셨다. 의사는 외관상 보이는 골절은 큰 문제가 아니나 장기파손이 심각해 하루 이틀 경과를 지켜 봐야 한다고 했다. 하루 종일 눈물이 나왔지만 그 눈물은 쉬 멈추지 않았다. 어릴 적 아버지와 함께 걸었던 시골 길을 생각해도 눈물이 나왔고 며칠 전 아버지가 드시던 밥 상을 생각해도 눈물이 나왔다. 어머니와 난 그렇게 아버지 생각에 하루 종일 눈물만 흘렸다. 사랑하는 아버지가 병상에 누워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어도 자식으로서 아무 것도 할게 없다는 무능력에 내 자신이 밉고 그래서 또 눈물이 나왔다. "네 아버지는 말이다, 키도 작고 체격도 왜소하지만 자식을 위한 희생과 남을 배려하는 마음만큼은 그 누구도 쉽게 흉내낼 수 없는 거인이란다! 한 마디로 작은 거인이지, 작은 거인!" 병실 근처 의자에 앉아 한 없이 흐르는 눈물을 주체 못하고 있는 그 때였다. "김근우씨 보호자 되시죠?" 고개 들어 쳐다보니 간호사였다. "네." 짧게 대답했다. "김근우씨가 지금 의식이 돌아와서 식구분들을 찾으세요." 간호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나는 어머니를 모시고 병실로 달려갔다. 작고 왜소한 아버지의 손을 잡고 그 앞에 앉았다. 아버지 얼굴엔 피 멍이 들어 작은 얼굴이 더 작고 초라해 보였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 상태에서도 어머니와 나의 걱정을 덜어주려는 듯 애써 미소를 지으려 하셨다. 하지만 그럴수록 통증이 있는 듯 간간이 인상을 쓰기도 했다. "아버지 미안해요. 그리고 사랑해요!" 나는 아버지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 "우 울지 마라! 사내 놈이 눈물이 많으면 안 된다." 아버지는 힘에 겨운 듯 잠시 숨을 고르고 계속해서 말을 이으셨다. "아들 미안하다. 에비 잘 못 만나 남들마냥 아파트에서 매일 고기 국에 갈비도 못 먹고 좋은 옷도 못 입고 살게 해서 억수로 미안하다." "아니에요 아버지! 제가 잘못했어요. 죄송해요." 나는 아버지 앞에서 참았던 눈물을 터 틀이며 엉엉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콧물과 눈물이 범벅이 되어 내 시야를 가렸지만 나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아버지 어서 일어나세요. 제가 그 동안 아버지 가게 차려드리려고 돈 모았어요. 그리고 아버지 맨날 따듯한 물 나오는 아파트에서 살게 해드리려고 적금도 붓고 있단 말이에요. 아버지 아버지!" 나는 절규에 가까운 소리를 토해내고 있었다. "정수야 내년에 느그 형 제대하면 우리 오랜 만에 기차 타고 시골에 가면서 사이다도 사 묵고 아버지랑 손 잡고 시골 길도 걷고 토끼도 잡고 놀자 알겠지?" 아버지는 내 손을 꼭 잡으시며 말씀하셨다. 나는 설움이 복받쳐 울먹이며 아무 대답도 못하고 고개만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그렇게 내 눈 앞에서 내 손을 잡으신 채 어머니와 나 그리고 군대에 가 있는 형을 남겨놓고 우리 곁을 떠나셨다. 낮부터 내리기 시작한 여름 장마비는 어머니와 내 눈가에 흐르는 눈물처럼 그날 밤에도 쉬 멈추지 않고 계속 내렸다. 9. 매년 여름 장마가 시작될 무렵이면 나는 어머니를 모시고 아내와 함께 아버지의 시골 고향 집에 가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얘 에미야! 돼지머리고기 챙겼냐?" "네 어머니! 상하지 말라고 아이스 박스에 넣어 잘 챙겼어요." "이민간 너희 형도 같이 가면 참 좋으련만…" 어머니는 아버지 기일에 쓰려고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 가장 좋아하셨지만 돈 때문에 마음껏 드시지 못했던 순댓국에 들어가는 돼지머리고기를 매년 양껏 준비하셨다. 어릴 적 아버지와 함께 걷던 시골 길은 세월의 풍파 때문에 많이 변해있었다. 어머니의 바램처럼 이제 아버지 고향마을까지 아스팔트가 곱게 포장되어 편하게 차로 방문할 수 있게 되었다.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문명이 발전되어 살기 편한 곳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그게 살기 좋은 세상은 결코 아니었다. 조금 불편하고 조금 모자랐어도 나는 아버지와 함께 시골을 찾던 옛 시절이 더 살기 좋은 세상인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자주 찾아 뵙지 못한 아버지 산소에는 그간 풀이 많이 자라있었다. 고향을 지키는 사촌 형님이 있어 간혹 아버지 산소를 돌봐주긴 하지만 나는 내가 직접 벌초할 때 마음이 편해짐을 느낄 수 있었다. 벌초 후 집에서 준비해온 음식을 아버지에게 대접한 우리는 아버지 곁에 둘러앉아 늦은 점심을 먹기 시작했다. 목을 적시라며 와이프가 건넨 사이다를 받아 한 모금 마셨다. 어릴 적 아버지가 기차 안에서 사주었던 사이다와 똑 같은 회사에서 만들어낸 똑 같은 제품이었지만 왠지 맛이 달랐다. 아마도 그건 아버지의 사랑이 담기지 않은 사이다였기 때문인 것 같았다! 평소보다 더 아버지가 보고 싶은 오늘따라 '성인이 되면 누구나 아이를 낳을 수는 있지만 아무나 부모가 될 수 없다'는 내 신념이 더욱 더 굳어지는 것 같았다. 나는 아버지의 산소를 바라보며 마음 속으로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버지 아버지는 제가 이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이 세상 최고의 남자였어요. 아버지 저도 아버지처럼 자식을 위해 모든 걸 희생할 수 있는 훌륭한 아버지 아버지 다운 아버지가 될 수 있을까요?' 〈끝〉 ■수상소감…'내일'이라는 희망의 시앗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루하루 죽지 못해 사는 사람과 단 하루를 살아도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사는 사람! 그리고 이 두 종류의 기준은 삶에 대한 희망 존재유무의 차이가 아닐까 싶습니다. 지독한 불경기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고통 받고 있습니다. 하루 아침에 집을 잃고 잘 다니던 직장을 잃고 그래서 사랑하는 가족과 헤어지고…. 저 또한 그런 사람 중에 하나입니다. 하루하루 사는 게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제게 주신 소중한 삶을 오늘이 힘들다는 이유만으로 결코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밤 마다 찾아오는 자괴감과 힘든 현실을 이겨내려 술과 담배 대신 펜을 잡고 글을 썼습니다. 제가 쓴 건 단순한 소설이 아니라 '내일'이란 희망의 씨앗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씨앗은 중앙신인문학상이란 작은 꽃봉오리가 되어 제 입가에 실로 오랜 만에 밝은 미소를 걸어 주었습니다. 이제 저에겐 그 '꽃봉오리'를 만개시켜야 할 책임이 생겼습니다. 편치 않은 현실의 벽이 있지만 중앙신인문학상이 제게 준 희망을 벗삼아 앞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과 희망을 전해줄 수 있는 따듯한 글을 쓰겠습니다. 그것만이 제게 능력주신 하나님과 제 글을 뽑아주신 심사위원 모두에게 진정 감사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감사합니다.

2010-05-10

[중앙신인문학상-심사평: 시·시조 부문] 신선한 비유법 구사한 기교 돋보여

지난 해와 응모작품의 수는 비슷했지만 작품수준은 대체로 더 높다고 평가되었다. 한 사람이 한꺼번에 많은 작품을 보내 온 경우도 여럿 있었고 기성시인들의 이름도 눈에 띄었다.그런 가운데 장종의씨의 ‘누룩이야기’외 3편은 어느 시를 내놓아도 당선작으로 손색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으나 ‘누룩이야기’를 최종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먼 길일수록 자꾸 뒤를 돌아 보는 것인가’ 이렇게 서두를 꺼내놓는 이 시는 고국과 겨울 밤의 향수 속에서 누룩으로 술을 빚는 평범한 행위를 그리는 데에도 사막생활을 물에 불려 술밥을 만들고 자식걱정에 주름이 더 깊어진 어머니 얼굴 빛 같은 누룩을 넣고 시린 겨울 하늘을 붓는다는 등 신선한 비유법을 구사하여 한 편의 서정시를 직조하는 기교가 단연 돋보였다. 가작으로 선정된 송순례씨의 ‘가시들풀’은 짧은 이야기같은 시적 서사가 매우 돋보였다. 텃밭 옆길에 서 있는 가시들풀 그것은 사랑받지 못한 탓인가/세상 혼자 싸우려는듯 온통 가시로 두러고 할머니는 텃밭에서 오이며 가지를 마치 기다려도 오지않는 자식들을 부르듯 그 이름을 부른다고 그리고 평생 열매라고는 가시뿐인 그자신을 바라본다는 시적 서술이 좋았다. 가시들풀은 마지막 가시랭이같은 할머니의 그모습, 환유적 장치이기도 하다. 이분의 시‘거미줄’도 선에 넣을 만했다. 무려 12편을 보낸 문창국씨의 시중에서 ‘손에게’를 가작으로 선에 올렸다. 큰 손과 작은 손의 대칭적인 면을 서술하면서 일상에서 하잖아서 존재감이 없던 손에 대한 관조와 시적 사유가 눈에 띄었다. 이 밖에도 선에 넣지 못한 아쉬운 작품들이 있었다. 이영숙씨의‘동거’ 김정원씨의‘우화’ 박신아씨의 ‘어머니’ 최광운씨의‘노란주전자’ 손용상씨의 시조‘세월’등의 작품이었다. 심사위원/김호길·배정웅 시인

2010-04-20

[중앙신인문학상-시 부문 당선작] 누룩 이야기

우선 시와 시조 부문 당선작으로 시작 단편 소설 당선작 '남편의 가방'(우수정)을 27일자 웰빙 섹션에 가작 '귀향의 조건'(백해철)을 5월4일자 웰빙섹션에 가작 '작은 거인과 사이다'(이상희)를 5월 11일자 웰빙 섹션에 게재합니다. 또한 논픽션 당선작 '미켈란젤로의 꿈'(박혜자)은 5월18일자 웰빙섹션에 실을 계획입니다. 논픽션 가작과 평론 가작 수상작은 지면 관계상 신문에 게재하지 못하게 됨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 먼 길일수록 자꾸 뒤를 돌아보는 것인가 군불에 술이 익어가던 겨울 밤이 그리워 항아리를 얻어 와 막걸리를 빚는다 건조해져 가는 사막 생활 물에 불려 술밥을 만들고 자식 걱정에 주름이 더 깊어진 어머니 얼굴빛 같은 누룩을 넣고 옷깃 여미게 하는 시린 겨울 하늘을 붓는다 너무 멀리 와서 쉬 돌아갈 수도 없는 길 설익은 감정들을 추스르며 하루하루 살아가다 항아리 뚜껑을 열어보니 신명난 굿판이 벌어졌다 굿거리 장단에 맞춰 춤사위가 펼쳐지고 살풀이라도 하는지 맑던 물이 유즙이 되어 있었다 오고 가는 게 목소리뿐이라 아쉽기만 했는데 머리가 하얗게 센 남루한 어머니 곁에 계셔 그 냄새에 취해 한 시절 흘러갈 것 같다 가슴에 묻고만 있던 사랑의 불씨들 더는 참을 수 없어 먼 이국까지 단숨에 건너와 타고 있다 먹고 죽을 건 가난밖에 없던 빈곤한 더부살이 때에도 어머니는 누룽지며 고구마를 곧잘 만들어 내셨다 평생 퍼주는 것만 아는 어머니의 삶이 무르익는 밤 덩실 어깨춤을 추며 달빛이 내려앉고 추억의 힘으로 살아가라고 발자국의 깊이 만큼 그리움이 쌓인다. ■수상 소감…"시가 있어 늘 기쁨이 절로, 이민생활에 활력소 됐으면" 산이 좋아 주말이면 늘 산을 타던 친구가 산은 변함이 없다는 말을 하곤 합니다. 그 말을 실감하지 못하다가 애플밸리에서 1년 남짓 살다 보니 이제는 알 것만 같습니다. 병풍처럼 둘러선 빅베어 산을 매일 대하다 보니 이젠 눈을 감고도 그 모습이 한 눈에 들어옵니다. 봄 기운이 완연한 4월에도 빅베어 산은 머리에 하얀 눈을 덮어쓰고 있습니다. 그 모습이 자신은 아직 겨울을 보내지 않았다고 항변하는 것 같습니다. 그 고집스러워 보이는 모습이 좋아 하루에도 몇 번씩 일을 하다가 바라보곤 합니다. 머리에 잔설을 이고 구름 위에 있는 빅베어 산처럼 힘든 노동의 끝에는 나도 모르는 새 내 생각은 시를 향해 있습니다. 외면할 수도 버릴 수도 없어 이제는 제 생활의 뿌리가 되어 있는 시 그 시가 가슴 벅찬 기쁨을 선물해주었습니다. 시가 있어 삶이 풍요롭고 위안이 되고 기쁨이 됩니다. 저뿐만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이 시를 통해 힘든 이민생활에 활력을 찾길 소망합니다. 부족한 시를 뽑아주신 심사위원들께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더 정진하라는 채찍임을 마음 깊이 새기겠습니다. 제게 시심(詩心)을 일깨워주신 김명인 교수님 사랑하는 아내와 솔이 별이 샘이 그리고 내게 힘을 주는 믿음의 형제인 박창우 형 이근우 형과 함께 이 기쁨을 나누겠습니다.

2010-04-20

[중앙신인문학상-시 부문 가작] 손에게

우선 시와 시조 부문 당선작으로 시작 단편 소설 당선작 '남편의 가방'(우수정)을 27일자 웰빙 섹션에 가작 '귀향의 조건'(백해철)을 5월4일자 웰빙섹션에 가작 '작은 거인과 사이다'(이상희)를 5월 11일자 웰빙 섹션에 게재합니다. 또한 논픽션 당선작 '미켈란젤로의 꿈'(박혜자)은 5월18일자 웰빙섹션에 실을 계획입니다. 논픽션 가작과 평론 가작 수상작은 지면 관계상 신문에 게재하지 못하게 됨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 팔뚝이 전시대 위에 서 있다 크고 거친 손은 끝을 살짝 구부려 작은 손을 내려다 보고 있고 약간의 간격을 두고 큰 손을 올려다 보는 작은 손 성전이라고 이름 붙여진 로뎅의 조각품 심장도 머리도 아닌 손이 성전이다 손이 하는 일을 생각 해본다 먹이고 옷 입히고 등을 토닥여 위로하고 마주쳐 기뻐하고 기도 드리기 위하여 정성스럽게 모았던 손 배고픈 사람에게 손을 내밀고 소녀가장의 눈물을 닦아 주던 성전 안에 무엇이 있는가 경전도 부처도 아닌 나약한 육신 한번도 더럽혀진 적 없는 순결한 영혼 하찮아서 존재감 없던 손이 보석같이 빛나기 시작 한다 올려다 보고 있는 작은 손은 거칠고 투박한 큰 손에게서 무엇을 닮고 싶은 것일까 조명 속에서 숨죽이고 있는 손이 어디서 본듯한 손이다 내 손을 가만히 들여다 본다 ■수상 소감…시란 무엇인가 많은 생각 원고를 보낸 후 수상소식을 기다리는 동안 시란 무엇이며 나는 어떤 시를 쓰고 있는지 많은 생각을 해보았다. 치열하게 시를 쓰고 또 자아를 성찰하며 시를 다듬었는지 뒤돌아 보았다. 이민의 삶을 사는 힘겨운 시간 속에서도 끝까지 시를 붙들고 있는 나 자유로운 사고의 시 정신과 순수한 문학인의 사명감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다. 바라기는 사상과 종교인종을 뛰어넘어 인류평화의 시를 한국인만이 표현할 수 있는 정과 한을 담아 노래하고 싶다. 이민사에 가장 혹독한 불경기로 힘겨워하는 사랑하는 동포들에게 호랑이라는 시로 힘을 보태고 싶다. 가작의 영예를 주신 심사위원님 중앙일보사 그리고 담당하신 선생님께 감사의 예를 올립니다. 호 랑 이 호랑이는 무섭지 않다 그러나 배고픈 호랑이는 무섭다 배부른 호랑이는 달리지 않는다 오직 배고픈 호랑이만 사력으로 달린다 나는 배가 고픈가 죽기로 달릴 만큼 굶주려 있는가

2010-04-20

[중앙신인문학상-시 부문 가작] 가시들풀

우선 시와 시조 부문 당선작으로 시작, 단편 소설 당선작 ‘남편의 가방’(우수정)을 27일자 웰빙 섹션에, 가작 ‘귀향의 조건’(백해철)을 5월4일자 웰빙섹션에, 11일자 웰빙 섹션에 가작 ‘작은 거인과 사이다’(이상희) 전문을 게재한다. 또한 논픽션 당선작 ‘미켈란젤로의 꿈’(박혜자)은 5월18일자 웰빙섹션에 실을 계획입니다. 논픽션 가작과 평론 가작 수상작은 지면 관계상 신문에 게재하지 못함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 텃밭 옆 외 길에 가시들풀 서 있다 사랑받지 못한 탓인가 세상 혼자 싸우려는듯 치마며 목 줄기며 온통 가시로 둘렀다 유일한 삶의 끈인양 이른 아침부터 해질녘까지 떠날 줄 모르고 텃밭에 붙어 사는 할머니의 주름진 종아리에 생채기를 그어대도 이놈의 가시 하는 외마디 소리뿐 할머니는 그 억센 손으로 뽑지 않았다 잠자리 나비들 오가는 사이사이 재빨리 콩잎에 늘어붙는 날벌레들도 정겨운 손님만 같아 심심하지 않았던 가시들풀 할머니는 텃밭에서 오이야 가지야 기다려도 오지않는 자식들을 부르듯 그 이름을 불렀다 무서리가 내리기 전 어느 날 마지막 가을걷이를 하던 할머니가 마른 호박 하나 남기지 않은 채 샅샅이 훑어가고 남은 빈 텃밭에서 더 이상 오이가 아닌듯 아무렇게나 말라 붙어 있는 오이 잎새와 줄기들 더 이상 호박이 아닌듯 이리저리 나 뒹굴고 있는 호박덩쿨 옆에서 혼자 남은 가시들풀은 평생 열매라고는 가시뿐인 자신을 바라보며 쓴 눈물을 허옇게 흘리고 서 있었다 ■수상 소감…살아 움직이는 시 쓰겠다 오랫동안 열지 않은 방문이 확 열리며 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것처럼가작으로 입상했다는 소식은 나를 놀라게 했다. 고치로 몸을 돌돌 감고 그 속에 웅크리고 있던 애벌레처럼 시는 늘 내게 있어서 삶이었고 과제였다. 언제가 세상으로 날아갈 날인지 나의 모습은 어디까지 형성되었는지 모르는 어둡고 좁은 긴 터널 같은 고치안의 삶. 그러나 이번에 들은 가작 소식은 이제 세상으로 날아가도 좋다는 자연의 허락으로 받아들이겠다. 더욱 열심히 날아 세상이 어떠한 지 자연이 그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들이 어떠한지 이제 눈으로 보고 날개로 느끼며 시를 쓰겠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오래된 나의 학교 문학 친구들에게 그리고 십여년이 지나기까지 여전히 문학을 사랑하고 공부하는 예지마을 식구들에게 그리고 새끼새들을 먹여살리듯 열심히 문학을 먹이는 예지마을 강사분들에게 사랑하는 남편에게 이 기쁨을 보내드린다.

2010-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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